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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 손주부 Dec 14. 2020

#74 점심하기 귀찮아서 끓여준 라면

살림을 살다 보면 요리가 정말 하기 싫은 날이 있다. 지난주 금요일이 그랬다. 회사 다닐 때도 그랬지만 주부가 된 이후에도 금요일 오후는 괜스레 일하기 싫어진다. 그날따라 요리하고 설거지하는 것이 너무 귀찮게 느껴져 딸아이들에게 평소에는 잘 안 끓여주는 "너구리"(라면의 한 종류, 동물 아님)를 끓여주었다.


"아빠! 대박 맛있어! 너무 행복해! 오늘 최고로 기분 좋아!"


요리하기 귀찮아서 라면을 끓여주었는데 반응이 너무 좋다. 내가 만든 음식을 누군가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다. 그 누군가가 딸이면 더욱 좋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평소 열심히 준비한 음식에서는 보지 못한 리액션에 약간 맘이 상했다. 한 시간 동안 공들여 만든 음식들이 3분짜리 라면에게 의문의 1패를 당했다.


'확 맨날 라면만 끓여줘 볼까 보다. 그래야, 아빠가 만든 집밥을 고마워하지!'라고 속으로만 생각해 본다. 다시 생각해보니 우리 애들은 맨날 라면을 먹어도 좋아할 것 같다. Gen장.




신입사원 시절에도 의도치 않았던 일이 잘 풀리는 경험이 있었다. 한국에 들어와서 취직을 했는데, 회사는 현장 경험을 쌓으라며 충청도 소재의 한 도시로 발령을 내었다. 입사하면 잘 다려진 네이비색 양복을 입고 검은색 캐리어를 끌며 해외 출장만 다닐 줄 알았는데, 맨 처음 주어진 업무는 시골 마을의 슈퍼마켓 관리 업무였다.


업무가 어려웠던 것은 아니지만, 내 강점인 영어를 쓰지도 못했고, 퇴근 후에는 자취하는 선배님들과 밤늦게까지 술을 마셔야 했다. 이렇게 1년을 지내면 건강도 해치고 영어도 다 까먹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내었다. 지점장님께 건의해서 오후 6시부터 8시까지 회사 빈 공간에 마을 사람들을 위한 무료 영어 교실을 열었다. 생각보다 동네분들이 많이 모였고 나의 ZAL생긴(?) 외모와 느끼한 발음 덕분에 영어 교실의 반응은 좋았다. (죄송합니다. "ZAL생긴"은 취소하겠습니다. 그냥 젊어서 좋아해 주신 걸로....)


솔직히 회사를 위해서라기보다 영어를 계속 쓰고 퇴근 후에 술을 조금 덜 먹기 위해서 제안한 아이디어였는데, 젊은 사람이 대단하다며 본부장님께 표창을 받았다. 상장을 받으면서도 불순한 의도를 들킬까 봐 얼굴이 화끈거리고 조마조마했다.  




저녁 식사 준비해야 하는데 글 쓰다 보니 벌써 저녁식사시간이다. 오늘도 라면이나 끓여볼 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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