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rian 손주부 Sep 20. 2020

#34 엄마의 마지막 앨범

돌아가시기 전 만드신 앨범

며칠 전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셨다. 꿈의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지만, 혼자 계시는 아버지가 걱정되어 무작정 차를 몰고 아버지 댁으로 갔다. 토요일 오후 교통 체증을 FM 라디오로 견뎌내며 반나절 가량 운전한 끝에 겨우 도착했다. 마침 동생도 집에 와 있었다. 오래간만에 하늘나라에 있는 엄마를 제외하고 원가족이 모두 모였다. 결혼하고 나니 동생, 아버지 이렇게 셋이 만나기가 쉽지 않다. 동생 같은 경우 아이들이 아직 어려 부모 손이 많이 가기에 혼자만 집을 빠져나오기 쉽지 않았는데, 제수씨가 흔쾌히 허락해준 모양이다. 코로나 때문에 저녁은 외식이 아닌 지역 맛집에서 포장해온 냉면을 먹고 나서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고 잠자리에 들었다.


잠자기 전 나는 잠이 잘 오지 않아 읽을 책을 찾아 책장을 뒤적거리다가 처음 보는 앨범을 발견하고 꺼내 보았다. 부모님이 결혼하시고 엄마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30년간의 기록이 그 앨범에 담겨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한 권의 앨범으로 정리하신 듯했다. 결혼식장에서 다소 굳어있는 얼굴의 30살 아버지와 29살의 엄마 사진을 접하니 기분이 묘했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엄마, 아빠 얼굴에 주름은 하나 씩 늘어갔고, 동생과 나는 점점 커갔다. 그리고 1990년 9월이라고 쓰여있는 페이지에서 멈췄다.


'1990년이면 아버지가 지금 내 나이일 때잖아?'


사진 속의 아버지는 그 당시 유행하던 잠자리 안경에 8:2 가르마를 하시고 엄마와 나란히 서서 포즈를 취하고 계셨다. 기분이 묘했다. 아버지는 당시 무슨 생각을 하고 사셨을까? 무슨 걱정이 있었고 무엇을 삶의 목표로 삼아 살고 있었을까?


나와 묘하게 비슷한 아버지 얼굴 속에서 내 얼굴이 겹쳐 보였고, 아버지의 인생에서 내 인생이 오버랩되어 보였다. 장남으로 태어나 회사에서 해외영업을 했던 아버지와 나. 둘 다 역마살이 가득해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했다. 둘 다 한 살 어린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했다. 아내와 엄마는 둘 다 선생님이셨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두 분 모두 처녀시절 수녀원에 가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셨는데, 집안의 성화에 못이겨 마지막으로 본 선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까지 했다. 아버지 또한 회사 정년을 다 채우지 않으시고 중간에 회사를 나오셨다. 하나하나 따져보니 소름 끼치도록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아오고 있었다.


2010년 3월, 앞으로 6개월 남았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엄마는 이 앨범을 만드신 것 같았다. 사진을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그간 살아오면서 행복했던 순간들을 다시 떠올리셨을까? 아니면 아직 못 이룬 꿈들을 떠올리셨을까?


엄마가 처음으로 엄마가 되던 순간,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해외여행을 갔던 순간, 자랑스런 아들의 졸업식에 참석했던 순간들을 사진을 통해 다시 접하며, 짧지도 길지도 않았던 인생, 참 잘 살아왔구나란 생각을 하셨을 것 같다. 비록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만, 실낱 같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병마와 싸워 이겨내 또 다른 추억을 만들고 싶어 하셨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셨을 엄마를 생각하니 눈시울이 갑자기 뜨거워 진다. 말이 살찌고 말띠인 나도 살찌는 가을 초입 어느 날 돌아가신 엄마가 많이 그립다.


집에 돌아온 후 아내, 딸들과 함께 옛 추억을 떠올리기 위해 6년 전 찍은 사진을 휴대폰으로 함께 봤다. “아무리 봐도 아빠는 젊었을 때 너무 늙어 보이고 뚱뚱하고 못생긴 것 같아.” ‘아, 역시 아이들은 거짓말을 못한다’ 아내가 나를 보면서 깔깔댄다.  “엄마는 어릴 때 너무 귀엽고 어려 보인다. 중학생 언니 같아. 그런데 지금은 아줌마 학부모같아” 내가 아내를 보며 깔깔거린다. 칭찬 같지만 곱씹어 보면 디스 같은 둘째 딸아이의 팩트 폭행을 보며 30년 뒤 지금 우리 가족의 모습은 어떻게 기억될지 생각해 본다.

작가의 이전글 #33 저금리 시대 자산 투자의 중요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