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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 손주부 Jun 10. 2020

퇴사하고 싶다.

왜 사는 걸까?

꿈만 같던 육아휴직 3년은 빛의 속도로 지나갔다.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상대성원리를 제대로 체험했다. 군대있을 때 3년은 더럽게 시간이 안가더니 육아휴직 3년은 눈 깜짝하니 지나갔다. 3년간 살림하다 직장에 복귀하니 적응이 여간 힘든게 아니였다. 어느덧 동기들은 관리자가 되어있었고, 관리자도 실무자도 아닌 나의 위치는 정말 애매했다. 회사는 배려해준다고 본부 부장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부장 밑으로 보내줬다. 후배 밑에 들어가지 않은게 다행이다.  


벌써 입사 15년 차다. 복직하고 갑자기 사는 게 재미가 없어졌다. 한번 우울의 늪에 빠지니 계속해서 빠져든다. 헤어나오기 쉽지 않았다. 진심으로 내 자신이 걱정되어, 내가 누릴 만한 재미들을 적어보았다.


1. 먹는 재미

얼마 전에 '최강의 식사'란 책을 읽고 저탄 고지 식사를 시작했다. 저탄 고지를 시작하고 나서 몸에 지방이란 지방은 전부 다 빠졌다. 아침에 방탄 커피(드립 커피 + 버터 한 스푼) 마시고 점심은 식당에서 밥 빼고 반찬만 먹고 저녁은 아보카도와 마스카포네 치즈, 계란을 곁들여 먹었다. 나도 참 독한 놈이지, 이 식단만으로 한 달을 꾸준히 지속했고 두 달쯤 되니 거의 소말리아 사람처럼 되었다. 키 177에 63킬로그램이니 사람들이 어디 아프냐고 말한다.  


저탄 고지 식단을 시작하고 나니 먹는 재미가 없어졌다. 예전에는 밤에 라면도 끓여먹고 치킨도 시켜먹었는데, 요즘엔 별로 땡기지가 않는다. 몸은 점점 건강해졌는데, 웬걸... 먹는 재미가 없어졌다.


2. 입는 재미

2년 전 옷에 관심이 생겨서 미친 듯이 옷을 사들였다. 아마 지난 2년간 내가 산 옷이 41년간 산 옷들보다 훨씬 많았다. 덕분에 옷을 좀 잘 입게 된 것도 같다. 패션 테러리스트로 살다가 주변에서 옷 잘입는다고 칭찬해주니 신나서 옷을 사들였는데, 어느 순간 옷 입는 재미도 점점 시들해졌다.


처음에 새 옷 사고 나서 며칠 동안은 가슴이 설레고 기분이 좋은데, 한 달 두 달 지나고 나면 해당 옷의 설렘이 사라졌다. 새 옷을 사서 설렘을 느끼고 또 사라지고..... 이걸 계속해서 반복하다 보니, 갑자기 다 덧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을 사기 위해서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 옷을 안사면 하기 싫은 일을 덜 할 수 있지 않을까?


3. 키우는 재미

난 딸이 둘 있는데, 심각한 딸 바보였다. 지친 하루 끝에 만나는 딸아이의 미소는 그날의 피로를 녹였다. 그런데 딸아이들이 커서 어느덧 사춘기를 들어갈 때가 되어가자,,,,  딸들은 이제 부모 보단 친구들을 더 찾게 되었다. 물론 내가 어렸을 때를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거지만, 이게 정말 무지무지 섭섭하다. 그리고 왕따 당하는 기분이다.


우리 집은 여자만 셋이다. 취향, 관심사가 남자인 나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 노력도 해 보았다. 같이 손톱에 네일 스티커도 붙이고 여자 아이돌 동영상을 봤으며, 구체관절 인형 놀이도 했다. 역시,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있다.


4. 사랑하는 재미

와이프를 만나 알콩달콩 연애를 하고 만난 지 3개월 만에 청혼을 했다 그리고 1개월 뒤 결혼을 했다. 손만 잡아도 가슴이 콩닥콩닥했고, 내 옆에서 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너무 신기했다.


결혼한 지 벌써 13년이 훌쩍 지났다. 처음 만났을 땐 활활 타오르는 불꽃같은 사랑이었는데, 지금은 불이 많이 식어 미적지근하다. 마지막으로 같이 데이트하고 사랑을 나눈 게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


어찌 되었건 앞으로 마누라랑 60년을 더 살 텐데 (100살까지 산다는 가정하에) 미지근한 온기마저 사라질까 걱정이다.


5. 일하는 재미

난 대기업 정규직이다. 소위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직장에 다닌다. 그런데 재미가 없다. 그리고 보람도 없다.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보면 뱃때지에 기름이 껴서 배부른 소리 한다고 할거 같다.


배부른 돼지가 되느니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고 '밀' 아저씨가 말했는데, 우리나라에서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려 하면 주변에서 가만히 두지 않는다. 우리 장인어른과의 얼마 전 통화 내용이다.


장인: 어, 그래 사위 잘 지내? 회사일은 어때?   


나: 오래간만에 복직해서 일할라니 죽을 맛이네요. 매일매일 12시까지 일하고 아주 힘드네요.... (솔직히, 난 이렇게 말하고 나면, 장인어른이 건강이 더 중요하다며 당장 회사 때려치우라고 말할 줄 알았다. 왜냐하면, 장인어른이 소중히 여기던 큰 아드님을 몇 년 전 과로사로 잃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장인: 그래, 잘하고 있어. 원래 남의 돈 벌어먹기가 쉬운 게 아니야. 어려워야 돈 버는 거지.


나: (속으로, 아,, 그럼 태어날 때부터 엄청난 부자인 패리스 힐튼 같은 사람들은 왜 그렇게 쉽게 돈 버는 걸까요)

.................. 아 네 맞습니다.


아무튼, 회사 일이 재미없어진 수많은 이유중 하나는 책임지게 될까 봐 겁나서 의사 결정을 하지 못하는 윗분들을 볼 때다. 얼마나 회사에서 오래 연명하고 싶은지 의사 결정은 안 하고 계속 더 나은 방안은 없는가 다른 안만 계속 가져오라 한다. 계속 가져다주면 결국엔 첫 번째 안으로 돌아가거나, 이미 시기를 지나서 필요없어진다.


회사 20년 넘게 다녀도, 윗사람들 (심지어 본인보다 어리거나 후배임에도 불구하고)한테 할 말도 못 하고 비위 맞춘다고 용쓰는 게 안쓰럽다. 어찌보면 나의 미래 모습일지도 모른다. 강아지처럼 윗사람 앞에서 살랑살랑 꼬리 치는 것을 보면 괜스레 기분이 씁쓸해진다.


15년째 회사 생활을 하다 정신 차려보니 나도 어느새 강아지가 되어 있었다. 식당에 가면 나도 모르게 그들을 위해 수저를 놓고 있고,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내리시도록 양보하며, 거지 같은 아재 개그에 배꼽 빠질 것처럼 억지로 웃는다. (난 회사원보다 연기자가 체질인 듯)


이렇게 재미난 일이 없는데도 사는 건 그냥 삶이 주어져서 사는 것 같다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 죽기엔 조금 아까운 거 같고, 그렇다고 회사 때려치우고 나와서 하고 싶은 대로 살기엔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여 그런 결단도 못 내리고 말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난 충동적인 행동을 잘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조만간 회사에서 사표 던지고 나올 것 같다. 와이프한테 얹혀살게 되면 친척들로부터 사람 대우 못 받을 것 같은데, 회사에서 하루 10시간 사람 대우 못 받으면서 사는 것보다, 명절 때 가끔 만나서 사람 대우 못 받고 사는 게 훨씬 나을지도 모르니깐.......


게다가 돈을 많이 벌어도 쓰고 싶은데도 없다. 옷도 사고 싶은 만큼 사봤고, 맛난 것도 먹을 만큼 먹어봤다. 이번 생에 회사원 놀이는 15년 정도 해봤으니, 이젠 그만 하고 다른 놀이 거리를 좀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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