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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 손주부 Aug 14. 2020

동굴에 들어간 아내

아내는 가끔씩 동굴에 들어간다. 항상 밝게 웃으며 발랄한 모습을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웃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휴대폰만 쳐다본다. 내가 대화를 시도해 보아도 눈을 바라보지 않고 휴대폰만 바라본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건가' 오늘 있었던 일들을 찬찬히 돌아본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무슨 잘못을 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게 있으면 말해주면 좋을 텐데 아내는 수수께끼라도 낸 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온갖 인상을 쓰면서 암울한 에너지를 계속 뿜어댄다. '남자라는 놈이 돈도 안 벌고 집에서 살림 살며 너무 행복하게 잘 지내니 꼴 뵈기 싫은 건가? 아니면 직장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아내는 보통 여자들과는 좀 다르다. 돌아가신 엄마를 포함하여, 결혼 전 내가 봐온 여자는 스트레스받는 일이 생기면 무조건 수다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발산시켜야 했다. 그런데 아내는 다르다. 잘 밀봉된 오크통에서 숙성되어가는 위스키처럼 불만 가득한 생각들을 한 아름 가져와 자신의 마음속에서 숙성시킨다. 나는 아내로부터 불똥이라도 튀길까 눈치를 보며 평소보다 더 열심히 집안일을 한다. 설거지를 마치고 괜스레 가스레인지도 닦고 얼마 전에 닦은 후드도 다시 닦아본다.


하긴 나도 회사 다닐 때 업무와 대인관계로 괴로워하던 때가 있었고 아내와 회사 일은 잘 공유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나의 괴로움을 아내와 나누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만 믿고 시집온 사람이기에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남자로서의 알량한 자존심이었으리라.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힘든 일이 있으면 내 가슴속에 꼭꼭 숨겨놓았다. 괴로운 날이면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 와 한숨을 푹푹 쉬면서 술만 들이켰다. 그런 날 지켜보던 아내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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