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가끔씩 동굴에 들어간다. 항상 밝게 웃으며 발랄한 모습을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웃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휴대폰만 쳐다본다. 내가 대화를 시도해 보아도 눈을 바라보지 않고 휴대폰만 바라본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건가' 오늘 있었던 일들을 찬찬히 돌아본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무슨 잘못을 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게 있으면 말해주면 좋을 텐데 아내는 수수께끼라도 낸 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온갖 인상을 쓰면서 암울한 에너지를 계속 뿜어댄다. '남자라는 놈이 돈도 안 벌고 집에서 살림 살며 너무 행복하게 잘 지내니 꼴 뵈기 싫은 건가? 아니면 직장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아내는 보통 여자들과는 좀 다르다. 돌아가신 엄마를 포함하여, 결혼 전 내가 봐온 여자는 스트레스받는 일이 생기면 무조건 수다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발산시켜야 했다. 그런데 아내는 다르다. 잘 밀봉된 오크통에서 숙성되어가는 위스키처럼 불만 가득한 생각들을 한 아름 가져와 자신의 마음속에서 숙성시킨다. 나는 아내로부터 불똥이라도 튀길까 눈치를 보며 평소보다 더 열심히 집안일을 한다. 설거지를 마치고 괜스레 가스레인지도 닦고 얼마 전에 닦은 후드도 다시 닦아본다.
하긴 나도 회사 다닐 때 업무와 대인관계로 괴로워하던 때가 있었고 아내와 회사 일은 잘 공유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나의 괴로움을 아내와 나누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만 믿고 시집온 사람이기에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남자로서의 알량한 자존심이었으리라.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힘든 일이 있으면 내 가슴속에 꼭꼭 숨겨놓았다. 괴로운 날이면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 와 한숨을 푹푹 쉬면서 술만 들이켰다. 그런 날 지켜보던 아내도 얼마나 힘들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