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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 손주부 Jun 20. 2020

북한보다 설거지 하기가 더 싫어요

내가 회사 당기고 아내가 집에서 애들 볼 때 유일하게 도와주던 집안일이 설거지였다. (그렇다, 난 나쁜 남자였다.) 가끔씩 애들 목욕을 시켜주긴 했지만, 주로 아내가 도맡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난 정말 간 큰 남자였는데, 그땐 그런 생각을 못했다. 살림을 살게 되면서 남자들이 생각하는 설거지와 여자들이 생각하는 설거지에 굉장히 큰 개념적 차이가 있음을 알았다. 살림 사시는 분들에게 있어 설거지라 함은 물에 잘 불린 그릇을 퐁퐁 묻힌 수세미로 잘 닦아준 후 깨끗한 물로 세척해내는 게 끝이 아니라 싱크대도 닦고 하수구에 담긴 음식물 쓰레기도 치우고 주변에 튄 물과 더러워진 행주까지 빠는 것이 설거지이다. 그 당시 내가 정의하던 설거지란 그냥 물로 대충 그릇만 닦아서 식기 건조대에 던져놓는 게 설거지였다. 기름기 많은 음식을 먹은 날에는 퐁퐁 (72년에 출시된 주방세제) 과정을 거치기 귀찮아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설거지를 빛의 속도로 마쳤다. 그러고 나선 늦게 까지 야근하고 집에 돌아와서 설거지를 도와주는 나 자신을 참 기특하게 생각했다.

  



이제 집에서 역할이 바뀌었다. 아내는 돈 벌러 나가고 내가 모든 집안일을 한다. 아내가 유일하게 하는 집안일은 아이들 목욕시키기다. 초등학교 6학년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같이 씻자고 한다. 아이들이 딸이어서 정말 다행이다. 아들이었으면, 애들 목욕도 내 차지가 될 뻔했다. 오후 5시 정도 되면 오늘 저녁 식사로 무엇을 할지 고민한다. 예전에 읽은 신문에서 오후 5시부터 주부들의 행복도가 떨어진다는 연구결과가 있었는데, 이젠 정말 공감된다. 우리 집은 와이프가 좋아하는 음식과 애들이 좋아하는 음식이 겹치지 않기 때문에 한 끼에 2~3가지 요리를 해야 한다. 맘 같아서는

 

'오늘은 한 가지 요리만 할 테니 불평 말고 주는 대로 먹어!'


라고 외치고 싶지만, 내가 돈 벌어 오던 시절 와이프는 매일매일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과 어른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항상 둘 다 준비했다. 나는 초등학생 입맛이라서 애들 먹는 거 먹어도 되는데, 아이 엄마는 내 건강을 위해서라면서 항상 나물과 샐러드를 준비했다. 그동안 받아온 것이 있으니 나도 똑같이 해줘야 할 것 같은 무언의 압박이 있다. 물론 아내는 너무너무 착해서 아무거나 잘 먹긴 한다.


한 시간 정도 일어서서 열심히 요리를 하고 나면 저녁 식사할 때 즈음엔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특히 요즘 같이 더운 날에 불 앞에 오래 서 있으면 있던 식욕도 날아가고 식사를 할 때는 더위 먹은 사람처럼 멍 때리면서 가족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 집은 주방과 거실에 에어컨이 없다.) 우리 집 식사는 한 시간 정도 이어진다. 저녁을 먹고 디저트를 먹은 후 입가심으로 커피나 차를 둘러앉아 마신다. 이렇게 먹고 나면 설거지 거리는 점점 쌓여간다. 그리고 설거지에 대한 부담감도 점점 쌓여간다.


14년 전 신혼 초에 아버지, 어머니, 장가 안 간 동생이랑 다 같이 산적이 있었다. 한 끼 식사를 마치고 나면 설거지는 어마 무시하게 많이 나왔다. 설거지를 도와주자니 엄마의 눈치가 보이고, 설거지를 안 하자니 와이프의 눈치가 보였다. 중간에서 중심을 못 잡고 조선시대 광해군처럼 양다리 걸치다가, 두 명의 여성으로부터 동시에 원성을 들었다.

자기야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아내)


아들 새끼 키워봤자 다 소용없어. 아들! 너무 실망이야! (엄마)



미국과 중국 사이에 껴서 어느 쪽 편을 들어야 할지 주춤 대다가 두 나라 모두에게 쥐어터지는 한국처럼 난 양쪽 모두에게 욕먹었다. 욕먹는 게 지쳐갈 때 즈음 와이프가 이혼하자고 이야기했고, 난 상황이 안 좋아졌음을 직감하고 부모님께 분가를 선언했다.


설거지에 대한 추억이 이렇게 안 좋다 보니 설거지란 말만 들어도 자동적으로 뒷골이 당긴다. 나의 정신 건강과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시간을 벌기 위해 퇴직금이 나오면 가장 먼저 식기 세척기를 사야겠다. 내가 좋아하는 L사에서 만든 식기세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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