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 론다
헤레즈에 이어, 세비야를 두 번째로 떠난다. 다만 이번에는, 왕복이 아니라 편도 티켓을 들고. 론다행 티켓이다. 헤레즈에 비해서는 그나마 좀 알려진 곳이지만, 그래도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그런 도시. 솔직히 버스에 몸을 실은 나조차도 론다에 뭐가 있는지는 잘 몰랐다. 그냥, 절벽 위에 자리 잡은 도시라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
버스로 약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론다까지 가는 길은, 참 아름다웠다. 지평선까지 가득 찬 풀들 덕에 땅은 초록색 바다처럼 보였고, 언덕 위에 점점이 자리 잡은 동그란 나무들은 꼭 그 바다 위를 헤엄치는 커다란 물고기들 같았다. 하지만 사진기를 들이밀 때마다 야속하게도 휙휙 지나가버려서, 종국엔 그냥 눈에나 양껏 담아두기로 했다.
오는 길이 그렇게나 예뻤으니, 마을은 또 얼마나 예쁠까. 기대만발이었다. 호스텔에 짐을 풀자마자 당장 나오고 싶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10시 차를 타고 오느라 일어나자마자 씻지도 못하고 급하게 짐을 챙겨 나왔고, 어제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헤레즈를 도느라 몸이 좀 무리한 것이다. 결국은, 일단 씻고 좀 쉰 다음 나가보기로 했다.
다행히 날씨가 따라준다. 일기예보를 보니, 론다에 머무르는 동안에 하늘에서 물 한 방울 떨어질 일 없을 것 같다. 따가운 햇빛을 간간이 막아주는 흰색 구름, 파란 하늘과 맞닿는 초록색 땅, 그 위에 불쑥 튀어 올라있는 론다에 발을 들이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었다. 그리고 누에보 다리를 건너기 전, 발길 가는 대로 왔더니 있었던 전망대.
그곳에서 봤던 풍경을 묘사하려면, 키보드를 쉽사리 누를 수가 없다. 무심하게 깜박이는 커서가 원망스러울 만큼, 한 글자 한 글자 써나가기가 부담스러우리만치 아름다웠기에. 론다에 올 이유는, 솔직히 그 순간 반 이상 채워졌다. 그렇게 아름다운 광경도 다 채울 수 없었던 방문 이유의 나머지는, 내 여행의 중심인 술이었다.
스페인의 남부 지방은 대부분 그렇지만, 론다 역시 와인이 유명하다. 사실 전망대에 올라 눈에 담기는 광경의 몇 할 정도는 포도밭이 차지한다. 템프라니요, 피노 누아 등 다양한 품종의 포도를 키우는 포도밭이 절벽으으로 솟아오른 론다의 주변을 메우고 있다. 그런 론다의 와인을 체험해보기 위해서는, 론다 구 시가지 중심부, 산타 마리아 성당 뒤편에 위치한 Centro de Interpretacion del Vino de Ronda라는 곳을 방문하면 된다. 구글맵에 치면, 위치가 틀리게 나온다. 성당 뒤편에 표지판이 있으니, 그대로 따라가시거나 주변 현지인들에게 물어보는 방법을 추천한다.
구글맵 덕분에 좀 헤매다가 도착한 론다 와인 센터. 입장료 5유로를 내고 들어가면, 주위로 오크통들이 둘러선 작은 뜰이 나온다. 이 뜰에서 시음이 진행된다. 간단한 스낵과 잔, 그리고 잔을 헹구기 위한 물을 직원이 준비해준다. 그리고 중요한 부분. 론다의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 셰리 와인 4종을 무제한으로 시음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몰랐던 나는 싱글벙글 하며 시음을 시작했다.
일단 시음의 정석을 따라 화이트 와인부터. 시음 방식이 좀 충격적이었다. 벽에 달린 수도꼭지를 돌리면 와인이 나온다. 술꾼들의 이상향이라고 할 만하다. 아마도 벽 속에 술통이 들어있고 그게 수도꼭지와 연결된 듯. 수도에서 낯설게 흘러내리는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 개인적으로는 레드 와인이 더 좋았다. 바디감도 풍부했고, 타닌이 많아 조금 텁텁한 감이 있었지만 맛의 균형은 훌륭했다.
다음은 작은 통들에 담긴 셰리 와인들. 드라이 와인, 세미 드라이 와인, 스위트 와인, 머스캣 와인. 총 네 가지였고, 이번에도 드라이 와인부터 시음을 시작. 시음 후기를 쓰기에 앞서, 이 와인들은 병으로도 판매하고 있으므로 시음 후 마음에 든 와인은 사갈 수 있다. 다만 나는 혼자서 다 마실 자신이 없고(거짓말이다. 있다.) 가지고 다니기도 힘들어 못 샀지만.
일일이 시음 후기를 다 쓰기는 좀 그러니, 가장 마음에 들었던 한 잔을 꼽으라면 스위트 와인인 Vino PedroXimenez다. 중후한 느낌을 주는 색깔과는 별개로, 신선한 포도향이 잘 살아있지만 저변에서는 세월의 무게가 실린 오크통 특유의 바닐라, 훈연 향이 묻어나온다. 향에서부터 기대하게 만드는 와인이었는데, 맛 역시 훌륭했다. 농밀한 질감, 꿀을 연상시키는 진한 단 맛과 여전히 살아있는 포도의 산미가 아름다운 균형을 이룬다. 너무 맛있어서 한 잔 더 마시고, 그것도 다 마신 후엔 한 잔 더 따라서 박물관을 둘러봤다. 그렇다. 박물관이 있다. 뜰을 감싼 건물의 2층이 박물관이었는데, 뭐 대단한 건 없지만 이런저런 용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인상 깊었던 곳이 있었다.
와인이 가지는 다양한 향기를 맡아볼 수 있도록 향기 에센스들을 준비해둔 방이 있었다. 한국어로도 설명이 되어있었던 점이 놀라웠다. 한국인들도 꽤 많이 찾아오는 모양이었다. 다만 준비된 향기가 많지는 않았고, 몇몇 향은 변질되어 있는 데다가 병이 깨졌는지 몇 개는 누락되어 있어서 아쉬웠다. 시도 자체는 참신했지만 좀 더 잘 관리해야 할 듯. 그와는 별개로, 여러 가지 향기를 맡아볼 수 있는 경험은 굉장히 특별했다.
견학을 마치고 나오니 네 시쯤 되어있었다. 솔직히, 론다는 아름다운 곳이지만 볼 게 많지는 않다. 구 시가지는 워낙 땅이 좁은 탓에 건물들도 크지 않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성당이나 박물관 견학보다는 그냥 걸어 다니는 걸 더 선호해서, 한 번 질릴 때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누에보 다리 전경도 찍어볼 겸, 론다 주변을 한 번 돌아보기로 한 것. 날씨가 덥기는 했지만, 좋은 날씨여야 좋은 사진이 나올 테니 상관없었다.
구시가지의 끄트머리 즈음에서 길을 따라 내려가면 산책로가 열린다. 포장도로가 그치고, 흙길이 나오며, 초록색으로 덮인 땅이 보인다.
누에보 다리를 향해서 걷는 길은 평탄하다. 이런 날씨에 나와 같은 선택을 한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듯, 사람을 마주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조금씩 노릇하게 변해가는 햇살을 맞아가며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내가 바라던 풍경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대지에 뿌리를 박은 나무가 밑동만 남은 것처럼 솟아있는 갈색 절벽, 그 위로 론다의 구 시가지가 올라앉아있다. 자연의 건축물 위에 자리 잡은 인간의 건축물들. 하늘에 닿아있는 것처럼, 아니 어쩌면 하늘 위로도 솟아있는 섬처럼 있는 도시. 나는 몇 발짝 걷다가 멈춰서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사진기의 셔터를 누르고, 다시 몇 발짝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러기를 수 차례, 드디어 누에보 다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부터는 좀 힘들 준비를 하셔야 한다. 길이 가파르고, 좁다. 그 오르막길을 오르다 보면, 마침내 누에보 다리의 전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고생스러웠던 길도 싹 잊게 만드는 풍경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 다리 위에서 아래를 굽어보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 사람들에게도 내가 보였을까.
누에보 다리를 본 후에도 다시 론다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삼십 분 조금 넘게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 물론 이건 길을 가다가도 풍경을 보기 위해 멈춰 서고 돌아섰던 시간까지 포함해서. 쉬어갈 곳은 많고, 사진 찍을 곳은 더 많다. 기쁜 일이다.
마침내 론다로 돌아왔을 때에는, 해가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하늘섬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대로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곪아 떨어졌다. 뱃속에 든 것도 없이 몸을 너무 많이 움직여서일까. 하늘섬의 저녁을 담는 일은 천상 내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