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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 손주부 Oct 27. 2020

#42 당신의 20대 시절을 표현하는 물건

강남역 타워레코드에서 만난 음악  

1990년대 초반, 교실에서 자율학습을 하던 어느 날 과학 선생님이 내 얼굴을 유심히 보시더니 말씀하셨다.


야, 너 얼굴 보니깐, 진짜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먹었다. 정우성처럼 잘 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나름 얼굴에 만족하며 살아왔는데 역시, 나만의 생각이었던 것인가? 젊은 여자 선생님이, 그것도 짝사랑하는 선생님의 충격 발언을 듣고 좌절했다. 그리고 선생님 말씀대로 그 이후 진짜 열심히 공부를 했다.


지금 현재 기준으로 보면 당시 선생님의 발언은 심각한 언어폭력에 해당되는 일인데, 체벌이 당연시되던 그때는 이 정도 잔소리는 애교였다. 당시 선생님들의 대표적인 잔소리만 보아도 당시 사회분위기가 어떠했는지 말해준다. 


"공부 열심히 하면, 아내의 얼굴이 바뀌고, 남편의 직업이 바뀐다."

"대학 가서 미팅할래? 공장 가서 미싱 할래?"


여자 선생님의 충격요법 덕분이었을까, 반에서 중간 즈음하던 성적은 조금씩 올랐고 중학교 졸업 즈음 치러진 연합고사에서는 전교 3등까지 되었다.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담임 선생님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고, 이대로 쭉 공부하면 술술 풀리는 인생이었다.


하지만, 술술 풀리면 인생이라는 게 재미없다는 사실을 하느님께서 알려주시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1996년 11월에 있었던 수능시험을 완전히 망치게 된다. 수능 성적표를 받아보던 날 세상이 노랗게 보였다.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나의 미래가 영화처럼 눈앞에 재생되었다. S대학(Sam Ryu대학) 졸업 후 취업이 되지 않아서 편의점 알바로 뼈 빠지게 일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편의점에서 만난 여자 친구는 결혼 적령기가 되자 미래가 불투명한 나를 버리고 돈 많은 정규직 남자에게 떠난다. 인생을 비관하고 소주를 여자 친구 삼아 살다 보니 사십을 넘겨서도 평생 고시원 같은 작은 방에서 혼자 산다.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원래 계획 대로라면 좋은 대학 합격해서 예쁜 여자 친구를 사귀고, 롯데월드 같은 놀이공원에 가서 데이트를 하는 것이었는데, 내 점수로 갈 수 있는 서울권 대학은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유난히도 춥던 그 날 눈물이 핑 돌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걱정이 되었다. 당장 부모님께 성적표를 보여드릴 자신도 없었다. 집에 최대한 늦게 가기 위해 버스를 타지 않고 힘없이 터벅터벅 버스 세정거장 거리를 걸어왔는데 벌써 집 앞이다. 나의 인기척을 듣고 엄마가 문을 활짝 연다.


"아들, 성적표 받아왔지! 빨리 좀 보자!" (기쁘고 밝은 목소리로)


평소 모의고사 성적이 좋았던지라 시험을 망쳐도 서울 시내 대학은 갈거라 여겼던 엄마는 빨리 내 성적표를 달라고 재촉하셨다. 그런데, 성적표를 보시면서 밝았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셨다.


"아, 진짜 못살아 내가, 이 성적 가지고 어떻게 할 거야? 우리 무조건 재수하자 알았지? 엄마가 재수학원 알아볼게"

 

엄마는 계속 잔소리하셨다.


"아, 이제 쪽팔려서 동네 아줌마들 어떻게 만나, 내가 못살아 진짜!"


엄마의 잔소리 탓이었는지 삐딱하게 나가고 싶었던지 엄마에게 소리쳤다.


"나, 절대로 재수는 하지 않을 거니, 그렇게 아세요!"


그렇게 말하고 방문을 세게 닫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해온 공부를 또 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숨이 콱콱 막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으로부터 다 떠나고 싶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거야!'


부모님께 재수를 하지 않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미국의 학비와 생활비를 일반 직장인 이셨던 아버지는 감당하실 수 없었다. 그래도 유학을 가고 싶다고 철없는 나는 계속 부모님을 졸랐고, 결국 부모님의 마지막 은퇴자금이었던 집을 팔아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유학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강남역 학원에서 토플 공부를 했고 틈틈이 회화 공부도 했다. 당시 유행하던 프렌즈라는 미국 드라마를 틀어놓고 시간이 날 때마다 보았다. 유학 준비를 하면서 미래에 대해 불안했던 감정이 어느 정도 제 자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나니 여자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차올랐다.


당시 유행하던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맘에 맞는 이성을 찾아 헤매었다. 때마침 한석규, 전도연 주연의 "접속"이라는 영화가 유행해서, 사회적으로도 온라인 데이트에 대한 환상이 커가고 있던 때였다. 그러던 중 대화가 잘 통하는 어떤 여자분을 알게 되었고, 한 달 정도 대화를 나눈 후 실제로 만나기로 했다. 휴대폰은 없고 삐삐만 있던 시절인지라, 1998년 어느 토요일 밤에 강남역 타워레코드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지금은 지오다노로 바뀌었지만, 강남역을 지날 때마다 아직도 지오다노 간판 뒤 타워레코드가 희미하게 보인다.


서로 알아볼 수 있도록 여자분은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나오신다고 하셨다. 나는 하얀색 야구 모자를 쓰고 나간다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약속 당일, 당시 유행하던 스타일로 옷을 입었다. 이름하여, 힙합 스타일! 하얀색 야구 모자를 거꾸로 눌러쓰고, 당시 유행하던 똥 싼 바지 (소위, 길거리 청소 청바지)를 입고 나갔다.  


그런데, 이게 웬걸 약속시간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그 여자분은 나타나지 않으셨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화장하느라 좀 늦으시나?'로 시작한 생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비관적으로 바뀌었다. 약속시간 한 시간이 지났을 즈음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약속 장소에 왔다가 외모에 놀라 도망가셨구나!   


날씨도 추운데 밖에서 한 시간이나 서 있었다. 그 분과 못 마주칠까 봐 추워도 계속 밖에 서 있었다. 볼은 새 빨게 지고 코끝이 얼얼한 상태로 몸을 녹이기 위해 타워레코드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에게 처음 바람맞은 그날, 우울한 기분에 맞추어 매장 안에서도 우울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 오늘도~

그댈 맴돌았죠~
어제보다
표정이 좋아요~

노래 탓인지 날씨 탓인지 우울함이 극에 달할 무렵 지나가는 점원에게 물어보았다.

지금 흘러나오는 노래가 누구 노래인가요?
이번에 새로 나온 박정현 씨의 '나의 하루'라는 노래입니다.  


참 매력적인 노래였다. 갑자기 이 앨범을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데이트 비용도 아꼈겠다 거리낌 없이 박정현 1집 카세트테이프를 구매하게 되었다. 평소 돈 아낀다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카세트에 녹음해서 듣던 사람에게 있어 대단한 결정이었다. 강남역 주말 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새로 산 카세트를 워크맨에 넣고 "나의 하루"를 재생했다. 그리고 볼륨을 최대로 올렸다. 주말 밤, 나만 빼고 모두 들떠있는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얼마 전에 D 일보 기자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D 일보 이자연(가명) 기자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작가님 글을 브런치에서 읽고 연락드렸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세대별 한 분씩 섭외해서 특집 기사를 쓰려고 하는데 40대 대표로 혹시 참석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네, 당연하죠. 기회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기자님."

"아 그럼, 촬영하러 오시 기 전에 먼저 해주셔야 할 미션이 있습니다."

"아, 그게 뭔데요?"

"작가님의 인생 중에서 찬란했던 시절의 물건 혹은 장소를 사진으로 찍어서 준비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마치고 어떤 물건을 찍을까 집을 둘러보다 박정현 씨 1집 앨범을 발견했다. 그 앨범을 보고 있으면, 20여 년 전 그때 그 시절로 타임머신을 타고 되돌아갈 수 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여자 친구 안 사귀고 공부만 할 수 있었던 당시 나의 외모가 너무 나도 감사하다. 덕분에 영어 공부에 전념해서 토플 성적을 잘 받을 수 있었다. 그 성적으로 유학을 가고 졸업도 할 수 있었다. 졸업 후 최저 시급 일자리를 전전하지 않아도 되었고, 좋은 직장에서 일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15년 간의 일을 마치고 조기 은퇴해서 예쁜 두 딸을 돌보는 전업주부가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전업작가가 되었다.


'20년 뒤에 기자님이 또 불러 주신 다면 이번에 나는 어떤 물건을 선택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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