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 론다
어느 곳이나 다 그렇듯, 론다에도 밤이 찾아온다. 론다의 밤을 돌아다닌 이야기는 사실 분량이 그렇게 많이 나올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안 쓰고 넘어갈 수는 없는 그런 부분이다. 지금까지의 여행에서 가장 고즈넉하고 조용한 도시가 주홍빛과 어둠 색으로 물들었을 때 내가 돌아다닌 기록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기록을 붙잡기 위해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기를 몇 차례. 마침내 해가 저물고, 박명이 시작되었다.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한다는 뜻이었다. 긴가민가하지만, 그게 얼추 9시가 거의 다 돼서였다. 스페인의 밤은 상당히 늦다. 아직 남은 빛들이 부딪히고 있는 건물들부터 하나둘씩 카메라에 담기기 시작했다.
누에보 다리 건너편, 낮동안 마냥 하얗던 집들이 천천히 푸른빛을 띠기 시작했다. 집 안, 그리고 길가에 늘어선 가로등에서는 햇빛을 잡아 가둔 듯한 주홍빛이 새어나오며 저녁의 재림을 알린다. 아직까지도 밝은 론다가 조금 더 어두워질 때까지, 구 시가지를 한 번 더 돌아보기로 했다.
누에보 다리에도 주홍빛 조명이 드는 가운데, 구 시가지를 오가는 사람들은 뜸했다. 밤의 기억을 남기고 싶은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걸까.
찾아오는 건 더뎠지만, 일단 찾아오자 마을 구석구석 남아있는 빛들을 살라먹기 시작한 어둠이었다. 가로등 불빛은 기분탓으로 더 밝아지고, 인적이 없는 골목길에 내 발소리만 울렸을 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앞서 있는 사람도, 뒤쫓는 사람도 없을 때의 가벼운 발걸음이 론다의 돌바닥을 울렸을 때가.
불야성(不夜城)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밤이 없다시피 한 동네도 있다지만, 적어도 론다는 그런 말에서는 거리가 멀다. 아니, 사실 지금까지 다녀본 도시들은 다 그랬다. 포르투갈의 리스본, 스페인의 마드리드나 세비야도 모두 낮이 저물면 찾아오는 밤을 어둠으로 맞이했다. 덕분에, 여행을 와서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게 된 것 같다. 나는 밤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훨씬 좋다는 거.
아직 풀벌레 소리가 들리기엔 아직 이르고, 낮 동안 지저귀었던 새들도 밤에는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지나다니는 차도, 사람도 없어 주변의 소리가 빛만큼이나 사라졌을 때, 비로소 야상곡은 시작된다. 정적에 가까운 소리들의 합창이 밤을 메운다. 주변의 민가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말소리, 드물게 차가 지나다니는 소리, 바람이 골목을 흝고 지나가는 소리, 그 사이에 서있는 나의 소리.
각 도시마다 저마다의 밤은 다르기에, 저마다 연주하는 야상곡도 다르다. 론다의 4월, 아직은 서곡인 야상곡은 점차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음표와 기호가 즐비하게 늘어선 웅장한 곡으로 바뀌어갈 것이다. 어느 저녁, 내가 들은 한 대목은 조금은 짧고, 언젠가는 다시 와서 다른 대목을 들어주기를 부탁하는 듯 낮은 울림이었다. 그리고, 이제 또다시 떠날 때가 왔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안달루시아의 또 다른 도시, 말라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