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 발렌시아
말라가를 떠나기 하루 전날, 나는 고민 중이었다. 다음 행선지 때문이었다. 발렌시아와 바르셀로나. 어차피 스페인에 온 이상 바르셀로나는 무조건 가야 하는 곳이었기에, 사실 결국은 발렌시아를 들러서 가느냐, 아니면 그냥 바르셀로나로 직행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어차피 발렌시아는 바르셀로나로 가는 길에 있는지라, 그렇게 가기 까다로운 곳은 아니었다. 다만, 이제 여행도 한 달이 거의 다 되어가는 상황에서 돈을 좀 아껴야 하지 않나,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들었던 것 같다. 발렌시아, 하면 지금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서 강등권 언저리를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축구팀이 있는 도시라는 것 정도, 그리고 만화 '바텐더'에도 소개된 칵테일 '발렌시아'의 연고지라는 것 정도밖에는 몰랐다. 굳이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도 가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설득했고, 결국은 나도 한 군데 더 들러보자, 하는 생각에 말라가 - 발렌시아 행 버스 티켓을 끊었다.
그리고 버스 안에서 자그마치 12시간 남짓을 달려 도착한 발렌시아. 난 이 날을 기점으로 다시는 다섯 시간 이상 버스나 기차를 타지 않기로 했다. 좁고, 덥고, 공기도 텁텁한 곳에서 12시간을 앉아 가는 건 '이동'하고 있다는 것보다는 '수송'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렌페 기차를 타는 것보다는 몇 푼 더 싸니 버스를 타기로 한 것이 나니 누굴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지끈지끈한 꼬리뼈를 달래며 캐리어를 끌고 호스텔이 있다는 발렌시아의 중앙 기차역으로 걸어갔다. 이미 12시를 넘겨 1시가 다 되어가는 상황이기에, 버스나 지하철은 기대할 수 없고 택시는 비싸다. 늦은 밤에 혼자 걷는 것이라 걱정했지만, 다행히 발렌시아의 밤은 정말 조용했다. 조용하다는 단어마저 자러 간 게 아닌가 싶을 만큼, 행인도 거의 없었다.
마침내 발렌시아 중앙역에 도착했다. 말 그대로, 정말 발렌시아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역이었는데 심지어 예쁘기까지 했다. 동화 속에 등장하는 성을 커다란 장난감으로 만들어놓은 듯한 채색과 외관이 늦은 저녁의 주홍빛에 물든 게 꽤나 멋졌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때 내 정신은 그런 걸 느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호스텔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구글맵에 따르면 역을 정면으로 봤을 때 왼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데, 왼쪽으로 가면 정말 개미새끼 한 마리 안 지나다니는 거리였다.
별 수 없이 어느 민가의 열린 창문으로 보이는 아줌마들에게 물어보려고 말을 건넸는데, 소리를 지르면서 면전에서 문을 쾅 닫아버리기까지. 그때는 제대로 먹은 것도 없는 데다가, 늦은 밤에 숙소도 못 찾아 피곤한 상태였기에 마냥 야속하기만 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두운 밤에 외국인 남자가 창 밖에서 말을 걸면 아줌마들이 기겁할 만도 했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하하.
그렇게 찾기를 약 삼십 분. 이쯤 되자 그냥 밖에서 밤 새자, 하는 자포자기식 심정으로 그냥 야경이나 찍어두기로 했다. 역이 말이라도 할 줄 알면 호스텔 어디 있느냐고 물어볼 수라도 있을 텐데. 김연우가 부른 이별택시의 한 소절이 절로 생각나는 때였다.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그렇게 역 앞에 앉아 다른 호스텔을 찾아볼까, 그냥 노숙을 할까 싶던 중,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찾아보기로 했다. 아무리 찾아도 아무것도 없던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그리고 덕분에 나는 이날 밤 침대에서 잘 수 있었다. 호스텔은 역의 오른쪽 끝자락에 있었다. 내가 예약한 호스텔의 이름이 당당히 박혀있는 자동문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줄이야. 위치를 잘못 알려줘서 거진 한 시간을 헤매게 만든 구글맵에 대한 원망도 눈 녹듯 사라졌고, 나는 곧장 숙소로, 이어서는 침대로, 마지막으로는 꿈나라로 체크인했다.
여느 때보다 상쾌한 아침이 찾아왔고, 내 발렌시아 여행이 시작됐다. 출근 시간이 조금 지난 발렌시아의 아침은 조금 한적했고, 나는 그 한적함 속으로 녹아들었다. 발렌시아는 스페인 제 3의 도시로, 결코 작은 도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관광객에게 큰 도시는 아니었다. 지하철을 타지 않아도 관광지를 하루 안에 둘러보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발렌시아의 과거는 큰 울타리 안에 모여있다. 그 울타리 안팎으로는 민가와 상점들이 빼곡하지만, 군데군데 커다란 덩치로 남아있는 건축물들이 나타난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여느 도시들처럼, 과거의 흔적들은 웅장하지만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낯으로 우리 앞에 서있다.
개인적으로 발렌시아 여행에서 제일 좋았던 건물을 하나 뽑으라면, 바로 이 건물이다. 토레스 데 세라노. 웅장한 규모에, 중세 시대를 연상시키는 각진 외관이 우직해 보인다. 어렸을 때 만들었던 레고 성이 떠오르기도 하고, 저 돌들 사이마다 묻어있을 것만 같은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스쳐서 근처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요즘은 이런 성문은 초라해 보일 만큼 커다란 빌딩들이 한국에도 많이 생겨서 그다지 크기에 대한 감흥은 없지만 옛날엔 어땠을까? 큰 건물은 본 적도 없는 촌사람이 이렇게 큰 성문을 마주하게 되면 무슨 생각이 들었으려나. 왠지 내가 그 촌사람이었다면, 엄청나게 큰 돌을 어떻게 저 모양으로 깎아놨을까, 싶었을 것 같다. 그러니 이보다 훨씬 더 큰 피라미드는 정말 불가사의라는 말이 나올 법도 했다. 물론 아직 본 적은 없다만...
세라노 탑뿐만이 아니더라도, 발렌시아의 도심을 채우고 있는 건물들은 거진 다 멋졌다. 깔끔한 흰 색으로 단장하고 있는 건물들은 과거와 현재, 어느 한 지점에서 눌러앉은 듯한 모양새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여유롭게 내려보고 있었다. 발렌시아의 도심 속을 누비는 일은, 그래서 생각보다는 훨씬 더 재미있는 일이었다. 꼭대기에 다양한 모자를 쓴 건물들의 모습은 고리타분하다는 느낌은 일절 없이 아주 세련된 것이어서, 지도를 펼칠 생각은 하지도 않고 한참 동안이나 걸었다.
발 가는 대로 걷다 보니 중앙 시장에 도착했다. 마드리드에서 산 미구엘 시장을, 말라가에서도 숙소 근처에 그와 비슷한 시장이 있어서 들러 봤었지만 이 발렌시아 중앙 시장은 그들과는 또 달랐다. 생각해보면 산 미구엘 시장도, 말라가의 시장도 사실 시장이라기보다는 먹자골목 같은 느낌이 있었기 때문. '재료'를 팔기보다는 '음식'을 주로 팔았던 기억이 난다. 덕분에 안팎으로 먹고 마시는 사람들로 붐벼서 구경을 하기엔 좀 불편했었다. 발렌시아의 시장은 일단 입구부터 그 둘보다는 널찍하니, 끼여다닐 일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역시. 발렌시아의 시장은 음식을 파는 곳은 찾기 어려웠고, 내가 생각하던 시장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과일, 생선, 고기를 비롯해서 온갖 잡화 및 빵과 쿠키들.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에 나오는, 볼드모트가 호크룩스 숨겨놓은 소원의 방처럼 신기한 것들로 꽉 들어찬 공간을 돌아다니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새로운 것들이 보이니까.
즐겁다. 마드리드의 산 미구엘 시장이 입이 즐거운 곳이라면, 발렌시아의 시장은 눈이 즐거운 곳이다. 다만 간혹 즐겁다 못해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들이 꽤 많이 보였는데, 보통 정육점들이 그랬다. 비위 약하신 분은 고개 돌리실 준비를 하고 다니시길. '돼지는 무덤이 없다'는 말이 있는 한국에서도 못 본 부위들의 비주얼은 가히 공포스러울 정도이기에...
돌아다니다 보니, 덥다. 포르투갈에서도, 지금까지 갔던 스페인의 도시들에서도 못 느껴봤는데 말이다. 발렌시아로 오니 더웠다. 따지고 보면 말라가 하고 세비야가 더 남쪽인데, 거기서는 딱히 덥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며칠 사이에 더워진 건지 티 하나 입고 돌아다니는데도 땀이 난다. 시간이 지나 4시를 넘어갈 때 즈음이 한계였다. 얼추 볼 것도 다 보기도 했고, 더 이상 돌아다니다가는 진이 다 빠질 것 같아서 오늘은 그만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숙소에선 바도 겸하고 있어서 술도 팔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띈 것은 'Aigua De Valencia'. 흔히 얘기하는 RTD(Ready To Drink) 스타일의 술으로, 유명한 칵테일 '발렌시아'를 병입한 것. 발렌시아는 사실 칵테일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간단한 레시피로 이루어지지만 - 애프리콧(살구) 브랜디 + 오렌지 주스 - 맛은 굉장히 좋다. 사실 오렌지 주스를 넣었으니 맛없기가 힘들긴 하겠지만, 발렌시아의 오렌지는 맛 좋기로 유명한만큼 현지에서 만나는 건 또 특별하다.
오렌지의 향이 풍부하게 올라오고, 절제된 단맛이 혀를 어루만진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약간의 탄산이 한 잔에 약간의 아치(雅致)를 더해준다. 과거를 품은 도시, 발렌시아를 비추는 햇빛에 서서히 오렌지빛이 섞이기 시작했고, 하루 동안 열심히 걸어 다닌 덕에 약간의 술기운으로도 노곤함이 밀려왔다. 하루를 조금 이르게 마무리할 수밖에 없는 늦은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