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quaviT Mar 30. 2016

와인이 꿈을 꾸는 곳

포르투갈 - 포르투

  포르투에서 맞는 첫 번째 아침이 찾아온 건 군대에서 전역한 후로는 처음으로 공동 숙박의 불편함을 느낀 밤을 힘겹게 이겨낸 후였다. 현재 머무르고 있는 호스텔은 8명이 한 방을 쓰는 도미토리인데, 7가지의 다른 잠버릇에 시달리다 못해 이어폰을 꺼냈지만 또 그건 그것대로 거추장스러운지라. 결국 자기는 했지만 깨어나서 이어폰을 빼자마자 들려오는 건 신명 나는 빗소리. 그렇다. 포르투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한국에 있을 때는 비 오는 날을 그렇게 좋아했었는데(사실 비 오는 날 먹는 술을 더 좋아한 것이긴 했지만), 여행을 오니 또 그게 아니다. 우산도 없고, 우산이 있어도 간수가 귀찮은데다가 젖을 곳은 다 젖는다. 어차피 내일까지 포르투에 있고 모레 떠나니 내일 날씨만 좋다면 오늘은 그냥 호스텔에서 뒹굴거려도 괜찮았겠지만, 포르투의 날씨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내일도 비, 그리고 모레도 비. 도착한 날은 날씨가 그렇게도 좋더니만, 역시 책은 열어봐야 안다.


 

 


  결국, 오늘은 나가야 한다. 호스텔에서 우산을 혹시 팔까, 해서 물어봤지만 아니었다. 근처에 우산을 파는 가게조차 없었다. 여러모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하루가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결국 따로 챙겨 온 고어텍스 외투에 아웃도어용 신발을 챙겨 신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하루를 마친 지금 와서 이야기하자면 인류의 과학은 위대했다. 비가 그렇게 쏟아져도, 외투와 신발은 물 한 방울의 침투조차 허락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방금 나온 것처럼 뽀송뽀송했다. 장기 여행을 떠나시는 분이시라면, 한 벌쯤 장만하셔도 좋지 않을까 싶다. 고어텍스 관계자 아닙니다.

 

 


  포르투의 포트 와이너리들은 모두 도우루 강(Rio Douro) 아래에 몰려있다. 혹시 지하철을 타고 도착할 때쯤이면 비가 그쳐주지 않을까 했지만, 포르투의 날씨는 여행객을 강하게 키운다. 비는 여전히 억수같이 퍼부었고, 바람까지 쌩쌩. 돌아갈까 고민했지만, 이미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에 일단 걸음을 옮겼다. 가장 먼저 들르기로 한 곳은 샌드맨(Sandeman). 1790년부터 225년째 포트 와인을 만들고 있는 와이너리다. 그냥 가면 투어를 시켜주는 게 아니라 정해진 시간이 있었으므로, 건물 앞에 설치된 바에서 포트 와인 한 잔을 시켜서 기다리기로 했다.

 


  비는 여행자에게는 좋지 않지만, 술꾼에게는 좋다. 샌드맨 와이너리의 테라스에 앉은 순간부터, 나는 여행객이 아닌 술꾼이었기에 비 내리는 포르투는 황홀경이 되었다. 고풍스러운 도시가 비에 젖어가는 광경을 포트 와인과 함께 한다는 건, 아직 접해본 게 많지 않기에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빗소리, 풍경, 그리고 와인 한 잔. 많은 게 필요치 않았다.





  샌드맨 와이너리 안은, 비가 오고 있었음에도 그다지 습하지는 않았다. 대신, 오크통이 숨을 쉬며 뿜어대는 술 냄새로 가득 차있었다. 술통으로 가득 찬 창고, 창고 안을 가득 채운 와인의 향기. 눈을 감고 있으면 또 떠오른다.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한껏 숨을 들이마셨던 그때가. 술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꼭 느껴보셨으면 좋겠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분이라도, 한 번쯤은 꼭. 




  샌드맨 와이너리 투어는 약 한 시간 정도 걸린다. 한 시간이라지만 사실 한 3, 40분 정도. 기본적인 6유로짜리 견학을 하면 두 잔의 와인이 제공되기에, 시음에도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다. 샌드맨의 와인은 특별하다는 느낌보다는, 아무래도 대중적인 느낌이 강했다. 눅진한 단맛과 함께 입 안을 채우는 포도와 꽃향기. 


  샌드맨의 견학을 마친 후에는, 테일러(Taylor)의 와이너리로 이동했다. 명색이 술 여행기인데, 한 군데만 돌아다녀서야 체면이 안 서지 않겠는가. 사실 샌드맨 주변에도 다른 와이너리가 많았음에도 굳이 테일러의 와이너리를 찾은 이유는, 일단 군생활 중에 읽은 잡지에서 테일러의 와인 설명이 너무 멋들어지게 되어있었고, 이름이 멋졌기 때문이다. 테일러 플라드게이트 빈티지 포트. 나중에 전역하면 꼭 뱃속에 넣어봐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군생활을 마쳤었는데, 그 소망을 현지에 와서 이루게 될 줄은 또 몰랐네. 그런 생각을 하며 히죽이는 내 얼굴은 금방 죽상이 되고 말았다.




  다만 테일러 와이너리로 가시고자 하시는 분들이 알아두셔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테일러 와이너리는 언덕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는 것. 걸어서 5~10분 정도 올라가야 하는데, 1. 술이 약하다, 2. 체력이 약하다, 3. 나는 언덕이 싫다. 셋 중 하나라도 해당되시는 분은 그냥 택시를 타시는 편이 나을 것 같다. 특히 비가 오고 있다면 바닥이 미끄럽기에, 한 번 넘어지기라도 하신다면 테일러의 와인에 트라우마가 생기실 수도 있다. 테일러도, 나도, 이 글을 읽는 분도 그런 경우는 원치 않으니 판단을 잘 하실 일이다.




비 오는 날, 언덕길. 이 이중고를 뚫고도 5시부터 시작되는 테일러의 와이너리 투어에는 의외로 많은 사람이 모였다. 사실 많다고 해봐야 스무 명도 채 안 되었지만. 그때는 짜증만 났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덕분에 여유 있게 투어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여행을 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이런 건 좋다. 돌아보는 습관을 들일 수 있다는 것.





  테일러의 투어를 마치면, 세 잔의 와인이 제공된다. 세 잔의 와인을 마셨지만, 기억에 남는 건 한 잔이다. 가장 오른쪽의 테일러 플라드게이트 10년. 하루가 지났지만, 저 와인이 내 입에 와닿는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 눈이 감기고, 주위의 모든 소리가 잦아든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이 하늘에서는 쏟아져 내리고, 땅에서는 솟아오른다. 그 사이에 내가 서 있다. 하늘과 땅이 맞닿는 순간에 눈이 떠진다. 황홀하다. 맛은 어떻고 향은 어떻니, 하는 설명은 너무 멋없다. 비 오는 날의 포르투, 그리고 테일러의 와인, 그 와인을 마시는 나. 여행을 떠난 이유가 적어도 한 가지는 채워졌다. 




작가의 이전글 리스본에 저녁이 내리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