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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 손주부 Sep 13. 2020

#32 아빠, 유학가게 돈 줘!     

파이어족 되기

1998년 겨울, 부모님의 유일한 재산인 집을 팔아서 미국 유학을 가게 되었다. 뭔가 큰 뜻이 있어 유학을 간 것은 아니었다. 1996년도에 본 수능 시험을 제대로 말아먹어서 도피유학을 갔다. 시험을 망친 날, 집안의 희망에서 역적이 되었다. 나를 자랑스러워하시던 부모님은 부끄러워하셨고, 친구나 친지분들이 수능 잘 봤냐고 물어보면 얼버무리셨다. 동네 빅마우스 아주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자기, 아들내미 시험 잘 봤어?" "응, 몰라 지가 알아서 하는 거지 뭐" 전화가 끝나고 엄마는 내게 짜증을 냈다. "아, 이제 쪽팔려서 사람들 어떻게 봐?" 당시 엄마의 반응에 조금 섭섭했지만,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재수를 하고 싶지는 않아 미국 유학을 알아보았다. 다행히 한국 학비 정도 되는 학교를 찾을 수 있었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저, 유학 가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세요!" 부모님께서는 흔쾌히 승낙해 주셨다. 24년이 지난 지금 딸아이가 "아빠, 나 유학 갈 거니깐 빨리 집 팔아서 유학비 줘!" 이렇게 말하면, 선뜻 집을 팔 수 있을까? 아마도 중국으로 유학 가려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원효대사의 해골물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에서 공부해도 충분하다고 말할 것 같다.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네가 마음먹기에 달려있단다 딸아! 한국에서 공부해도 충분해" "


해골물 마시는 원효대사 Sources : https://m.blog.naver.com/yingbbang/221807399718

부모님의 은퇴 자금을 가지고 유학을 갔기에 성공에 대한 부담감이 컸다.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매일 밤늦게 까지 공부를 했다. 생활비 아낀다고 한 봉지에 100원 정도 하는 라면을 주식으로 먹었다. 친구들과 불가피하게 외식이라도 하는 날이면, 햄버거 패티 한 장에 피클 두 개 올려져 있는 99센트짜리 버거를 시켜 먹었다. 한식이 정말 먹고 싶을 때면 주말에 한인 교회로 갔다. 열심히 찬송가를 부르고 인간 수면제 목사님의 1시간가량의 설교를 견뎌내면 공짜 점심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식사 후에는 항상 음식이 남았는데, 남은 음식을 얻기 위해 설거지 등을 도와드리며 사모님(목사님 부인)의 환심을 샀다. 지금은 밥 준다고 설거지하라고 하면 콧방귀 뀔 것 같다. 하지만, 그때는 일주일에 한 번 한국 음식 먹는 것이 삶의 낙이였다.

유학 시절 즐겨 먹던 Top Ramen, 물론 맛은 탑이 아닌 게 함정. Sources : nissinfoods.com

지질하게 살았던 나와는 달리 LA에서 전학 온 동갑내기 친구 A는 돈을 물쓰듯하며 풍족하게 살았다. 10만 불짜리 뚜껑 열리는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면서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오프 캠퍼스(Off Campus)에 방 4개 있는 집에서 여자 친구와 함께 살았다. 10만 원짜리 자전거를 몰고 다니면서 교회에서 밥을 얻어먹고 룸메이트 4명 있는 집에서 바퀴벌레와 함께 사는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A의 부모님은 매달 용돈 보내기 귀찮다면서 집 근처에 햄버거 가게를 차려주셨고, A는 거기서 나오는 수익금을 용돈으로 썼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렇게 펑펑 써도 A의 재산은 계속 불어났다. 캘리포니아에서 구매한 집의 가격은 졸업할 때 즈음 큰 폭으로 올라 시세 차익이 5억 원 정도 되었다. 4년간의 학비와 생활비를 커버하고도 남는 금액이었다. 햄버거 가게는 장사가 잘되어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다 사도 돈이 남아돌았다. 나는 학창 시절 내내 그렇게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사고 싶은 것도 참으면서 열심히 살았는데 한국에 돌아갈 때 즈음엔 부모님 은퇴 자금만 축내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친구는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서도 돈을 벌어서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때 인생 참 거지 같다고 한탄하면서 세상을 저주하며 살았다면 지금 인생도 거지 같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친구를 보면서 난 큰 교훈을 얻었다. '나도 친구처럼 스스로 부가 증가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겠다.'

그 당시 A가 탔던 B사의 컨버터블 자동차 Sources : https://bringatrailer.com/listing/1999-bmw-m3-convertible-6/


한국에 돌아와 운 좋게도 담배랑 홍삼파는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었다. 면접을 거지같이 봐서 떨어진 줄 알았는데, 당시 희귀했던 유학생 프리미엄으로 간신히 붙었던 것 같다. 당시 면접관이셨던, 부사장님 왈 "우리 회사 들어오려면 앞으로 담배 피워야 하는데 할 수 있겠어?" "뽑아만 주신다면 앞으로 열심히 피겠습니다."라고 큰소리로 대답한 것이 주효했나보다. 어찌 되었건 첫 월급을 받고 사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스스로 부가 증가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또다시 지질한 생활을 시작했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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