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 헤레즈 데 라 프론테라
세비야를 들르기 전에, 아니 사실 세비야에 방문하고 나서도 계속 고민하던 게 있었다. 헤레즈 데 라 프론테라(Jerez De La Frontera)에서 묵느냐, 마느냐. 헤레즈라는 도시 이름이 낯선 분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스페인의 포티파이드 와인(Fortified Wine)인 셰리(Sherry)의 주요 생산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술 여행 중인 나로서는 안 들러볼 수가 없는 도시. 하지만 이 헤레즈라는 도시를 들르는 건 기정사실이지만, 거기서 묵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또 고민을 해봐야 한다. 헤레즈라는 도시 자체가 원체 작아서, 사실상 셰리 와이너리 정도를 빼면 그다지 볼 게 없기 때문. 묵으면서 근교 도시를 돌아보는 선택지도 있지만, 워낙에 작은 도시다 보니 숙소도 거의 없으며 있는 것도 비싸다. 그리고 오늘 아침 눈을 뜬 순간, 그냥 세비야에서 하루 더 자고 당일치기로 갔다 오기로 결정했다.
급작스럽게 결정한 것이다 보니, 호스텔 직원들에게 물어보고 겨우겨우 도착한 세비야 버스 터미널. 순환 버스인 C4를 타고 가면 도착할 수 있다. 정류장 이름에 전혀 '버스 터미널'이란 정보가 없으므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여행기를 쓰고 있는 누구처럼 멍하니 있다가 한 바퀴 돌게 된다. 순환선이라 다행이었다.
표를 사고 나면, 한적한 버스 터미널에서 기다려야 한다. 세비야에서 헤레즈 데 라 프론테라로 가기 위해서는 'Valenzuela'라는 버스 회사의 노선을 타고 가야 하는데, 오전 중에는 6:00, 7:15, 10:30, 그리고 오후로 넘어오면 13:00, 16:30, 18:30, 21:00(막차) 마다 버스를 운영한다. 일요일에는 15:30시 버스를 추가적으로 운영한다. 왜 적응 안 되게 이렇게 정보를 펑펑 쏴주느냐 하면, 본인이 헤레즈까지의 정보가 없어서 워낙 고생했기 때문이다. 헤레즈까지 버스 타고 가본 사람이 많이 없는 편인가 보다. 마드리드나 세비야, 포르투 같은 곳은 내가 정보를 쓰지 않아도 이미 정보가 많지만, 헤레즈는 그렇지 않았기에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까 싶었다. 이전 편들처럼 감성적인 글투가 안 나와도 양해 부탁드린다.
헤레즈까지는 대충 1시간 15분 정도가 걸린다. 도착해보니, 정말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한적함이 마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도시와 외곽의 경계가 이렇게 확실한 곳은 또 처음 보는 것 같다. 회색이 끝나면, 바로 초록색 지평선. 관광객도 거의 없는데다가 동양인은 정말 없어서, 하루 종일 돌아다니면서 그 많은 중국인이나 일본인조차 한 번도 못 봤다. '정말 혼자만의 여행을 하고 싶어!'라는 생각이 드시는 분이라면, 헤레즈 한 번 들러볼 만하다.
오늘의 목표인 Gonzales Byass의 Bodega(와인 창고를 이르는 스페인어)가 보인다. Tio Pepe는 곤잘레스 비아스의 브랜드 명이다. '페페 삼촌'이라는 뜻으로, 창업자인 곤잘레스 비아스의 삼촌인 페페를 기리는 의미에서 쓰고 있는 이름. 와인 마실 생각에 절로 들뜨는 발을 끌고 올라가니, 표 파는 창구는 문이 닫혀있다. 다른 입구로 가서 경비원에게 물어보니, 입장 30분 전부터 연단다. 영어 가이드가 제공되는 입장은 17시부터, 이때 시각은 15시. 다시는 헤레즈에 나와 같은 불행한 와인 팬이 없기를 바라며, 여기에 또다시 정보를 덧붙여둔다. Bodega Gonzales Byass의 영어 가이드 투어는 12:00, 13:00, 14:00, 17:00에 있다. 시간 계획 잘 세워두고 가시길 바란다.
붕 떠버린 2시간을 때울 장소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 조그만 헤레즈라는 동네에도, 다른 스페인의 도시들이 으레 그렇듯 알카사르와 대성당이 있었던 것. 한 군데에 대충 한 시간씩 투자하면 맞아떨어지겠다, 싶어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알카사르와 대성당은 Bodega Gonzales Byass 바로 옆에 있었다. 의도치 않게 동선이 잘 나와서 기분이 좋았다.
알카사르의 입장료는 일반 5유로, 학생 할인을 받으면 1.5유로였다. 싼 맛에 들어가긴 했는데... 정말 볼 게 없었다. 어제 봤던 세비야의 알카사르에 비하면, 정말 초라해 보일 정도. 나름 고즈넉하면서도 한적한 분위기가 있기는 하지만, 5유로를 내고 들어갈만한 곳이냐고 물어보신다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히 1.5유로만 내고 들어와서 실망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오히려 작아서 만족하고 나올 수 있었던 것 같기도. 세비야의 알카사르는 너무 커서,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못 보고 온 곳이 있을 것 같아서 아쉬움이 남으니 말이다. '볼 거 없다'는 말은 사실 '빠짐없이 다 볼 수 있다'는 말로도 쓸 수 있지 않을까.
기억에 남는 점이라면, 내가 동양인인 걸 보자마자 입장권을 발행해주던 점원이 뭔가를 보여줬던 것이다. 설마 이런 곳에서 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핫팩, 그러니까 손난로였다. 친구한테 받았다고 하던데, 한국어로 도배가 된 탓에 도대체 뭐에 쓰는지 몰라서 그냥 쟁여놓고만 있던 것이다. '추울 때 손 따뜻하게 만드려고 쓰는 거다'라고 했더니 '그럼 뭐 먹는 거야?'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ㅋㅋㅋ. '아니 그냥 뜯어서 흔들면 따뜻해지는 거야'라고 알려줬더니 '그럼 여기선 쓸 일이 없겠네ㅠㅠ'라고 대답하던 점원. 이것도 여행의 묘미라면 묘미.
알카사르를 금방 다 보고 나온 나를 놀라게 한 곳은 대성당이었다. 아까 봤던 알카사르처럼, '이런 촌구석 대성당이 커봐야 얼마나 크겠어' 싶었는데, 컸다. 그것도 꽤 많이. 여기도 역시 학생 할인이 있다. 일반 요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학생 할인을 받으면 2.5 유로였다.
이런 한적한 곳의 대성당이라도, 여느 대도시의 대성당 못지않게 크고 화려했다. 주변에 관광객들도 드물다는 점이 더 좋았다. 하지만, 관광객이 적어서 불편한 점이 하나 있다면 영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 매표소 직원들도 영어를 거의 몰랐다. 이런 불편도 나름 여행지의 낭만이라고 생각하면, 뭐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지만.
마침내 17시가 거의 다 되어서 고대하던 표를 살 수 있었다. 기본 와인 2종만 제공되는 티켓이 13.5유로, 와인 4종이 제공되는 티켓이 16.5 유로, 와인 4종과 안주가 제공되는 티켓이 19.5유로. 여기까지 와서 2시간이나 기다린 만큼, 와인 두 잔만 마시고 갈 수는 없었기에 와인 4종이 제공되는 티켓을 선택했다.
투어는 자그마한 기차를 타고 진행됐다. 시종일관 저걸 타고 하는 게 아니라, 타다가 내려서 설명하고, 다시 타서 이동하는 식. 투어는 굉장히 알찼다. 포르투에서 샌드맨과 테일러, 두 군데의 와이너리를 견학했지만 이 곳은 그 두 곳을 합친 것만큼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아무래도 포르투는 지형상 와이너리가 좀 협소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이 곳 보데가 곤잘레스 비아스는 단순히 땅만 넓은 것뿐만 아니라 이야깃거리가 많다는 느낌이었다. 오크통에서 숙성된 연차에 따라 달라지는 색과 향을 직접 체험해보고, 다양한 명사들의 서명이 들어간 오크통과 오랜 역사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 글을 쓰면서 든 생각이지만, 꼭 이 모든 것들이 보데가 곤잘레스 비아스라는 커다란 오크통 안에서 숙성되어가는 셰리 와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쓰는 이 이야기도 그랬으면 좋겠다.
오크통으로 가득 찬 창고를 들어가 보시면 알 수 있다. 오크통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창고 입구에서부터, 약간 빵 같기도 한, 달콤한 냄새와 묵직한 훈연 향이 켜켜이 쌓여 세월을 맞는 냄새가 난다. 뱃속에 언젠가 사람들의 입으로 들어갈 술을 담고 하루, 또 하루 기다리는 오크통이 꽤 멋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여행을 떠난 이유도 이런 오크통이 되기 위해서지 않을까. 더 많은 것을 안에 넣고, 더 다채로운 색과 향을 지닌 안을 담기 위해서. 사실 그게 젊음의 의무가 아닐까 싶었다. 더 멋지게 숙성되어가기 위한 재료들을 최대한 많이 모으는 거.
투어가 끝나고, 티켓대로 네 잔의 와인이 제공되었다. 왼쪽부터 티오 페페 피노, 올로로소 세컨드, 크로프트 파인 페일 크림, 솔레라 1847 크림. 네 잔 모두 특별한 모습을 보여줬다. 다년간의 숙성을 거친 와인에서도 포도향이 잘 살아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고, 잔마다 뚜렷한 개성을 보여주는 점 역시 인상 깊었다. 개인적으로 세 번째, 그러니까 크래프트 파인 페일 크림이 제일 마음에 들었던 한 잔이었다.
한 여름, 조금 덜 익은 포도송이에서 한 알을 입 안에 넣은 듯 풍부한 과실 향, 꿀처럼 농밀한 달콤한 향기에 오크통의 바닐라 향기, 세비야에서부터 따라온 듯 사방을 메운 오렌지 꽃 향기가 묻어온다. 신 맛을 누그러뜨리는 단 맛, 단 맛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신 맛. 주변의 소리가 잦아들고, 시간이 어긋나 여러모로 고생스러웠던 오늘 하루가 천천히 녹아든다.
돌아오는 길은 노을이 지고 있었고, 한 시간 동안 버스를 기다려야 했지만 짜증은 나지 않았다. 아직도 입 안에 감도는 한 잔이 있었기에.
Gracias, Tio Pepe.
한 손 위의 한 잔이 희로애락을 모두 녹여낼 수 있다는 것.
내가 술을 사랑하게 된 이유를 확인시켜주는 한 잔을 만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