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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 손주부 Jun 12. 2020

사표 내고 본 중소기업 면접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퇴사할 땐 좋았다. 퇴직금도 나왔겠다. 시간도 있고 돈도 있고 세상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집에서 하루 종일 놀기만 했다. 책 보다가 글 쓰다가 배고프면 밥 먹고 지루하면 동네 한 바퀴 마실 나갔다. 그래도 아무 걱정 없었다. 그런데, 웬걸 백수생활이 일주일이 되고 일주일이 한 달이 되니,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컴퓨터 앞에 앉아서 미친 듯이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나를 발견했다.


 




마지막으로 면접이란 것을 본 게 2005년이었으니깐, 딱 15년 만에 면접을 보았다. 서류 10군데 정도 넣었는데, 한 군데에서 면접 보자고 연락이 왔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중소기업이었는데, 미디어를 통해 본 그들의 직장 문화가 참 좋아 보였다. 11시에 면접이었고 문정역에 소재한 회사였다. 집에서 지하철 4 정거장 거리여서 난 10시 10분경에 슬슬 출발했다.


그런데, 내비게이션 예상 도착 시간을 보는 순간 기겁했다. 면접장소는 지하철 역에서부터 멀리 떨어져서 있어서 예상 도착 시간이 10시 50분으로 뜨는 것이었다. 초행길인 데다 12층에 소재하고 있어 엘리베이터 대기 시간까지 따지면 면접에 늦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났다. 그리고 지하철역에서 내리자마자 달리기 시작했다. 6월 초순임에도 불구하고 30도가 넘는 한여름 날씨에 그늘도 없는 뙤약볕 아래 양복 입은 나는 미친 듯이 전력질주를 했다. 면접 본다고 머리엔 왁스를 바르고 잘 다려진 하얀색 와이셔츠에 봄, 가을용 울 정장을 입고 뛴 덕분에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나왔다. 만화 주인공처럼 다리가 동그라미 모양이 생길 정도로 달려준 덕분에 다행히 면접 15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땀을 식히고 숨을 고를 겸 화장실에 들어가서 거울을 보았다.


꺄악!!!!!!!!!!!!!!


얼굴에 바른 선크림은 땀에 씻겨 나와 얼굴이 얼룩덜룩했고, 머리에 바른 왁스는 바람에 날려 아톰머리가 되었으며, 겨드랑이에 나온 땀들은 와이셔츠에 얼룩무늬를 선사해주셨다.


오늘 면접은 정말 망한 것인가?


화장실 휴지로 대충 땀을 닦고 회사에 들어갔다. 리셉션에 계시던 분이 시원한 보리차를 주시면서, "저기 면접 장소에 들어가 앉아서 대기하고 계세요."라고 말씀하셨다. 회사는 참 아담했다. 대표가 젊은 사람이어서 그런지 구글이나 페이스북과 같은 느낌이 나는 실내 인테리어에 직원들은 모두 자유분방한 옷차림이었다. 혼자 양복에 넥타이 차림이어서, '나 오늘 면접 보러 왔어요!' 하고 광고하는 것만 같았다.


잠시 뒤 면접관 두 명이 들어왔다. 어색한 악수와 인사를 나누고 첫 번째 질문을 들었다.


"아니 왜 그 좋은 회사 관두고 이런 회사에 오시려는 거예요?"


순간 갈등에 빠졌다. 퇴사 이유를 사실대로 말하자니 바로 탈락할 거 같고, 그렇다고 가식적으로 말하자니 영 맘이 내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퇴사 이유는 다 뻔하지 않은가? 회사가 싫으니깐 나온 거다. 안 맞으니 나온 거다. 절이 싫으면 중이 나오는 거다.  뻔히 알면서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란 생각과 함께 예전 여자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기는 너무 좋은 사람인데, 나한테 너무 과분한 거 같아.
더 좋은 사람 만나길 바래.


이런 멘트 정말 싫다. 너무 좋은 사람인데 왜 헤어지자고 말하는 것일까? 헤어지는 마당에 끝까지 가식적으로 말하는 꼴이라니. 그런데, 면접 날 내가 이런 가식적 멘트를 하고 있었다.


"전 직장의 대우는 좋았지만, 매년 매출이 줄어들고 있어 침몰하는 타이타닉호 같았습니다.  XX사처럼 성장하는 회사에서 함께 성장하며, 제 남은 인생을 불태우고 싶습니다."


아, 이런 멘트 하는 내가 너무 싫다. 돈에 무릎을 꿇은 기분이다. 백수 생활하다 돈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해와서 지원했습니다라고 말하려다 내 머릿속 이성 세포가 감성 세포를 때려눕혔다. 면접은 순조로웠던 것 같다. 잘했는지 여부를 떠나서 면접관이 계속 웃음 짓고 있는 것을 보면 좋은 사인이지 아니었나 싶다.


물론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므로 기대는 하지 않는다. 면접관들의 걱정은 내가 너무 나이가 많아서 입사를 하게 되면 실무를 해야 되는데 제대로 할 수 있겠냐는 우려를 표명했다. 이런 면접관의 불안감을 불식시키기 위해 뽑아주시면 신입 사원처럼 열심히 일하겠다고 말했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이런 말이 나오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많이 놀랬다. 멋지게 회사 관두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또 다른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참 애처로웠다. 맘에 드는 이성 앞에서 멋진 포즈 잡고 걸어가다 바지 뒤가 찢어진 기분이다.


며칠이 지난 뒤 연락이 왔다. 나의 경험과 이력이 모두 맘에 드는데 너무 큰 기업에 있었기 때문에 부담이 된다는 것이었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스타벅스 기프트 콘이 휴대폰으로 배달되었다. 당시 그 기프티콘으로 인생 최고로 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원래 쓴 커피인데, 그날따라 더 쓰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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