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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주부 Jul 26. 2020

게으른 나, 밀키트와 사랑에 빠지다.

이거 아빠가 한 거 맞아?

남자로서 살림 살면서 느낀 건데, 밀키트는 세탁기 발명 이후로 살림 사는 분들의 노고를 덜어준 최고의 발명품인 것 같다. 맨 처음부터 밀키트와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매일 마트에서 신선한 야채와 고기 등을 사 와서 야채를 다듬고 매일매일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정성껏 요리했다. 그런데, A부터 Z까지 내가 직접 하다 보니 하루 종일 세끼만 차리고 치우다 보면 잘 시간이 되었다. 요리하는 것을 내가 정말 사랑했으면 요리를 계속했겠지만 요리하는 것을 그리 즐기지 못하다 보니 얼마 안 가서 지치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배민 라이더스를 알게 되었다. 평소 짜장면, 피자, 치킨과 같이 전형적인 배달 음식은 좋아하지 않는데, 배민 라이더스는 배달을 하지 않는 맛집의 음식을 대신 배달해주는 서비스였다. 완전 신세계였다. 장보는 시간, 야채 다듬는 시간, 설거지하는 시간, 이 모든 시간이 단 5분으로 줄었다. 아이들의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매일매일 요리 생초보 아빠의 이상한 정체불명의 요리만 먹다가 전문 셰프가 만든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니 너무나도 신났던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식당에서 배달해 오는 음식이라고 하더라도 식재료의 퀄리티는 내가 직접 사서 만든 것에는 못 미쳤다. 뿐만 아니라 대중적 입맛을 위해 설탕과 조미료로 범벅된 음식을 거의 매일 먹다 보니 아이들도 배달음식에 점점 지쳐갔고 결정적으로 식성 좋은 첫째의 발육상태가 갑자기 좋아지더니 2차 성징까지 보여서 성조숙증이라도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에 더 이상 배달 음식을 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찾은 것이 밀키트였다. 내가 직접 한 음식보다는 좀 못하지만, 여전히 내가 직접 만드는 척은 할 수 있었고, 배달 음식보다는 조금 낫지 않을까란 생각에 선택한 것이 밀키트였다. 채소들도 내가 딱 필요한 양만큼만 소분되어 있어서 재료 낭비도 적었다. 예컨대 나물 반찬이 먹고 싶어 직접 시금치라도 무치면, 양이 많아서 일주일 내내 시금치를 먹어야 했다.


솔직히 재료 낭비 방지는 핑계고 요리가 귀찮아서 밀 키트와 사랑에 빠졌는데,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부터 내가 자주 해 먹는 밀키트가 종종 매진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장을 미리미리 보면 밀키트 매진 상황을 피할 수 있을 텐데, 낮에는 맨날 영화 보고 책 보고 띵까띵까 놀다가 밤에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 장을 보다 보니 대부분의 제품이 매진이었다.


이런 나의 애로 사항을 동네 지인 분께 말씀드렸더니, 우리 동네에서 블로그를 통해서 반찬가게를 하시는 분을 소개해주셨다. 나는 그분께 너무 감사하다며, 감사인사를 연신 드리고 집으로 달려갔다. 컴퓨터를 켜고 알려주신 반찬가게 블로그 주소에 접속해 카페 가입 신청 버튼을 눌렀다. 누르자마자 돌아오는 에러 메시지,

 해당 블로그는 여성분들만 가입 가능합니다.

예상치 못한 반찬가게의 남성차별에 난 좌절했다. 요즘처럼 살림 사는 남자가 많은 시국에 남성 차별이라뇨!!!


남성 차별을 겪고 난 후 난 치사해서 남성 전용 반찬 가게를 나중에 차리고 말겠다는 결심을 하고, 밀키트로 다시 돌아갔다. 아무튼, 밀키트를 통해 처음 만든 요리는 밀푀유 나베였다. 배추와 고기를 일정한 크기로 잘라서 냄비에 꽃 모양으로 차곡차곡 넣고 육수를 넣어 끓여내기만 하면 되는 요리였다. 아이들은 아빠가 한 요리 치고 너무 예쁘다며, 둘째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이거 아빠가 한 거 맞아?

난 거짓말 못하는 사람이어서, 밀키트 사용했음을 고백했고, 둘째는 역시 그러면 그렇지 하고 혀를 찬다. 밀키트 요리를 하면 밀키트 안에 요리 설명서가 들어있다. 여러 번 반복해서 따라 하다 보면 해당 요리의 레시피가 내 머리에 저장이 되어서 나중에 내가 직접 재료를 사서 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직접 장보고 재료 다듬는 게 귀찮아서 아직도 실행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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