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 마드리드, 세고비아, 톨레도
포르투를 떠났다. 나흘 동안 머물렀지만 그중 이틀 동안 비를 떨군 매정한 도시였다. 물론 아름다운 도시였고, 포트 와인은 맛있었으며,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비에 젖은 포르투의 운치는 하루면 족했는데, 이틀은 과했다. 하지만 마냥 포르투에만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을 수는 없는 노릇. 짐을 꾸리고, 다시 길을 나섰다. 다음 목적지는 마드리드. 드디어 국경을 넘는다.
마드리드까지는 야간열차로 이동하기로 했다. 22시 30분발 야간열차를 타면 8시 40분쯤 마드리드에 도착했기에, 잠은 열차에서 자고 도착하자마자 호스텔에 짐 놓고는 바로 시내 구경을 떠나기로 한 것. 꽤 괜찮은 일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열차에 올라타자마자 생각은 바뀌었다. '야간열차 = 침대 열차'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내 앞에 보이는 건 여느 버스나 기차 좌석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좌석뿐. 여기에 앉아서 8시간을 내리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눈앞이 깜깜했다. 그래서인지 잠은 잘 오더라. 어찌 됐든 계획은 성공했다고 봐야할..까?
호스텔에 짐을 풀고는 지도 한 장 챙겨서 나온 나는, 걷기로 했다. 지도를 보니 관광지들이 모여있는 편이어서 지하철을 타기에는 돈이 아깝고, 내 다리는 튼튼하다! 는 생각이었다. 덕분에 이날 밤 10시간을 죽은 듯이 잤다는 건 몰라도 되는 이야기. 하지만, 마드리드는 그만큼 생각보다 볼 게 많지는 않은 도시이기도 하다. 스페인을 와보지 않은 분들이라도 알고 계시겠지만, 사실 스페인에서 제일 핫한 관광지는 바르셀로나이고, 나머지 도시들은 거의 다 고만고만하기 때문. 그중에서도 마드리드 시내는, 정말 걸어서도 한나절이면 어지간한 곳은 다 볼 수 있다.
하지만 스페인 여행이 처음인 내게 마드리드는 어찌 됐든 꼭 들러야 하는 도시였다. 첫 번째, 스페인의 수도이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 레알 마드리드의 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러 엘 클라시코가 열리는 4월 2일을 껴서 마드리드 일정을 잡았다. 시간도 맞지 않는데다가, 결정적으로는 돈까지 없어서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경기를 직관할 수는 없었지만, 대신 마드리드 현지 팬들과 같이 즐겨보자! 하는 생각이었던 것. 결과적으로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나를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
사실 지금은 다 지난 일이니 말은 이렇게 해도, 마드리드 시내에 투자할 수 있는 날은 딱 하루뿐이었으므로 내 발걸음은 빨라지기 시작했다. 또 포르투처럼 비가 쏟아질 수도 있으니까, 최대한 많은 걸 봐야지, 봐야 할 곳은 놓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마드리드 황궁과 그 앞의 알무데나 대성당을 거쳐 솔 광장, 산미구엘 시장 등등. 끼니도 걸러가면서 밤새 제대로 자지도 못해서 퀭해진 눈으로 마드리드 시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레알팬들이 발들이길 소망하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구장까지 견학을 마치고 나니, 어느새 땅거미가 슬슬 내려앉고 있었다. 9시 즈음에 마드리드에 도착해서 10시부터 돌아다니기 시작했으니, 대충 8,9시간 정도를 걸어 다닌 셈이었다. 그래도 못 본 곳이 남아있을까 봐, 숙소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내일은 세고비아, 모레는 톨레도. 오늘은 끝났어도, 아직 마드리드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다음날 도착한 곳은 세고비아.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백설공주 성'으로 유명한 알카사르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내가 갔을 때는, 보시다시피 공사 중. 왠지 허탈했다. 나름 세고비아의 랜드마크인데, 하필이면 공사 중이라니. 포르투 갔을 때도 비만 계속 내리고. 나는 왜 이렇게 운이 없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카메라까지 말썽을 피워대는 통에, 세고비아 여행은 영 개운치가 않았다. 마드리드로 돌아가면서도 입을 삐죽 내밀고만 있었다.
그리고 톨레도. 여전히 말을 잘 듣지 않는 카메라를 데리고, 한 시간 정도 걸려 도착한 곳이었다. 세고비아도 그랬지만, 관광객이 많아도 한적한 기분이 드는 동네였다. 왠지 모르게 아늑한 느낌이 드는 성벽을 지나 들어가니, 언덕길이 나를 반겼다. 톨레도 주위를 도는 꼬마기차가 있다는 모양이지만, 이번에도 난 내 다리를 믿기로 했다. 그렇게 한 오 분쯤 걸었을까. 길 옆에 늘어선 상점들, 그중에 한 가게의 창가가 눈에 띄었다. 맥주를 팔고 있었다. 톨레도에서 만든 맥주란다. 이름은 DOMUS. 도시가 이렇게 코딱지만 한데 맥주를 만든다고? 게다가 종류가 꽤 많았다. 페일 에일, 라거, IPA, 윗 에일 등등.
아, 맞다. 나, 술 여행 중이었지. 날씨가 맑았고, 바람도 선선히 부는 날씨였다. 맥주가 맛있을 것 같은 날씨. 맛없는 맥주도 맛있어질 날씨. 이런 날 맥주병 나발을 불지 않는 건 잘못일 것만 같았다. 가격도 비싼 편이 아니었기에, 일단 한 병 샀다. Domus Sevilla Wheat Spiced Ale. 그냥 Domus wheat spiced ale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스페인이나 유럽의 도시 이름을 중간에 넣었더라.
밀맥주 특유의 부드럽고 조금은 새콤한 맛이 밀고 들어온다. 스파이스드 에일다운 짜릿한 풍미도 살아있다. 잔에 따라 마셨으면 더 맛있을 텐데. 오랜만이었다. 여행 오기 전엔 블로그에서 리뷰하느라고 매일같이 마셨는데. 그러고 보면, 어느새 여행 온 지도 2주일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다. 2주일. 벌써.
왠지, 너무 급하게 왔던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쉬어가기 위해서, 추억을 만드려고 떠난 여행인데 눈에 담기보다는 카메라에 먼저 담으려고 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톨레도에서는 남은 사진이 많지 않았다. 대신, 생각이 남았다. 여행을 왜 떠났는지, 어떻게 여행하고 있는지, 이젠 어떻게 여행할 것인지. 맥주 한 병을 평소보다 더디게 비우고 일어섰다.
맥주가 준 깨달음 때문일까, 톨레도에서 본 하늘은 유난히 파랬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카메라에 저장되어있던 사진들을 돌려 봤다. 2주간 쌓인 사진이 꽤 됐다. 그때는 몰랐는데, 사진 속에 남은 3월 31일의 마드리드도, 4월 1일의 세고비아도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렀고, 여기저기 떠있는 구름이 예뻤다. 그리고, 그 사진에는 없는 이야기가 하나둘씩 생각났다. 포르투에서는 비 때문에 사진을 많이 못 찍었어도, 귓전을 때리던 빗소리, 샌드맨 창고 안을 채웠던 서늘한 공기에 묻은 포도주 냄새가 아직도 생생하다. 마드리드의 산미구엘 시장에서 먹었던 빠에야는 좀 짜긴 했지만 맛있었지. 타파스도 먹었는데, 맥주 안주로 먹으면 딱일 것 같았어.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매표소 안내해주고 일 유로만 달라고 구걸하던 아저씨도 있었고, 세고비아에서는 길 가면서 나한테 다가와서 노래 부르면서 춤추던 애도 있었고...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하던가. 실제로, 사진은 남는다. 그래서 이렇게 내가 여행기를 쓰고 있고,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를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진은 여행을 기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지, 여행 그 자체는 아니다. 사진이 많이 남았다고 잘 한 여행이 아닌 것처럼, 사진이 안 남았다고 못한 여행도 아니다. 중요한 건, '내가'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 가봤다면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못 가본 곳은 있을 수밖에 없다. 세고비아의 알카사르 성처럼 하필이면 공사 중인 곳도, 포르투처럼 이틀 동안 비를 쏟아내는 야속한 곳도 앞으로 있겠지. 많겠지. 하지만, 그렇게 어쩔 수 없었던 때도 내 여행이니까. 덕분에 '다른' 여행이 됐으니까. 그건 그 자체로도 괜찮은 거 아닐까.
여행은 만남이라고들 한다. 내가 낯선 공간과 만나고, 그 낯선 공간에서 낯선 사람과 만난다. 하지만 내가 톨레도에서 마셨던 맥주 한 병처럼, 낯선 무언가 덕에 새로운 생각이 열리기도 한다. 그런 만남이 앞으로도 한동안은 이어질 것 같다고 생각하니, 마드리드를 떠나는 발걸음은 올 때보다 훨씬 가벼웠다. 다음은 세비야. 어떤 만남이 기다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