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바람도 얼듯한 -15℃ 날씨, 12년 만에 다시 찾아온 폭설. 기록적 한파 뉴스가 하루가 멀다 하고 방송을 달궜던 2001년의 겨울. 상명하복 분위기가 적성에 맞지 않던 10개월 간의 방송국 다큐멘터리 막내 작가를 그만두고 기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으로(기자의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기자 아카데미란 것을 수료한 나는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여성잡지사의 인턴 상근 기자로 뽑혀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5년 여에 걸쳐 몸담은 직장 S사의 W매거진에서 내가 처음으로 배당받은 기사는 서울 시내 전설의 죽집 별책부록을 만드는 것이었다. 나름 어엿한 커리어우먼이 되었는데, 아담한 키와 학생으로 보이는 초동안(어디까지나 당시에)이 콤플렉스였던 나는 225cm 작은 발에 9cm 힐 부츠를 신고 서울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 최고의 죽집들을 찾아 폭설을 해치며 10여 일 간 취재를 다녔다. 이제 와 생각하니 혹한에 회사 차량을 예약하는 배차신청표에 적힌 전투적인 동선과 신참 기자 이름을 보고 기사님들은 한숨을 쉬었겠지만 당시 눈길이 얼마나 미끄러웠는지, 바깥공기가 얼마나 차가웠는지는 나는 1g도 생각나지 않는다. 목적지에 도착해 소복하게 쌓인 하얀 눈 속으로 뽀도독 소리를 내며 킬힐 신은 두 다리를 내딛을 때, 취재의 설렘에 눈송이처럼 환하게 미소 짓던 순수백퍼의 순간만 기억날 뿐.
그렇게 시작한 유 아 마이 데스티니, 너는 내 운명 수준의 열혈 잡지 기자 생활은 이후 한 두 번의 짧은 휴식 기간이 있었지만 3개의 매체, 두 번의 편집장을 거쳐 17년이란 인생 시즌1의 역사를 기록했다. 일상의 새롭고 유익한 것들을 가장 먼저 접하고, 그 따끈따끈한 소식을 내 관점을 담은 글과 사진으로 전달하고, 매와 같은 기자들의 눈에 포착된 엑기스 정보들을 한 달에 한 번씩 300여 페이지의 새 책자로 발행해 내는 이 정량적이며 속도감 넘치는 사이클은 진취적이고 자기 계발적인 성향과 함께 깡과 체력, 호기심을 두루 갖춘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흥미로운 직업이었다. 콘셉트에 맞는 멋진 비주얼의 화보를 만들고 정확한 기사를 쓰기 위해 취재와 자료 수집을 하며 새벽 1~2시를 거뜬히 넘기는 날이 많아도, 데드라인을 앞두고는 새벽 3~4시까지 이어지는 마감 야근이 매달 고되어도 새로 잡지가 나오면 힘들었던 기억은 어느새 사라지고 성취감과 자기 효용감이 MAX로 차올랐다.
그렇게 인턴에서 주니어, 수석 에디터를 거쳐 나름 리빙계 특종 에디터라는 수식어도 달게 된 나는 30대 중반에 중견 미디어 그룹 S사에서 발행하는 국내 대표 매거진의 편집장이 되었다. 지금이야 독립 매거진도 많고, 사회 분위기도 바뀌어 2030 어린 편집장들을 흔하게 볼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직장 내에서 최연소 편집장이 된 케이스였고, 매거진사 전체에서도 나름 파격적인 시도의 시초였다고 기억한다.
내 일을 사랑하고 자부심을 느끼던 나는
왜 번아웃 블랙홀에 빠진 워커홀릭이 되었는가
라떼는 말이다 같지만 불과 10~20년 전까지 매거진의 위상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레거시 미디어인 전통 4대 매체(신문, 방송, 잡지, 라디오)가 한국의 미디어 산업을 폭풍적으로 성장시키던 1990년대~2000년대, 월간 종합여성지는 연예계·정치계 소식부터 패션·뷰티·인테리어·요리·문화예술 등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소식을 전하고 트렌드를 이끄는 가장 핫하고 빠른 창구이자, 월 광고수익만 십억 원 이상을 올리는 영향력 있는 매체였다. 종합여성지는 크게 연예팀, 생활팀으로 나뉘었는데(이름이 조금씩 바뀌었지만 지금도 비슷한 구분이다) 나는 생활팀, 즉 의식주 전반의 '잘 먹고, 잘 사는' 이슈를 다루는 기자였다. 예쁜 찻잔 고르기부터 각질 없이 깨끗한 꿀피부 만드는 팁, 거실 소파 선택하기, 날씬한 여름휴가를 위한 다이어트 운동법 연재 같은 칼럼을 지나 매거진에서 가장 난이도가 있다는 연예인 화보, 스타 집 개조 프로젝트, 인테리어 화보, 국내외 최고의 전문가와 기업인들을 만나는 인터뷰 및 매해 각 분야 트렌드를 전망하는 기획 특집 등 분야를 넘나들며 다양한 라이프스타일 콘텐츠를 만드는 베테랑 에디터가 되었다. 국내 리빙 매거진의 원조격인 L매거진에서 편집장이 되고 난 뒤, 나는 출퇴근 시간마저 아까워 맹자 엄마 레벨의 심정으로 집까지 회사 코 앞으로 옮기며 내가 만드는 잡지에 올인했다.
한 달에 보름은 두세 시간만 자며 잡지 마감을 기본으로 기업·기관들과의 콘텐츠 비즈니스를 동시에 진행하던 혹독한 시기가 어느 정도 지날 무렵 미디어 업계에는 디지털 퍼스트를 외치는 지각 변동이 대대적으로 찾아왔다. 회사마다 신규 사업팀이 만들어지고 디지털 대전환의 물결이 일어났는데, 어느날 갑자기 나는 새롭게 만들어진 디지털 사업팀의 콘텐츠 팀장으로 발령받아 신규 콘텐츠 사업을 이끌게 되었다. 당시 미디어 업계를 나는 디지털이라는 깃발 하나만 보고, 모두 노아의 방주로 맹목적으로 달려가던 대혼돈 카오스의 시기로 기억한다. 아무튼 난 '사내 벤처'라는 멋진 수식어가 붙은 팀에서 새롭게 주어진 일에 대해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이전보다 더 많은 양의 연료를 쏟아부어 사명감이란 불을 지폈고, 나름대로 일당백 포지션으로 팀을 꾸리고 팀원들과 함께 새로운 시대의 관점에 맞는 다양한 사업들을 회사에 제안했다. 그러나, 야심 찬 아이템들(콘텐츠 커머스를 기반으로 한 온라인 인테리어 사업, 온라인 클래스 사업 등)은 대부분 논외의 대상이 되었고(이후 같은 종류의 아이템으로 시작해 현재는 유니콘이 된 스타트업 기업들도 꽤 있다),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매출에 대한 압박과 함께 신규 사업팀의 방향성이 매체의 광고 수익을 서포팅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우리 팀은 기존 매거진 콘텐츠를 활용하는 페이스북 매체 창간과 매거진사의 주요한 수익원인 브랜드 콘텐츠 제작 업무를 주되게 진행하게 되었다. 처음 신규 사업팀을 만든 목적과는 뭔가 다르게 흘러갔으나 이목이 쏠린 부서인지라 성과에 이름을 올릴 인원 초과의 뱃사공들 사이에서 매번 길을 잃거나, 그 반대의 경우라면 모든 책임을 떠안고 표류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들과 마주했다. "유익한 콘텐츠를 생산함으로써 세상에 이로운 일을 하고 있다"는 기자로서의 사명감과 효능감은 점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고, 극심한 번아웃과 함께 몸과 마음이 매일 사막처럼 타들어 가는 듯했다.
미워도 다시 한번
그런데 나, 이대로 계속 살아도 될까?
그토록 좋아하고 늘 확신에 차 있던 일이었는데, 어떻게 이 숙제를 풀어야 할까? 고민의 나날을 보내며 뼈를 묻을 것만 같았던 회사로부터의 퇴사를 결심했다. 마침 그 시기 해외 라이선스 매거진 M사의 한국판 편집장 제의가 왔다. 유럽에서 발행되는 매거진 M은 예술적 퀄리티와 독창적 감각으로 탄탄한 팬덤을 보유한 잡지로 나 역시 매호가 발행되면 수입상을 통해 발 빠르게 구입하고 참고하는 좋은 매거진이었다. 이전 몸 담았던 매체와는 상대적으로 규모는 작지만 해외 본사처럼 한국에서도, 매거진으로 순수 콘텐츠를 발행하고, 연관된 다채로운 문화예술사업들을 온오프라인으로 전개하며 콘텐츠 비즈니스를 확장할 수 있겠다는 판단으로 이직을 했다. 이 무렵 디지털 미디어를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도 진학했다. 나름대로 다양한 시도와 노력을 했지만 이미 대형 플랫폼 기업들이 나타나 대세로 자리 잡았고, 국내 잡지 시장은 위축되어만 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인디펜던트 문화를 추구하며 인쇄 매체 중심으로 경영되던 회사 분위기도 매달 급격히 달라졌다.
디지털 미디어 사업이란 초기 투자 비용은 물론 콘텐츠 생산, 구축, 운영에 시간과 인력이 상당히 요구되는 작업이다. 자본력과 인내심이 있어야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고, 가능성이 보이는 사업에 지속적인 투자와 유지, 관리가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국내 디지털 미디어 산업 구축의 히스토리가 10여 년에 접어드는 지금 기존 레거시 미디어사 중 거대 방송사와 신문사를 중심으로 사업이 성공했고, 실패도 경험이라는 역량으로 쌓아 꾸준히 콘텐츠를 만들어온 몇몇 매거진사가 살아남은 사례들이 이를 말해준다. 새로운 길을 만든 모든 성과에 존경을 표한다.
미디어 산업이 디지털 중심으로 전환되며 양질의 콘텐츠란 개념도 빠르게 달라졌다. 0.5cm의 미세한 간격까지 조정해 세팅의 퀄리티를 높여 찍던 화보들과 공들여 탈고해 완성한 글, 두세 번 감리를 본 뒤에야 윤전기를 돌려 발행하던 꼼꼼한 인쇄 제작 프로세스의 자부심은 일 수량 7~9개, 오전오후 몇몇 시간대 업로드라는 속도감과 물량, 휘발성 있는 쿨하고 짧은 워딩의 사용 등 시대가 원하는 기준과 미덕으로 변화해 갔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정보를 기다리지 않았다. 매일 수 없이 많은 새로운 정보가 디지털에 실시간 쏟아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상이 바뀌는 중이던 2019년 가을 어느 날도 나는 새벽까지 월간지 마감을 하고 있었다.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제대로 된 특집 취재나 잡지의 꽃이라 부르는 화보는 그달도 부족했고, 비수기인 여름이라지만 광고팀과의 회의 분위기는 자주 싸늘한 데다 안건이 없으니 횟수도 점차 줄던 시기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란 말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콘텐츠에 대한 소신과 편집장으로서의 직업윤리를 지키며 끝까지 최선을 다하리라는 고집스러운 신념으로 마감을 이어갔다. 모두 퇴근한 새벽 시간, 눈이 빠지게 대지를 들여다보며 홀로 마감을 하던 나는 순간 5000k 태양광과 같은 형광등 100개가 머릿속에 동시에 켜지는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 뭘 만들고 있는 거지?" "콘텐츠가 뭐지?" "좋은 콘텐츠는 또 뭐지?" "내 직업의 최고 가치를 두었던 창작과 생산의 의미는 어디로 갔을까?" "그나저나 올해 몇 년도지? 수 백 권의 잡지, 수 십만 페이지의 책을 만드는 동안 내 청춘이 지나갔어. 나는 무슨 일을 잘하는 사람이고, 내 인생은 지금 어디쯤에 와 있는 것일까?"
'세상을 이롭게 하는 콘텐츠 생산자'라 늘 자부했는데, 견고한 시스템에 오류가 난 듯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나=일, 나=기자, 나=매체', 뼛속까지 잡지쟁이라 생각했던 아이덴티티가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좋아하던 잡지를 만드는 일이 더 이상 즐겁지 않게 된 이유와 마주하게 되자 나를 벅차게 했던 사명감과 열정의 곳간이 텅 비워졌다. 오랜 에디터 생활과 두 매체의 편집장, 인쇄와 디지털, 가업·기관들과 함께 한 다양한 콘텐츠 비즈니스들. 매거진에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은 다 했다. "내가 매거진에서 더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나, 이대로 계속 살아도 될까?"
매달 루틴처럼 마감 하루 전날 써왔던 편집장 레터를 써야 하는데 단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무엇보다 스스로 나의 일과 삶에 대해 다시 정의를 내려야 했다. 마지막이 될 호의 편집장 레터를 힘겹게 몇 글자 쓰고, 담담하게 퇴직서를 썼다. hwp 문서를 열었을 때, 깜빡이는 빈 커서를 보며 잠시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일을 통해 인정을 바랐던 걸까, 명함이 주는 힘을 버리기 두려웠던 걸까. 모두 내려두고, 마음이 가는 곳으로 걸어보자.' 운명처럼 사랑했던 매거진. 청춘을 뜨겁게 보내고, 행복하게 성장했던 곳. 안녕, 나의 시즌1.' 불 꺼진 사무실 뒤로 또각또각 킬힐 소리가 하울링처럼 귓가를 울리다 사라졌다.
정말 좋아하는 일로 평생직장 찾기
그로부터 2년 후 M매거진 한국판은 폐간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오랜 세월을 보낸 다른 매체 두 곳은 규모가 작아졌지만 여전히 파이팅 중이다. 최근 몇 년여간 그 밖의 많은 잡지가 폐간되었지만 새로운 형태로 창간된 매체도 많고 많은 우려처럼 매거진 산업은 종말 하지 않았다. 그사이 국내 디지털 미디어 산업은 탄탄히 자리를 잡고 매일 무서운 속도와 양으로 기사들을 쏟아낸다. 그런가 하면 종이책도 종이책대로 디지털 출판 시장을 구축하고 출판 산업의 질서를 새롭게 갖추어 가고 있다. 바뀐 세상에서 좋은 콘텐츠에 대한 정의는 저마다 다르고, 정답이 있다면 사랑받는 콘텐츠일 것이다.
퇴사 후 나는 독립 콘텐츠 제작사를 오픈했다. 대전환의 시대, 평생직장으로 나를 셀프 고용 self engagement 하고 프리 에이전트 free agent로 살아보기로 했다. 내 이름을 건 콘텐츠 스튜디오 ILA CONTENTS LAB을 2020년 7월 오픈하고, 기업과 지역을 알리는 콘텐츠를 제작하는 일을 한다. 지역 그러니까 로컬의 일을 하는 파트는 ILA CONTENTS LAB의 프로젝트 브랜드 '로컬렉티브 LOCALLECTIVE'로 따로 만들어 운영 중이다.
로컬은 매거진에 있으면서 접한 다양한 분야 중 내가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꾸준히 흥미를 갖게 되는 분야였다. 도시에서 더 이상 새로움을 찾지 못했을 때, 모든 것이 새롭고 살아 숨 쉬는 것들로 가득했던 로컬은 기자 시절 자주 나의 취재 아이템이 되어 왔던 주제다. 전국의 숨어있는 장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지역만의 고유한 로컬 컬처와 건강한 식문화, 스토리가 있는 장소 등을 부지런히 소개했다. 국내뿐 아니라 모범적인 로컬 브랜딩 사례로 사랑받는 해외의 소도시들에도 관심을 갖고 취재를 다니며, 지역 가치를 알리는데 보람을 느꼈다. 뼛속까지 시크한 도시인이라고 생각했지만 휴식이 필요할 때면 늘 찾았던 곳도 복잡하고 번쩍이는 도시가 아닌 자연과 사람의 정이 있는 로컬의 안온한 품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앞으로의 라이프스타일과 자부심을 느낄 일을 로컬에서 찾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내 삶의 밭을 건강하게 가꾸는 행복, 라이프파머
로컬 출판 프로젝트 <GangJin Forest> Ⓒlocallective
그렇게 시작한 로컬렉티브의 프로젝트는 단행본 발행, 영상 제작, 전시, 아카이빙, 컨설팅 등으로 2년 동안 제법 콘텐츠가 쌓였다. 좋아하는 음악, 영화, 애장품처럼 '로컬을 콜렉트 한다'는 의미의 '로컬렉티브'는 지역의 우수한 자원을 발굴하고, 이를 매력적이고 유익한 오늘의 콘텐츠로 만들어 온오프라인에서 다양하게 확산하고 소통하는 것을 가치로 둔다. 작업을 할 지역을 선정할 때는 우수한 자원이 많지만 아직 제대로 발견되지 않은, 또 사람들의 관심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지역을 우선순위로 두려고 한다. 로컬의 보석 같은 자원을 알리는 것은 한 가지 방식에 국한하지 않는다. 다양한 플랫폼을 활용한 콘텐츠로 제작될 수도 있고, 이색적인 협업과 색다른 관점으로 지역을 스토리텔링하고, 이를 통해 지역 홍보는 물론 지역이 가진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실험과 도전 정신으로 콘텐츠를 풀어가며 벌써 2년 반이 지났다. 밥벌이와 좋아하는 일이 완벽하게 일치할 순 없지만 그 간극을 최대한 좁혀 가는 것이 일차적 목표다. 업무와 근로 환경이 바뀌었지만 내가 콘텐츠를 사랑하고 크리에이티브한 방식으로 제작하는 사람이라는 아이덴티티는 변함없다. '전문성을 좋아하는 분야에 접목해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보자'는 것이 앞으로의 지속가능한 라이프스타일을 위한 일에 대한 나의 모토이다.
"지나온 시간은 이런저런 일들을 극복해 온 시간이기도 하다. 싫어진 일이 있어도, 뭐 어떻게든 되겠지, 여기게 하는 토대, 이것이 세월이라는 것일까." _ <이제 아픈 구두는 신지 않는다> 마스다미리 저
주말 일요일 아침, 아무도 없고 볕이 잘 드는 카페 자리에 앉아 좋아하는 작가 마스다미리의 책을 펼쳤다. 가볍게 마음을 툭 건드리고 가는 그녀의 문장에 걸어온 풍경들이 잠시 지나간다.
언제부턴가 나는 한 몸과도 같던 힐을 신지 않는다. 아픈 구두는 더 이상 신발장의 맨 앞줄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자유로워진 발과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전국을 누빈다. 사라지기 전 기록해야 할 것들을 찾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고, 내가 만드는 콘텐츠가 유익하게 쓰일 수 있도록 오늘도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아름다운 우리 산하를 걷는다.
그토록 바랐던 지속가능한 삶은 사실 내 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게 해 준 건 아픈 구두에서 내려와 맨발의 감각으로 느끼는 살아 숨 쉬는 대지로부터였다. 이제 나는 이전보다 단단해진 인생이란 토양 위에서, 내 삶을 사계절 건강하게 경작하고 풍성한 수확도 나누고 싶은 행복한 라이프 파머 LIFE FARMER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