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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 손주부 Jun 11. 2020

사표 내기로 결심한 날  

손팀장에서 손주부로 태어난 날

15년간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기로 마음먹은 날 아침, 부장님께 출근하자마자 말했다.


"부장님, 저 잠깐 시간 되시면 면담 좀 부탁드립니다." 부장님은 순간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뭐야, 아침부터 사람 무섭게 면담이라니,....."


부장님보다 난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서 회의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부장님이 들어오시자마자 말씀드렸다.


"부장님, 저 이제 회사 그만 다니려고 합니다. 2주에서 1달 내에 나갔으면 하니, 후임자 빨리 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장님은 적지 않게 놀라신 얼굴이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내가 너무 일을 많이 시켜서 그런 거야? 아니면 실장님이 요새 너무 갈궈서 그런 건가?"


머릿속에서 난 어떠한 답변을 해야 할지 온갖 생각이 다 지나갔다. 사실대로 말씀드려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잘 포장된 가식적인 멘트를 하고 나와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난 가식과 사실의 중간을 선택했다. 퇴사 이유 중에서 말씀드려도 곤란하지 않을 사유를 말씀드렸다.


"사실 허리가 좀 안 좋았는데, 최근에 매일 12시간 정도 앉아서 근무하다 보니 지난 금요일부터 허리 통증이 심해져서 도저히 일을 할 수가 없네요. 지난 15년 동안 좋은 직장에 다녀서 가정도 꾸릴 수 있었고, 많은 경험도 쌓을 수 있어 정말 좋았는데 이렇게 되어 정말 죄송하고 아쉽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자마자 부장님이, "그래, 알았어 오늘 중으로 사표 수리할게"라고 말했다면 좀 속상했을 텐데,

부장님은 정말 고맙게도, 나를 붙잡으려 하셨다.


본인도 매일매일 사표 내고 싶은데 참고 산다, 애들은 어떻게 할 거냐, 원래 다 그렇게 사는 건데 좀만 더 참았다가 같이 주재원으로 나가자, 차라리 지방 지점 가는 게 어떠냐 등등으로 날 회유하시고자 했다. 이렇게 붙잡아 두려 하시는 모습을 보니 죄송하기도 하고 회사에서 인정받는 기분도 들어서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았다.


"부장님, 그간 정말 오랫동안 생각했는데, 15년간 일했으니 이젠 뭔가 다른 것을 좀 해보고 싶습니다." 내 표정을 보시고 부장님은 이제 이 녀석한테 아무리 말해도 필요 없겠다는 생각이 드셨는지, 알겠다는 말씀을 하시곤 바로 실장님 실에 들어가서 나의 사직 의사를 전달하셨다. 사직 의사를 전달하고 이틀간 집에서 쉬었다. 허리가 좀 많이 아프기도 했고, 끝없이 쏟아지는 업무에서 좀 쉬고 싶기도 했다.




쉬는 이틀 동안 그새 나의 퇴사 소문은 사내에 쫙 퍼졌다. 그리고, 내 전화기는 온갖 전화와 문자로 소문의 진실을 알고자 하는 지인들로부터의 연락이 끊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질문은 계획이 있느냐? 나가서 먹고 살 준비가 되었냐?라는 질문이었다. 난 솔직히 계획이 없었다. 영화 기생충에서 송강호가 했던 말처럼 인생에 계획대로 되는 건 없기 때문에, 무계획이 계획이다라는 말처럼 살 것이라고 묻는 이들에게 답했다. 그러면 그들은 날 미친놈처럼 쳐다보거나 내가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불혹이 지나고 보니 인생이 뜻대로 되는 게 없더라. 우리 모두가 어릴 때 계획한 대로 살았다면, 우리 모두는 서울대 가거나  의대에 갔을 것이고, 지금 쯤이면 삼성전자 다니거나 개인 병원을 차려 모두 떵떵거리며 살고 있을 것인데, 나는 당초 계획과는 달리 수능을 완전히 망쳤고, 수능을 망쳤기 때문에 유학을 갈 생각을 했다. 유학 다녀온 덕분에 지금처럼 해외영업 관련 일을 할 수 있었고, 해외 영업 선택한 덕분에 지구 상 여러 나라들을 체험해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뭐, 수능 잘 봐서 의사로서의 삶도 나쁘지 않았겠지만, 돌이켜보면 수능을 망쳤기 때문에 난 지금처럼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40대 초반에 회사를 관두는 것이 그렇게 걱정되지는 않는다. 회사에 남아있었으면 안정된 생활과 노후가 보장되었겠지만, 늘 하던 루틴 한 일의 반복과 직급이 올라갈수록 업무에 대한 압박과 사내 정치에 대한 압박으로 힘든 삶을 살았을 것이다.

지금 당장 내가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전혀 계획은 없지만, 이젠 책도 많이 읽고 나는 어떤 사람인지 다시 한번 고민하고, 돈보다는 내 마음이 따스해지는 일을 할 것이다.  


다음 주 월요일이면 마지막 출근 날이다. 남들이 다들 좋아하는 돈 많이 주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장에서 나온다는 말에 주변에서는 미쳤다, 집이 잘 사나 보다, 나중에 후회할 거다 등등 걱정? 아닌 걱정을 해주었는데, 나를 잘 아는 지인들은 나의 선택을 진심으로 지지해 주었다.  처음엔 매달 꾸준히 들어오던 돈이 끊어지면 어찌 될까 하고 솔직히 조금 걱정도 되지만, 지난달 내가 사는데 필요한 최소 금액이 얼마인지 체험한 결과 이런 걱정은 조금 누그러들었다. 최저 시급을 주는 곳에서 월급을 받아도 충분히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경기가 어렵긴 해도 최저 시급 주는 곳은 아직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아무리 돈을 못 벌게 되더라도 머리 깎고 산에 들어가면 밥은 먹을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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