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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 손주부 Dec 08. 2020

나와 너무 다른 아내

남자와 여자가 처음 만나서 콩깍지 씌어 사리분별 제대로 파악 못하는 시간은 너무 짧다. 평생 콩깍지 씌면 좋을 텐데 조물주께서는 콩깍지의 시간을 제한하셨다. 콩깍지가 벗겨지는 순간 사람들은 서로의 실체를 보게 된다.


나 또한 그랬다. K와 나는 정말 비슷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결혼을 했다. 이혼 사유의 대부분이 "성격 차이"였기에, 비슷한 성격을 가진 사람과 결혼하면 백년해로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한 사이언스지에서 지능이 높은 사람일수록 비슷한 성격과 취향의 사람과 결혼한다고 하길래 난 지능이 높은 사람임을 만끽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결혼 전 K의 친구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제 친구 중에서 K가 가장 착한 사람이에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동병상련 같은 것을 느꼈다. 평소 착하다는 소리를 워낙 많이 들어서 착한 K와 살면 서로 이해하면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3개월 연애하고 100일 되는 날 63 빌딩 꼭대기 층에서 프러포즈를 했다. 그리고 한 달 뒤에 바로 결혼을 했다. 1월 말에 만나서 5월 말에 결혼했으니 연애와 프러포즈, 결혼 준비까지 모두 120일 정도 걸렸다. 이렇게 일사천리로 결혼한 것도 K는 나와 비슷한 사람이니 같이 살면 백년해로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 K와 다른 점이 많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K는 맛도 없고 쓴 커피를 물처럼 마셨다. 하루에도 열 잔씩은 마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펼치면 잠만 오는 책 읽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에세이를 좋아했다. 30년 내내 읽으면 돈이 되는 경제, 경영 관련 서적만 읽었던지라 에세이를 읽는 아내가 신기했다. 솔직히 내 인생 살기도 바쁜데 남의 인생 이야기를 읽는 그녀가 이해되지 않았다.


K는 주말 아침마다 땀 흘리면서 운동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주말마다 농구 경기를 하고 땀에 흠뻑 젖어 집으로 돌아오면, 돈까지 내면서 땀 흘린다고 나를 놀렸다. 전생에 열심히 땀 흘리던 돌쇠였기에 그때 습성이 지금 나온 거라면서 놀렸다. 자기는 마님이고 나는 돌쇠였는데, 전생에 못 이룬 사랑을 이루기 위해 지금 이렇게 부부의 연을 맺게 된 것이라며 시답잖은 농담을 한다.  


이렇게 좋아하는 것도 다르고 취향도 다른 우리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서로의 인생을 존중하고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였다. 무관심과는 다르다. 서로의 일상에 관심은 갖되 각자의 삶의 방식을 존중해주었다.




육아휴직을 내고 살림이 어느 정도 손에 익은 어느 날이었다. 아이들도 유치원에 갔고 오후 3시까지 자유시간이 생겼다. 평소 같으면 농구를 해야 하는데, 평일 오전 시간에 농구를 하는 직장인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은퇴하신 50대 후반의 아저씨들과 배드민턴을 치고 싶지는 않았다. 나름 늙었다고 나라에서 민방위 훈련도 안 시켜주는데, 50대 아저씨들 사이에서 막내 생활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난 K의 취향에 슬쩍 눈길을 주었다. K는 왜 쓴 물을 하루 열 잔이나 마시고 에세이를 좋아하는지 궁금했다.


K가 좋아하는 쓴 물(커피)을 제대로 느껴보기 위해 바리스타 학원을 다녔다. 로스팅도 해보고 핸드드립도 해보고 여러 나라의 원두를 시음해 보면서 쓴 물이 조금씩 좋아졌다. 한 모금 마셨을 때 머리가 맑아지면서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이때부터 카페인 중독이 시작된 것 같다. ㅠㅠ)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아내가 사놓은 에세이 들을 읽기 시작했다. 에쿠니 가오리, 손미나, 사노 요코 등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생각보다 재미있구나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 사는 것이 다 거기서 거기구나란 생각을 했다.  


전업주부의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의 나는 K보다 더 K처럼 살고 있다. 맛없다던 쓴 물을 아침마다 정성스럽게 내려 마신다. 다른 작가님들의 에세이를 읽는 것도 모자라 매일 본인의 에세이 마저 쓰고 있다.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브런치에서 에세이를 쓰면 통계수치가 느는 것도 좋지만, 댓글을 통해 독자님들과 소통하는 것도 좋다.


세월이 흐르니 K도 많이 변했다. 돈 내고 땀 흘리는 나보고 돌쇠라 놀리던 K는 요즘 필라테스에 빠졌다. 밤마다 요가 매트를 깔고 이상한 호흡 소리(섹시한 소리?)를 낸다. 소리를 듣고 놀라서 현장에 가보면 방귀 뀌는 듯한 자세로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한다(스쿼드인 거 같다). 그리고 운동 후에 땀에 젖은 운동복을 보면서 뿌듯한 얼굴로 샤워를 하러 간다. 어째 전생에 돌쇠는 아내였고 내가 마님이었던 것 같다. 결혼 생활 13년 만에 우리의 취향이 정확히 반대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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