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rian 손주부 Nov 01. 2020

우연히 본 아내의 일기장

평소처럼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아내는 출근을 했다. 혼자 남아 집을 정리하다가 식탁에 놓여있는 한 권의 일기장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아내의 것이었다. 일기를 쓰다가 바빠서 그랬던 것인지 활짝 펼쳐놓고 회사에 갔던 것이었다. 평소 같으면 그냥 책장에 다시 꽂아 놓을 텐데 그날따라 일기장에 뭐라고 적혀있는지 눈이 자꾸만 갔다. 내 머릿속에 천사 손주부와 악마 손주부가 동시에 나타났다.


"어서 일기장을 읽어봐! 아내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잖아!"

"안돼! 일기장을 당장 덮고 책장에 다시 꽂아 놓아. 다른 사람의 일기를 읽는 것은 잘못된 일이잖아!"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빈집을 털러 온 도둑이 된 것처럼 가슴이 쿵쾅거렸다.

몇 분간 천사와 악마가 싸우다가 결국 타협을 했다.


'그래, 지금 펼쳐진 쪽만 읽어보자. 읽어보라고 아내가 고의적으로 펼쳐놓은 것일 수도 있잖아'

그렇게 해서 첫 번째 줄을 읽게 되었다.


아, 정성이 가득 담긴 음식이 먹고 싶다.............


첫 번째 줄을 읽자마자 일기장을 바로 덮었다. 그리고 심장이 더 쿵쾅거렸다. 여러 감정들이 밀려들었다. 미안함, 속상함, 억울함 등등......... 그런데 속상한 감정이 다른 감정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아니, 지금껏 내가 준비한 음식은 정성이 없는 음식이라고 아내는 생각했던 것인가? 밀키트로 만든 음식은 정성이 안 들어 간 음식인 것인가? 반찬가게에서 도움을 받으면 안 되는 것인가? 반찬가게까지 걸어가는 것도 내 생각에는 정성이고, 밀키트 요리도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닌데, 지금까지 나의 노력은 무엇이었던 것인가? 부정적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마음속에 오기가 자라기 시작했다.


그래, 앞으로 정성이 담긴 음식이 뭔지 제대로 보여주지!


그 자리에서 바로 마켓컬리와 배달의 민족을 휴대폰에서 바로 지웠다. 그리고 정성이 담긴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우선, 그날 먹을 메뉴를 정하고 레시피를 검색한 다음 직접 재료를 사러 갔다. 신선한 식재료를 구하기 위해 동네 마트가 아닌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대형마트에 갔다. 냉동이 아닌 생물만 골랐고, 유기농 제품 위주로 골랐다. 유통기한이 임박하여 싸게 파는 식재료는 더 이상 눈에 두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면 밥을 먼저 올리고, 밥이 되는 동안 야채를 다듬었다. 나물을 데치고 고기를 양념에 재워놓고 국을 끓였다. 아내가 올 시간이 되면 재워놓은 고기를 굽는다. 손님 올 때나 꺼내던 그릇과 접시로 테이블 세팅을 해놓고 아내의 퇴근과 동시에 재빠르게 접시에 담아내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진 음식을 보고 깜짝 놀란 눈치였다.


"아빠, 오늘 누구 생일이야?"

"자기야, 오늘 무슨 날이야?"

"아니, 오늘따라 요리가 하고 싶어서 신경 좀 썼어."  


나의 정성과 오기가 담긴 저녁식사 준비는 생각보다 오래갔다. 일주일 정도 되던 날 첫째 딸이 갑자기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아빠, 요즘 저녁식사 시간이 너무 행복해! 아빠가 정성스레 만든 음식이 너무 좋아!    


어찌 보면 순수한 동기가 아닌 "오기"로 시작한 요리인데, 딸아이의 눈에는 정성이 가득 담긴 요리로 보였나 보다. 딸아이의 칭찬을 듣고 나니 요리하는 것이 즐거워졌다.


하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요리에 시간을 많이 들이다 보니, 글을 쓸 시간이 확연히 줄었다. 주기적으로 글을 쓰다가 안 쓰기 시작하니깐 글 쓰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손수 만든 요리와 밀키트를 적절히 섞어 저녁 준비를 할 생각이다. 글 쓸 시간도 벌 수 있고, 무엇보다 손수 만든 요리가 기본값이 되는 순간 가족들은 이를 당연히 생각하게 될 것이고, 그런 꼴을 볼 자신은 없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아직 요리 자체를 즐긴다기보다는 가족들의 칭찬이 더 중요한 가 보다.


작가의 이전글 #42 당신의 20대 시절을 표현하는 물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