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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 손주부 Oct 08. 2020

개, 고양이, 그리고 나

폐기 위기에 빠진 남자

개는 수만 년 전 회색 늑대가 가축화되면서 시작되었다. 구석기시대 인류는 수렵과 채집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냥하는 것이 정말 귀찮아진 것이었다. 나이 먹으니 몸도 예전 같지 않고 달리기가 느려지니 사냥감을 놓치기 일수였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자니 토끼 같은 자식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게다가, 사냥감 못 잡아오면 오늘 집에 들어오지 말라는 무서운 아내의 말이 떠올라 빈손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아, 오늘따라 일하기 진짜 싫네. 누가 나 대신 사냥 좀 해서 갔다 줬으면 좋겠다.


사냥하기 싫어하는 인류가 찾아낸 것은 다름 아닌 회색 늑대였다. 인류는 태어난 지 20일이 지난 회색 늑대는 인간과 어울려 지내기 굉장히 힘들지만, 생후 20일 전에 사람의 손을 탄 늑대들은 사람과 잘 지내게 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1년 정도 지나면 늑대는 거의 성인 개체로 자라게 되는데 이 중 난폭한 야생성이 발현되는 개체들은 인류에게 죽임을 당해 고기와 가죽으로 쓰였고, 인류와 잘 어울려 지내는 개체들은 살아남아 함께 사냥을 하며 인간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


구석기시대 이후 신석기시대부터 인류는 개를 이용한 수렵활동도 귀찮아서 농사를 짓고 한 곳에 정착해서 살기 시작했다. (우리는 귀차니즘 원시인들의 후손이다.) 그리고 돼지, 양, 염소 등을 가축화하여서 우리에 가둬 놓고 새끼들을 키워 잡아먹었다. 농사를 짓고 곡물이 쌓이자 인류에게 고민거리가 하나 생겨났다. 가을에 추수한 곡식들을 나중에 먹기 위해 저장해 놓으면 그놈의 쥐들이 등장해서 곡식을 갉아먹었다. 이를 그냥 좌시할 수 없었던 인류는 야생 고양이를 가축화하기 시작했다. 곡식 저장 장소에 고양이들을 키워서 고양이들은 맛있는 생쥐 뷔페를 즐길 수 있었고 인류는 곡식을 갉아먹는 쥐를 퇴치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렇게 해서, 개와 고양이들은 인류의 사냥을 돕고 곡식을 지켜줌으로써 인류의 동반자가 되었다.




강 씨 집안의 귀하디 귀한 셋째 딸이었던 K는 졸업 후 취업하고 혼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다. 큰돈은 못 벌어도 안정된 직장을 다니며,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사 먹었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갔고,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샀다. 부모님께도 종종 용돈을 드렸고 혼자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서른 살이 넘어가자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귀찮게 하기 시작했다.


왜, 결혼 아직 안 하는 거야? 사귀는 남자는 있고? 언제 결혼할 생각이야?


관심이라는 명목 하에 타인은 그녀의 삶의 방식이 그들의 잣대와 다르다는 이유로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K는 집에 가서 부모님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저는 결혼 생각이 없습니다. 앞으로 혼자 살 거예요. 그러니까, 제게 더 이상 "결혼"이라는 단어는 안 꺼내셨으면 좋겠습니다.

    


K는 돌아오는 서울행 고속버스 안에서 앞으로 혼자 행복하게 잘 살 거라고 다짐했다. 그랬던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 직장 선배의 강압(?)에 못 이겨 생애 마지막 소개팅을 하게 된다. 그리고, K는 그 소개팅 자리에서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게 된다. 본인의 이상형과는 안드로메다만큼 먼 얼굴이었지만, 저음의 말투와 친절한 매너에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만난 지 3개월 만에 그녀는 프러포즈를 받았고 4개월이 되던 날 결혼을 했다. 이쯤 읽으셨으면 눈치채셨겠지만, K는 나의 아내다.


개와 고양이가 인류에 상호 도움을 주고 동반자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듯이 결혼이라는 제도도 어찌 보면 서로 도움이 되기에 생겨난 제도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이든, 돈이든, 가사분담이든 어떠한 형태가 되었건 간에  우리는 서로를 돕고 또는 도움을 받기 위해 동반자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서로 돕는 동반자 관계가 최근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집안의 가장으로써 돈을 벌어오던 나는 퇴사 후 백수가 되었다. 그나마 집안 살림을 살면서 동반자 관계를 간간히 유지하고 있었는데, 허리 통증이 시작되면서 집안일도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마흔이 넘어가면서 외모 경쟁력도 떨어져 아내의 정신적 건강에 심각한 손상을 주었다. 이렇게 주는 것 없이 오로지 받기만 하는 관계에서 아내가 지치지나 않을까 심히 걱정이 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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