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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주부 Aug 13. 2020

퇴사 후 삶 : 개 팔자가 내 팔자

퇴직금으로 연명하기

사표 내고 회사 안 가니 삶이 참 평온하다.

보고서 빨리 만들라고 닦달하는 사람 없다.

직장 상사 아재 개그 안 들어도 상관없다.  

가기 싫은 회사 회식 오라 하는 사람 없다.

피곤하면 쉬면 되고 잠이 오면 자면 된다.  

놀고 싶으면 놀아도 되고 일하고 싶으면 그래도 논다.   

써놓고 보니 내 팔자가 상팔자구나!  

드디어, 개와 동등한 위치가 되었다.

지금까지 내 인생은 개만도 못한 인생이었구먼.


그렇다고 해서 주부로써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첫 번째 고민은 바로 '오늘 뭐 해 먹지?'

정말 미스터리다. 냉장고가 식재료로 가득한데, 뭘 해 먹어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다.

아내 옷장에 옷이 한가득인데 입을 옷이 없다고 불평하는 게 이해된다.

학창 시절 시험지 받아 들면 머릿속이 하얘진 것처럼 뭘 먹어야 할지 생각하면 머릿속이 하얘진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요리를 싫어하셨다. 싫어하는 요리는 주말에 한 번만 하셨다.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은 일주일 동안 같은 음식을 먹었고,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처갓집은 우리 집과는 180도 반대였다.

매 끼니 항상 다른 반찬을 먹었고, 항상 새로 한 밥을 해 먹었다.

(정말 장모님이 존경스럽다.)

신혼초 아내는 장모님의 딸답게 끼니마다 항상 다른 음식을 준비해 주었다.

우리 두 따님도 끼니마다 항상 다른 음식을 먹는 게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아빠가 연속으로 같은 음식을 내어주면 반발한다.

아빠 이거 오늘 아침에 먹은 거잖아, 나 안 먹을래


두 번째 고민은 바로 집안 청소이다.

정말 미스터리다. 분명 아침에 물걸레질했는데 저녁만 되면 수많은 머리카락들이 떨어져 있다.

우리 집엔 긴 생머리 여자가 세명이다.

그렇게 머리가 빠지는데 대머리가 안 되는 게 신기하다.


아내가 요즘 단발병에 걸렸다.

10년 넘게 여자랑 살아보니 여자들이 주기적으로 걸리는 병인 것 같다.

"자기야, 이 단발머리 어때?"

"어, 완전 잘 어울리는 거 같아, 미용실 어서 다녀와"

(솔직히 잘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는 모르겠고 머리가 짧으면 바닥이 덜 더러워질 것 같다)

"아니다, 생각해보니깐 머리 자르고 나면 왠지 후회할 것 같아. 50살 되기 전에는 그냥 긴 머리 할래"

(아, 아깝다. 거의 다 넘어왔는데,,,,)


세 번째 고민은 바로 거짓말이다.

아내의 반대로 아직 처갓집에 사표 낸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아이들도 아직 아빠가 백수인 것을 모른다.

"아빠, 요즘에 왜 회사 안 가?"

(화들짝 놀라며)"아, 그게 말이지. 허리가 아파서 병가 중이야."

"근데, 병가가 뭐야?"

"응 그건 말이지,............."

실제로 퇴사 직전에 허리가 아파서 병가를 냈다.


얼마 전에 방학이라서 처갓집에 놀러 갔다.

"우리 사위, 요즘 일하느라 고생이 많지?"

(화들짝 놀라며)"아, 네 맞습니다. 좀 힘들어요." (집안일도 어찌 되었건 힘드니깐 거짓말한 건 아니라고 자위한다.)


뭐, 아직까진 퇴직금으로 살만하다.

연금 수령 시점까지 24년 남았고 그때까지 퇴직금으로 연명하려면 한달에 27만 7천원씩 쓰면된다.

아, 글 쓰고 보니 밤에 알바라도 해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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