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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 손주부 Dec 12. 2020

#72 단발병  걸린 남자

원래 단발병이라 함은 단발이 잘 어울리는 연예인을 보고 단발머리를 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는 병이다. 하지만 남자인 내게도 단발병이 있었다. 단발머리 여자에게 금방 사랑에 빠지는 병이었다.


어려서부터 단발머리 여성을 정말 좋아했다. 어렸을 적 좋아했던 여자 배우들도 모두 단발이었다. 봄날은 간다의 이영애 씨부터 "오겡끼 데스까?"를 외치던 나카야마 미호까지 내가 좋아했던 여성들은 모두 단발이었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께서 대학만 가면 자연스럽게 여자 친구가 생긴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철썩 선생님 말만 믿고 열심히 공부했는데, 대학가도 여자 친구는 생기지 않았다. 옷도 못 입고 여자 앞에만 서면 얼굴이 빨개지는 사람을 좋아하는 여자는 없었다.


그렇게 홀로 캠퍼스를 다니던 어느 날 일본 친구가 같이 밴드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손주부! 밴드 만들면, 여자 친구 금방 사귈 수 있을 거야!”


절대 음악을 좋아해서가 아닌, 단발머리 여자 친구를 한 번 만들어 보겠다는 음흉한 목적을 가지고 밴드를 결성했다. 그래서 여자 친구를 사귀었을까?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밴드 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나의 머리도 점점 길어졌다. 그리고 1년 동안 머리를 깎지 않았더니 어느덧 내 머리가 단발머리가 되어 있었다. 단발머리 여자 친구 좀 보내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느님은 단발머리를 내게 주셨다.


총각시절 없어졌던 여권이 얼마 전 책장에서 발견되었다. 여권 속 단발머리의 앳된 내 모습을 보고 아내는 웃겨 쓰러졌다.  


단발병을 부르는 이영애, 히로스에 료코, 나카야마 미호

아내는 결혼하고 나서 자기를 만나기 전에 몇 명의 여자와 사귀었는지 물어봤다. 순간적으로 대답을 진짜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당신이 처음이야"라고 말하면 왠지 안 믿을 것 같았고 "자기가 두 번째 여자야"라고 말하면, 첫사랑에 대해 집요하게 물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만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사귀어봤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아내는 의미 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난 자기가 첫사랑이야!"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아내의 머리 스타일은 긴 갈색 머리에 C컬 파마를 한 상태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미용실에서 돈 좀 쓴 머리였다. 단백질 팩을 받았는지 머리에 윤기가 좔좔 흐르고 머리 끝이 적당히 C자 모양으로 휘어진 머리였다. 내가 좋아하는 단발머리는 아니었지만, 아내의 착한 마음씨와 사슴처럼 큰 눈이 맘에 들었다. 그렇게 4개월의 짧은 연애 후 결혼을 했고 결혼 1주년에 첫째가 태어났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아내의 머리는 "갈색에 윤기 좌르르 흐르는 C컬 파마"에서 "푸석푸석하고 머리숱이 줄어 볼품없는 포니 테일(말총머리)"로 바뀌었다.


모유 수유 탓인지 아니면 출산 후유증 탓인지 아내의 머리카락은 하루를 멀다 하고 한 움큼씩 빠졌다. 저 상태로 머리가 계속 빠지다가는 골룸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탈모가 멈추었다. 잠시라도 엄마가 없으면 난리가 나는 딸아이 덕분에 아내는 미용실에 갈 수 없었다. 게다가 아내는 염색과 파마가 아이들에게 간접적으로 좋지 않을 것 같다며 미용실에 가지않고 포니테일 머리를 고수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포니테일 머리를 했던 아내가 올해 복직을 하면서 정말 오랜만에 미용실에 갔다. 그리고, 아내는 큰돈을 들여 예전처럼 윤기 좌르르 흐르는 C컬 파마머리로 돌아갔다.


미용실에서 관리를 받은 아내의 머리를 보니 처녀 시절 아내가 생각이 났다. 해맑게 웃으며 천진난만했던 그녀는 미술관에 가는 것을 좋아했고 뮤지컬을 좋아했다.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천진난만함 보다는 생활력 강한 "아줌마 아우라"가 머리 주변에 흐른다. 헤어 스타일은 처녀 때랑 똑같은데, 얼굴 주름도 많이 늘었다. 아내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거짓말이 나왔다.


"자기야, 머리 그렇게 하니깐 자기 하나도 안 늙었다! 처녀 때랑 똑같아!"


아내가 나를 쳐다보면서 "씩"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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