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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 손주부 Jun 10. 2020

회사 다니기 싫어서 육아휴직 쓴 남자

손과장 손주부되다.

육아휴직을 내고 살림을 사니 시간이 빛의 속도로 간다. 결혼 전 당시 여자 친구인 아내에게 지나가는 말로 이렇게 말했다. "K씨, 전 앞으로 10년만 더 일하고 은퇴하고 싶어요." 당시 회사 일이 너무 힘들기도 했고, 평생 직장생활만 하고 사는 것은 한번 뿐인 인생인데 너무 재미없을 것 같다란 생각을 했다.


주변에서 육아휴직을 내었다고 하면 "어머, 너무 대단해요." "아이들을 정말 사랑하시는군요." 등의 칭찬 일색이었지만, 나의 본래 목적은 회사가 너무 다니기 싫어서 육아휴직을 낸 것이었다. 육아휴직을 통해 이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거래처의 끊임없는 전화와 상사의 요구, 승진에 대한 압박 등 이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난 충동적으로 부장님께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부장님, 저 육아휴직 내겠습니다." 부장님 표정은 보이스 피싱하려다 실패한 조선족 표정이셨다. 당황하셨다. 회사 잘 다니던 놈이 갑자기 육아휴직을 쓴다니, 무슨 일이 있는 거냐며 물으셨다. 게다가 남자도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지 물으셨다. 부장님은 확인차 남자가 육아휴직이 가능한지 인사과에 전화를 걸어 확인하신다. 부장님은 신병교육대 조교만큼이나 무서운 얼굴로, "손 과장, 잠깐 나 좀 보지" 하시고, 남자 휴게실로 날 데려가셨다. 난 신병과 같은 긴장된 마음으로 부장님을 쫓아갔다.


"손 과장, 지금 정신이 있는 거야? 나중에 복직할 때 받게 될 불이익은 생각해본 거야? 동기들은 다 부장 달고 관리직 될 텐데, 혼자 과장이면 견딜 수 있겠어?" 부장님의 이런 반응은 육아휴직을 결심하고 나서 이미 예상한 반응이었다. 그래서 준비된 멘트를 부장님께 말씀드렸다. "네, 말씀해주신 점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육아휴직 내겠습니다. 심려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육아 휴직하겠다는 말을 꺼내기까지 너무 긴장되었는데 일단 부장님께 말씀드리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다.


여전히 무거운 얼굴의 부장님은 알았다고 하시면서 같은 층에 있는 본부장님 실로 보고 드리러 가셨다. 잠시 정막이 흐른 후 본부장님 호출이 왔다. "오, 손 과장! 육아휴직 내기로 했다면서? 잘했어 정말! 우리 회사가 가족 친화적 이미지를 어필하기 위해서 아이 한 명당 2년간의 육아휴직 제도를 만들었는데, 눈치 보면서 아무도 쓰지 않아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정말 잘한 결정이야" 무섭기로 유명한 본부장님의 뜻밖의 반응에 정말 얼떨떨했다. "승진은 꿈도 꾸지 마라." 아니면 "복직할 때 즈음엔 자리가 없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등등의 협박을 예상했는데 칭찬이라니,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육아휴직을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어머니가 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시고 난 후 ‘나는 왜 사는가?라는 작은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대기업에서 매달 수백만 원의 두둑한 월급을 받았지만, 하루를 멀다 하고 이어지는 잦은 야근과 주기적 해외 출장으로 가정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어릴 때 손이 많이 필요한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커갔지만,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육아와 가사를 전적으로 책임지는 아내와 아빠가 마냥 보고픈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커져갔다. 가진 것이라고는 내 몸을 희생에 얻은 돈 밖에 없었던 터라 내 잘못에 대한 보상심리로 아이들에게 장난감과 선물을 많이 사주었다.


그리고 "난 정말 좋은 아빠야!"라고 끊임없이 스스로 되뇌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손위 처남이 암 말기 진단을 받고 회사에 병가를 내었다. 암 수술 직후 회복되는 가 싶더니 결국 암으로 돌아가셨다. 프랑스에서 유학을 다녀온 후 얻은 직장에서 스트레스가 많았던지 매일 밤샘 근무를 했던 그는 결국 암이라는 큰 병을 얻어 죽음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의 죽음은 내게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돈을 많이 벌어주고 병들어 일찍 죽는 아빠가 될 것인가? 아니면 돈은 못 벌더라도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아빠가 될 것인가? 돈은 이제 벌만큼은 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돈은 아니지만, 지금 집의 전세금으로 시골에 가면 먹고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돈만 벌어다 주는 은행 같은 아버지보다는 아이들과 아내와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친구 같은 아빠가 되고 싶었다.


육아휴직 소식을 접한 양가 부모님은 은연중에 반대의 뜻을 비치셨다. 한창 돈을 벌어야 할 나이에 여자도 아닌 남자가 집에서 살림을 살겠다고 하니 6.25 전쟁 전에 태어나신 분들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힘드셨던 거다. 나의 육아휴직을 환영하고 지지해줄 줄 알았던 딸아이들 또한 결사반대했다.

     

“아빠가 하는 음식은 라면 빼고는 다 맛이 없단 말이야, 엄마가 계속 집에서 요리해주고, 아빠가 돈 벌러 가면 안 돼?”

     

예상외의 격렬한 반대에 조금 섭섭했지만, 아빠가 집에 있으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라면을 끓여주겠다는 약속에 순진한 아이들은 넘어갔다.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나의 이런 결정을 지지해준 사람은 착하디 착한 아내였다. 최근 내 건강 상태가 좋지 않자, 친오빠처럼 나를 떠나보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지지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간에 그녀는 나의 육아휴직을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었다. 그리고 그런 착한 아내가 나는 너무 고마웠다.


육아휴직을 내고 살림을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예상대로 가정 경제였다. 육아휴직을 내기 직전에 러시아에서 관리팀장으로 주재원 근무를 했었다. 한국에 있는 회사에서 월급이 나오면서 현지에서 현지화폐로 주재 수당이 나왔고 쾌적한 거주를 위해 비싼 주거지의 주택 렌트비와 아이들 국제학교 학비까지 나왔다. 이것저것 혜택들을 합하면 한국에 있을 때 보다 월급이 두배에서 세배로 나오다 보니 씀씀이도 점점 커졌다. 방학 때는 항상 아이들과 아내를 데리고 해외여행을 갔고, 주말에는 5성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항상 외식을 했으며, 딸아이들이 사고 싶어 하는 장난감이 있으면 금액 따위는 보지도 않고 모두 다 사주었다.


이렇게 돈을 물쓰듯 펑펑 쓰면서 살다가 육아휴직 후 한 달에 정부로부터 받은 백만 원 정도 되는 돈으로 살림을 살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칼질하다가 동네 분식집 나무젓가락 질로 바뀌었고, 아이들 옷은 해지기 직전의 헌 옷들을 친척 언니 오빠들로부터 물려받고, 러시아에서 타던 수입 자동차는 국산 9백만 원짜리 중고 자동차로 바뀌었다.


물질적 풍요는 줄었지만, 나는 행복했다. 아침 일찍 모두가 분주하게 출근할 때 텅 빈 거실에 홀로 앉아 커피를 내려 마셨다. 혼자 멍 때리기도 하고, 할 일 없음 동네 서점에 가서 책도 읽고 몸이 좀 뻐쩍 지근하다 그러면 바로 낮잠도 잤다.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도 많아졌다. 아이들 친구 이름을 이젠 모두 외우게 되었고, 아이들이 매 순간 어떤 감정을 느끼며 살고 있는지 같이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정신적 행복이 나는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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