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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quaviT Apr 06. 2016

옛날이 메아리치는 곳

스페인 - 세비야


  여섯 시간 동안 버스를 탄 끝에, 드디어 도착한 곳이다. 세비야.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낭만적인 곳이다. 세비야를 밟기도 한참 전부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세비야가 '노트르담 드 파리'에 나오는 에스메랄다의 연고지(...)인 안달루시아의 중심 도시라는 걸, 그리고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와 '카르멘'의 배경이 되는 도시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였다. 세비야, 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언제나 바람에 잎결을 휘날리는 종려나무들과 이슬람 풍의 장식으로 가득 찬 정원들이 따가운 햇살 아래 달궈지는 그런 광경이 머릿속을 그렸다. 그런 곳을 마침내 밟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세비야행 버스가 그렇게 지루하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던 이유다.





  저번에 톨레도를 방문했을 때 이후로 결심한 게 한 가지 있다. 발 들인 도시를 본격적으로 보기 전에, 술 한 잔으로 몸을 좀 데워주자는 것이었다. 세비야에 도착해서 호스텔에 짐을 풀고, 맥주 한 캔을 사서 저녁의 세비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오후 8시가 넘은 때였다. 8시면 대한민국에서는 한참 저녁 이련만, 아무래도 우리나라보다는 더 북쪽이라서인지 세비야는 오래도록 하늘이 파랗게 남아있었다. 아홉 시. 왜 아직도 검지 않냐고 물어보고 싶을 만큼 감색으로 물든 하늘을 따라 걸어 도착한 곳은 세비야 서쪽의 성벽이었다. 중세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한 구석.





 도착한 날의 세비야는, 아마도 이다음에 이어질 어느 날보다도 특별했다. 어느 한 순간을 온전히 간직하고 싶어 보셨던 분이라면,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다. 4월 3일 저녁의 세비야는, 그런 장면을 만들어줬다. 저녁 바람을 타고 은은하게 풍겨오는 아카시아 향기, 마치 박명(薄明)인 듯 옅게 물들어있는 남색의 하늘, 그 아래 자리 잡은 성벽을 물들이는 주홍색 조명. 낯선 공간을 채운 낯선 색채들이 만들어준 낯선 시간들의 한 때였다. 세비야라는 도시를 좋아하게 되는 데에는 30분이면 충분했다. 





  세비야의 밤을 물들인 색은 그랬다. 처음으로 발을 들인 여행자를 사로잡는 자태로 몸을 물들이고,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성벽의 앞으로는 호텔을, 뒤로는 민가를 두고는 아무렇지 않게 자리 잡은 성벽은 꼭 옛날이 메아리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도시에 옛날이 있었음을, 지금도 아직은 남아있음을. 그런 울림이 적신 이른 봄의 하늘이 왜 그렇게 파랬을까. 그냥, 앞으로도 왜인지 모른 채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저녁이었다.





  이틑날의 세비야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포르투에서 빗속을 여행하는 게 얼마나 고된 일인지, 그리고 톨레도에서 굳이 무리해서 여행할 필요는 없다는 걸 느낀 나는 그냥 오늘 하루 정도는 쉬기로 했다. 여행 온 지도 꽤 됐고, 세비야에서 잡은 숙소가 꽤 아늑했던 데다가, 비까지 내리고 있으니 그냥 본연의 목적인 술이나 푸자, 그런 생각이었다. 한 병에 2유로도 채 안 하는 와인 두 병에 냉동 피자 두 판. 다 해서 8유로 정도였다. 유럽은 음식점은 비싼데 마트에서 사서 먹으려면 또 싸다. 심지어 그 피자가 또 맛있다! 한국에서 먹어봤던 어지간한 피자들보다는 확실히 더 맛있다. 한 끼를 최대한 저렴하게 해결하고 싶으신 분이라면 꼭 드셔 보시길.





  와인에 취해서 잠든 지 몇 시간일까. 오후 6시가 다 되어서야 눈이 떠졌다. 비가 오니 관광은 제끼고 저녁에 플라멩고 공연이나 보러 가기로 했던 게 생각나서, 부리나케 옷 입고 나왔는데 아뿔싸. 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심지어 꽤 많이...플라멩고 공연을 보러 가기로 했던 곳은 꽤 멀었기에, 짜증부터 났다. 낡은 핸드폰으로 네비를 켜니 내 위치도 제대로 못 잡고 버벅거린다. 결국은 언제나처럼 지도를 펴고 아날로그 식으로 플라멩고 공연장까지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생 끝에 도착한 공연장은 이미 매진... 허탈함을 끌고 나와보니 또 비는 그쳐있다. 비를 뚫고 찾아온 내 고생이 순식간에 휴지조각이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나를 위로하기라도 하듯, 근처 레스토랑에서 여덟 시 반부터 플라멩고 공연을 진행한단다. 심지어 메뉴 세 가지가 15유로에 제공된다. 광대가 세비야를 덮은 먹구름을 찌를 듯 치솟으려는 걸 간신히 누르고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하니, 비 맞아서 식은 몸도 데울 겸 쉐리 와인 한 잔을 시켰다. Sweet과 Dry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기에 Dry를 골랐는데, 정말 드라이했던 점이 신기했다. 드라이 와인이 드라이하다는데 무슨 문제냐, 싶으신 분도 있겠지만 포르투에서 마셨던 포트 와인은 'Dry'여도 상당히 단 편이었단 점을 생각하면 솔직하게 드라이한 이 한 잔은 꽤 놀라웠다.





  여덟 시 반이 되자, 공연이 시작됐다. 솔직히 많은 걸 기대하고 본 공연은 아니었다. 커다란 무대에서 펼쳐지는 것도 아니었고, 레스토랑에서 하는 거니 뭐 얼마나 잘 하겠어, 하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세비야까지 와서 플라멩고 공연을 안 볼 수는 없으니, 그냥 대충 맛만 보자, 하는.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한 게 미안할 만큼, 작은 무대 위에 올라선 세 명은 진심이었다. 





  플라멩고 공연은, 한 시간 정도 이어졌다. 그 사이 세비야의 밤은 무르익어갔고, 바깥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공연이 끝나고, 무대가 작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 열정적인 연주를 보여준 셋이 퇴장했다. 훌륭했다, 는 표현은 솔직히 부족하다. 지금의 내 글과 사진으로는, 낡은 나무 바닥 위를 두들기던 남자 댄서의 탭댄스, 조그마한 레스토랑 안을 가득 메우던 여자 가수의 걸걸한 노랫소리와 빠르게 울려대던 기타, 막간 쉬는 시간에 무대 위에서 뛰어놀던 꼬마 아가씨의 함박웃음, 가게 밖에서 바람을 타고 와서 옅게 풍기던 아카시아 향기 같은 것들을 다 옮길 수 없으니, 그냥 이렇게만, 구구절절하게만 적어두자.



 


  세비야에는 또다시 밤이 찾아왔고, 하루 종일 내리던 비는 그쳐있었고, 어둠을 주홍빛으로 물들이는 가로등이 밝혀져 있었고, 주홍빛에 부딪힌 흰색 집들이 늘어서 있었고, 꽃향기가 묻은 바람이 벌써부터 여름을 알리며 마을을 두드렸고, 나는 그 안에 있었다. 밤이 너무나 밝은 4월 4일의 세비야. 내 발이 닿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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