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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주부 Jul 23. 2020

#41엄마 vs. 아내

나의 선택은?

엄마는 원래부터 기가 센 사람은 아니었다. 부잣집에서 사랑받던 막내딸이었다. 얼마나 사랑을 받았던지 이름마저 귀하디 "귀한" 자식이라고 "귀한"이라고 외할아버지가 지어주셨다. 그렇게 사랑받던 엄마는 가난한 아빠(개용남)를 만나면서부터 힘든 삶을 살게 되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장남과 결혼한 덕분에 아버지 월급의 대부분은 시동생들의 학비와 생활비로 쓰였고, 엄마는 늘 생활비가 부족해서 안 해본 일이 없으셨다.


내가 기어 다니던 시절, 낮잠을 자고 있으면 엄마는 주인집 자제의 과외선생님으로 일하셨다. 내가 조금 자라서는 집 근처 병원에서 허드렛일을 하셨고 그러한 시간이 쌓여 어머니는 "귀한"에서 "강한" 여자로 바뀌셨다. 집에 생활비가 모자라다 보니 항상 좋은 음식은 아버지와 나, 그리고 동생에게 양보하셨고, 엄마는 내가 먹다 남은 음식을 드시곤 하셨다.


식비 아껴 보겠다고 음식을 제대로 안 드시다 보니 결국 엄마는 큰 병을 얻었다. 자궁에 종양이 생겼고 내가 유치원 다니던 어느 날 엄마는 눈물을 흘리시면서 나를 꼭 안아주셨다. 그리고 당분간 엄마가 집에 없고 고모가 우리를 돌봐줄 거라 하셨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날 엄마는 수술을 받으러 병원에 입원하기 전 수술 중에 죽을 수도 있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내게 마지막일지 모르는 작별 인사를 하셨던 것이었다.


엄마는 그 수술 이후에도 여러 수술을 받으셨다. 그리고 힘든 시간이 올 때마다 어린 두 아들들을 보고 힘을 내셨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엄마는 장남인 나를 유난히 사랑하셨다. 세상 살기 싫은데 나 때문에 산다는 말씀도 종종 하셨고, 공부도 곧잘 하고 착한 아들이었던지라 내가 엄마의 유일한 희망이자 삶의 목표였다.


성인 되고 나서도 엄마는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셨고, 결혼하더라도 당신은 항상 같이 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나는 알겠다고 무성의하게 대답하곤 했다. 세월이 흘러 난 결혼을 했고, 아내를 설득하여 엄마의 소원대로 같이 살게 되었다. 그렇게 아내의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방 3개짜리 아파트에서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까지 총 5명이 살았다. 신혼 초반에는 사랑의 힘으로 어떻게든 견뎌보았는데, 좁은 집에서 여러 명이 살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보이지 않던 갈등이 점점 수면 위로 드러났다. 주로 집안일과 관련하여 아내와 어머니의 갈등이 생겼고 난 중간에서 중재하느라 매일매일 외줄 타기 하는 기분이었다.


어머니는 처음 몇 달간은 혼자서 묵묵히 살림을 하시다가, 3개월 후부터 내게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하셨다.


내가 며느리를 모시고 사는 것 같다. 집안 살림을 왜 나만 해야 하는 거니?


엄마는 며느리가 되어서 살림에 전혀 관여 안 한다고 나에게 항상 불만을 토로하셨다. 엄마가 살림 사는 것을 힘들어하고 아내는 직장생활로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내가 시간이 날 때마다 집안일을 거들었는데, 이게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임을 나중에 좀 더 나이를 먹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원래 사람은 누군가를 싫어하면 그 사람도 "싫음의 기운"을 눈치채고 똑같이 상대방을 싫어하게 된다. 엄마의 불만 섞인 감정을 접했던 아내는 시어머니가 본인을 싫어하고 있음을 느꼈고, 이로 인해 생긴 섭섭했던 감정을 나에게 풀었다. 나를 사랑하는 젊은 여자와 나를 사랑하는 늙은 여자, 두 명의 여자 사이에서 나는 점점 지쳐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건대입구역 근처에 있는 엔제리너스 커피숍에서 퇴근 후에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평소 카톡과는 달리 이모티콘 하나 없는 건조한 문체에서 난 뭔가 문제가 있음을 직감했고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아내는 나보다 먼저 카페에 와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아내는 말했다.


우리 이혼하자.


순간 머리가 멍했다. 그간 힘들었을 아내를 생각하니 너무 미안했고, 아무것도 모르고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도 미안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나는 바로 아내에게 답했다.


내가 잘못했어. 지금 당장 분가하자.


이 말을 하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 아내에 대한 미안함 등 여러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분가"라는 말을 꺼냈을 때 난 엄마의 자랑스러운 아들에서 대역 죄인으로 바뀌었다. 엄마에게는 미안했지만, 나만 보고 시집 온 아내를 더 이상 힘들게 할 순 없었다.


효자 아들과 결혼하면 아내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난 부모님을 통해 배웠기 때문에, 아내를 똑같은 상황으로 몰아넣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난 그날부로 불효자가 되었다.


분가를 하고 2년이 좀 안된 시점에 어머니께서는 말기암 진단을 받으셨다. 그리고 3개월 뒤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내가 아내를 선택한 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아 병이 나신 것만 같아 괴로웠다. 당시에는 정신적으로 굉장히 괴로웠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 당시 아내의 뱃속에 있던 아이가 벌써 초등학교 5학년이다. 키는 엄마보다 더 크고 먹성도 좋아서 하루에 5끼는 먹는 것 같다. 그 때 아내가 아닌 어머니를 선택하였다면, 어떠한 결과가 있었을까? 아마도 이혼에 대한 충격으로 인해 아내는 유산을 하거나 건강하지 못한 아이가 태어났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가장 친한 친구인 여동생을 만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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