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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주부 Aug 09. 2020

퇴사하고 실수로 인간관계 정리하기

퇴사 직전에 내가 담당했던 업무는 미국, 중국, 러시아 법인 지원이었다. 법인이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시장분석도 하고 신제품 론칭도 돕는 것이 나의 주된 임무였다. 매일 아침 일상은 3개 법인으로부터 온 메일을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손 과장님 러시아 시장 현황 자료입니다. 확인 및 보고 부탁드립니다" "손 과장님 미국 시장 판매 현황 자료 공유해 드립니다. 실장님께 보고 부탁드립니다." "손 과장님 중국 지사 마케팅비 지출을 이번 주까지 완료 부탁드립니다."............ 하루에 수십 통씩 쏟아지는 업무 요청에 미칠 지경이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같은 부서 선배가 폭탄선언을 했다. "손 과장, 나 너무 힘들어서 그냥 지점 갈래. 앞으로 내 업무까지 맡아줘"

아~~~~~~~~~~~~~~~~~~악!!!!!!!!!!!!!!!!!!!!!!!!!!!!!!!!!!!!!!!!!!!!!!!!!!!!!




퇴사한 지 벌써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메일함을 아무리 다시 열어보아도 나를 찾는 메일은 없다.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매일 도와달라고 애타게 나를 찾던 수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다 사라졌다. 뭔가 좀 섭섭하다. 내가 없어도 회사는 잘 굴러간다. 그렇다고 날 그렇게 힘들게 했던 회사를 저주하지도 못하겠다. 특별한 이유는 아니고, 아직 회사 주식을 못 팔았다. 회사가 망하면 나도 망하는 거다.


못생긴 남자가 예쁜 여자를 꼬실 때 왜 매일매일 연락하는지 이젠 알 것 같다. 매일 귀찮게 하다가 갑자기 연락 끊어버리면 뭔가 좀 섭섭하다. 요즘 내 맘이 그렇다. 가끔씩 새 메일 도착 알림을 받으면 괜스레 기뻐서 열어본다. "XX카드 지난달 결제내역입니다" 아, 이제는 카드사 말고는 내게 메일 보내는 사람이 없다. 


회사 다닐 때 속해있던 회사 관련 단톡 방이 정말 많았다. 부서 단톡 방, 동기 단톡 방, 동아리 단톡 방 등등..... 단톡 방 내에서 아직도 활발하게 대화가 오가는데 집에서 살림 사는 퇴사자가 대화에 끼기도 애매하다. 그렇다고 중간에 혼자 단톡 방을 몰래 나갈 용기도 나지 않는다. 몰래 단톡 방 나가는 법 다음에서 검색해본다. 이제 실장님, 본부장님도 동네 형, 동네 아저씨에 불과한데 이리 눈치 보는 것을 보면 심적으로는 아직까지 퇴사를 하지 못한 것이리라.


얼마 전부터 사과폰 7이 이상하다. 하긴 사과폰 12가 돌아다니는 이 시점에서 5년이나 된 폰이 아직도 멀쩡한 게 이상한 거지. 100% 충전을 해도 브런치 통계 몇 번 확인하고 너튜브 좀 보고 나면 오전부터 50% 밑으로 떨어져서 밥 달라고 울어댄다. 퇴직금으로 연명하고 있는 중인데 나의 피 같은 퇴직금을 순순히 사과폰 회사에 수술비로 넘겨줄 순 없다.


걱정마라 아가야, 아빠가 직접 수술해줄게

 

이럴 때만 발동하는 나의 이상한 실행력은 교체용 배터리를 바로 구매케 했고 택배가 도착하자마자 마취를 하고 (전원을 끄고) 사과폰 배를 갈랐다. 과거 사과폰 구버전에서 수술 경험이 있기에 용감하게 배를 갈랐다. 하지만, 배를 가른 것을 후회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나쁜 팀 쿡 아저씨(사과폰 사장)가 배터리 교체를 굉장히 어렵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정식 센터에 가서 비싼 돈 내고 수리받으란 소리였다. 하지만, 이에 굴복할 내가 아니다. 1시간 동안 너튜브 수술 영상 반복 시청 후 3시간에 걸친 사과폰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교체 후 전원을 키는 순간 나를 맞이하던 사과 로고가 어찌나 반갑던지!


기쁨도 잠시, 사과폰은 몇 분 뒤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 사과폰이 수술 후유증으로 계속해서 정신이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했다. 5만 원 아껴보겠다고 또 내가 생쇼를 했구나란 생각에 가슴이 아려왔다. 얼마 전 아내의 사과폰 고칠 때도 그렇게 고생했으면서 또 직접 수술한 것을 보니 역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최후의 방법으로 사과폰에 저장된 모든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바로 사과폰을 포맷했다.




사과폰 포맷 덕분에 본의 아니게 인간관계를 정리하게 되었다. 나의 무의식이 인간관계 정리를 원해서 사과폰 포맷을 지시했을지도 모른다. 미필적 고의라고나 할까. 덕분에 1년에 한 번 연락할까 말까 한 수백 명의 연락처가 봄날 햇살에 녹아 없어지는 눈처럼 다 녹아 사라졌다. 연락처 잃어버리면 안달복달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편한 걸까?


지금 내 카톡 연락처에는 손가락, 발가락 수 합친 거 곱하기 1.5 정도의 사람만 저장되어 있다. 하루 종일 울리던 카톡이 이젠 거의 안 온다. 퇴사 후 업무 물어보던 전화도 뚝 끊겼다. 카톡 하던 시간을 줄이고, 인간관계 미니멀리스트가 되고 나니 중요한 사람들에게 집중할 시간이 많이 생겼다. 이렇게 난 비자발적으로 인간관계를 정리하게 되었다.  


정리의 달인이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인 '곤도 마리에'가 그의 저서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에서 이렇게 말했다.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인간관계도 똑같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 만났을 때 설레지 않고 나의 에너지만 좀먹는 자들과는 더 이상 연락하고 지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구독자 모집에 있어서 만큼은 '미니멀리스트'가 아닌 '맥시멀 리스트'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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