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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사랑 Jan 20. 2021

운전에 영어가 필요할 줄은 몰랐지.

캐나다에서 6개월 지내려면 차를 빌려야 할 거라 했다. 땅덩이가 넓고 대중교통도 좋지 않아서 차가 있는 게 편할 거라고. 일주일에 2-3번씩 캐나다 학교에 출근을 하려면 더더욱. 외국인 비지터 신분으로 자동차를 빌리려니 보험료가 장난이 아니다. 잠시 고민하다 차를 렌트하기로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비용만 걱정했지, 운전 하나에 이렇게 버라이어티 한 영어가 필요할 줄은 몰랐다.


렌터카에 처음으로 주유하던 날. 한국에서 셀프주유했던 경험을 살려 자신 있게 주유를 하려는데, 웬일인지 주유가 시작되자마자 끝나버렸다. 아무리 주유건의 손잡이를 눌러도 기름이 나오지 않는다.

'아, 진짜... 주유만 조용히 하고 가고 싶었는데. 영어 하기 싫은데ㅜㅜ'

결국 주유소 직원에게 말을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이게 내 돈만 받아가고 기름을 안 준다고.ㅎㅎ 한참 기계를 살펴보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청년.


"너 20센트 주유한 거야?"


20불어치 주유를 하려면 $20.00을 눌러야 하는데 숫자 20만 눌렀더니 $00.20가 된 거다. '오 마이 굿니스... 쏘리... ' 구구절절한 이 사연을 영어로 설명하려니 말이 안 나온다. 첫 주유부터 내 생각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어느 날은 자고 일어났더니 차가 방전됐다. 어제 퇴근하고 라이트를 켠 채로 시동을 껐나 보다. 방전된 차보다 당장 전화를 걸어야 할 곳들이 줄줄이라 걱정이다. 연수 멘토에게 상황 설명을 하고, 보험회사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그리고 학교 비서에게 출근이 늦을 거라고 말해야 한다. 전화영어는 손짓, 표정, 입모양, 무엇보다 내가 가진 영어 스킬 중 가장 중요한 스킬인 '눈치'가 잘 통하지 않는다. 상대방 번호를 누르기까지 긴긴 심호흡이 필요하다.


길거리에 주차하면서 주차 기계에 돈을 지불하는 것도, 다소 복잡한 주차 안내판을 읽는 것도, 영어 내비게이션을 듣는 것도 하나하나 챌린지다. 톨게이트를 통과한 적도 없는데 톨비 고지서가 날아온다. 알고 보니 한국처럼 톨게이트가 따로 있는 게 아니란다. 차가 지나가면 카메라가 번호판을 찍어서 고지서를 보낸다고 했다. 글로 쓰면 '알고 보니' 하나로 다 설명되는 일인데, 이렇게 '알고 보니' 하기까지 얼마나 머리 복잡한 영어로 묻고 또 물어야 했는지. 차를 버리고 싶은 날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 그냥 운전만 얌전히 하고 싶은데 여기저기 전화할 일, 물어볼 일, 도움 요청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그러나 정말로 멘털이 나갈 뻔했던 일은 따로 있다. 출근 준비가 늦어진 어느 날, 부랴부랴 차에 타서 시동을 걸고 시계를 보는데, 시간이 아슬아슬하다. 조금만 빨리 달려보면 지각을 면할 수 있을 것 같은 시간이다. 서둘러 핸들을 꺾었다. 빨간 신호에 걸릴 때마다 발 동동 구르며 급하게 학교로 향했다.


그런데 옆 차 낌새가 이상했다. 뭔가 무척 성난 듯한 움직임이다. 급하게 운전하느라 내가 무슨 실수를 했을까? 잔뜩 화가 난 장발의 외국인 아저씨가 차에서 내려 내 차로 다가온다.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렌터카 보닛을 주먹으로 쾅쾅 치더니 쏼라쏼라 영어로 욕을 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할 새도 없이 몸이 얼어버렸다. 아저씨와 눈이 마주친 채로 한참 욕을 들었다. 말로만 듣던 Road Rage를 내가 당하다니.


'한국에서 만났으면 너 진짜 죽었다.'며 센 척으로 마음을 달래는데 핸들을 잡은 손이 벌벌 떨린다. 학교에 출근해서도 '나 방금 이런 일 있었다'며 콩닥거리는 마음을 함께 진정시킬 사람이 없다. 수다는 즐거우려고 떠는 건데, 영어로 떠는 수다는 아직은 공부다. 영어로 상황 설명을 하려니 마음이 더 콩닥댈까봐 그만 두었다.


사람 사는 곳 역시 다 똑같다. 영어 욕까지는 아니어도 화내는 영어는 좀 배워둘 걸 그랬다. 영어를 배울 때는 평범하고 친절한 영어만 배우는데 어디 인생이 그런가. 컴플레인하고, 따지고, 변명하고, 싸워야 할 때도 많다. 그때야말로 쏼라쏼라 세 보이는 영어 한 방이 필요하다. 캐나다에서 운전 한 번 하려다 영어로 서바이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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