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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 손주부 Oct 13. 2020

#41 아저씨가 살림 잘 사는 법

주인님께 예쁨 받는 법

집에서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다가 갑자기 예전에 법륜 스님이 하신 "주인과 머슴"이라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법륜 스님이 어린 시절에 머슴으로 일한 적이 있었는데, 하루는 주인이 재래식 화장실에 가득 찬 인분(사람의 똥)을 치우라고 시켰다. 그래서 법륜스님은 또 다른 머슴과 함께 인분을 퍼서 옮겼다. 법륜 스님은 두 양동이에 인분을 꽉꽉 채워서 옮기고 있는데 반해 다른 머슴은 반 정도만 채워놓고 엉덩이를 살랑 거리며 왔다 갔다 했다. 이에 법륜 스님은 열심히 일하지 않는 머슴을 향해 한마디 말했다.


"주인이 일을 시켰으면 자기 일처럼 온 힘을 다 해야지 어찌하여 너는 양동이의 반만 채워놓고 설렁설렁 일하느냐?"  그러자 머슴이 말했다. "아이고, 이렇게 미련한 사람을 봤나. 주인은 우리가 그늘에서 쉬는 꼴을 절대 못 본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이렇게 반만 채워서 쉬지 않고 쉬엄쉬엄 일하는 것이 너처럼 30분 일하고 10분 쉬는 것보다 나을 걸? 게다가 머슴살이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몸인데, 너처럼 일하다가는 몸이 망가져 오랫동안 일할 수가 없다네."


생각해보니 신입사원 때 나는 법륜스님처럼 일했다. 근무시간 8시간 동안 화장실 가는 것 이 외에는 자리를 뜨지 않고 열심히 일 했다. 그리고 정해진 퇴근 시간이 되면 지시하신 일을 보고 드리고 인사를 한 후 퇴근했다.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근무 시간 중에 여자 선배들은 인터넷으로 쇼핑을 했고, 남자 선배들은 주식을 했다. 그러다 저녁 시간이 되면 법인 카드로 저녁식사를 하고 회사로 돌아와 7시부터 업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웃긴 것은 쉬엄쉬엄 하면서 밤 11시까지 일하는 사람이 윗분들에게 더 사랑받는다는 사실이었다.


개념 없는 신입사원의 칼퇴근이 한 달 정도 지속되니 주변에서 이상한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역시, 미국에서 공부하고 와서 그런지 개인주의자에 완전 이기적인 거 있지! 어떻게 6시 반에 퇴근할 수가 있지?" 그 소문을 듣는 순간 나는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직감했고 그 날부터 주유야근 (낮에 놀고 밤에 일하는)에 동참했다.


주유야근 덕분에 우리나라는 OECD 국가들 중에서 멕시코 다음으로 근무시간은 가장 길고 노동 생산성은 가장 낮은 국가가 되었다 (2017, Statista). 지금이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되어 생산성이 조금씩 개선되어 가고 있지만, 52시간 근무제가 적용되지 않는 중소기업(근로자 300인 미만)은 딴 나라 이야기다.  




살림을 살게 되면서 나의 고용주는 회사에서 마눌님으로 바뀌었다.


살림 초반에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아침을 차렸고, 마트에서 직접 장 봐와서 재료를 손질하고 요리했다. 식사 후에는 설거지를 했고 식탁을 닦았으며, 청소기를 돌렸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아내가 일터로 가고 난 후 너무 열심히 살림을 살아서였을까, 어느 날 설거지도 못하고 피곤해서 그냥 쓰러져 잔 적이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니 어느덧 고용주이신 마눌님이 집에 도착할 시간이 10분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고, 집을 잽싸게 치우던 중에 현관문 비번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삑삑삑 삑삑 삑삑, 띠리링"


낮잠 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자느라 눌린 머리를 급히 복구시키고 입 주변 침을 대충 닦은 후 현관으로 달려갔다.


"자기야! 오늘도 고생 많았어!"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른다.)

 

마눌님은 아무 말 없이 집안을 한번 쫙 둘러보더니 '집안 꼴이 이게 뭐냐'란 눈빛을 보낸다.


그 일을 겪고 난 이후로 나는 법륜 스님 일화의 얍삽한 머슴처럼 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그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아내가 출근한 후 나는 절대 열심히 살림 살지 않는다. 우아하게 커피 한잔 내려 마시면서 아이들 온라인 수업을 옆에서 도와준다. 아이들 등교날에는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책을 읽는다. 졸리면 침대에 누워서 자다가 배고프면 일어난다. 점심은 아침에 먹다 남은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넣어 대충 때운다. 이렇게 여유롭고 우아하게(폐인처럼) 지내다가, 마눌님 퇴근 2시간 전부터는 주부 9단으로 바뀐다. 빛의 속도로 아침, 점심 먹은 그릇들을 설거지하고 식탁을 치운 후 청소기를 돌린다. 어젯밤에 한 빨래를 개고 서랍장에 넣는다. 신발을 정리하고 숨이 가빠질 즈음 배달 요청한 밀키트가 집에 도착한다. 앞치마를 두르고 맛있는 요리를 하면서 주방 환풍구로 맛있는 냄새를 마구 배출할 즈음이 되면 아내가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른다.


"자기야, 나왔어! 밖에서 완전 맛있는 냄새가 나던데 오늘 저녁 뭐야?"


나는 씨익 웃음을 지으면서 이렇게 속으로 말한다.


'오늘도 고용주 속이기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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