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맙스(MOPS)라는 젊은 엄마들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어린아이를 둔 엄마들이 모여서 육아, 부부생활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다. 그 날은 아들 육아에 대해 이야기하는 날이었다.
아들만 넷을 키우는 엄마가 '말해 뭐해'라는 표정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그녀의 비범한 아들 육아 에피소드에 아들 가진 엄마들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딸만 둘인 나랑은 먼 이야기라며 건성으로 듣는데, 한 문장이 귀에 와서 꽂혔다.
"내 아들이 나를 통해서 자비(Mercy)가 무엇인지 배우기를 바랄 뿐이야."
그녀의 말을 들으니 첫째 딸이 세네 살쯤 되었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어느 날 딸아이가 "엄마, 화내지 마." 하며 내 손을 끌어당겼다. 거실로 나가보니 애지중지 키우던 채소 새싹이 모조리 엎어져있다. 모종 크기가 되어 땅에 심길 때까지 정성을 다해 키우던 것을 딸아이가 몽땅 쏟아버린 것이다.
혼날까 봐 잔뜩 얼어서 연신 미안하다는 딸아이를 혼낼 수가 없었다. 그저 매일매일 정성을 쏟아 기르던 것이 망가져 속상할 뿐이었다. 깊은 한숨을 꾹 눌러 삼키고 "어쩔 수 없지, 괜찮아" 하고 쏟아진 흙을 치우는데 아이가 내 목을 끌어안고 말했다.
"땡큐, 마미."
"뭐가?"
"Because you show me mercy!"
(왜냐하면 엄마가 나한테 자비를 보여줬잖아.)
딱히 그렇게 크고 훌륭한 생각을 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는데, 아이는 용서받았다는 사실이 꽤 행복했나 보다. 크게 혼이 날 줄 알았는데 화내거나 짜증 내지 않는 엄마에게 감동받은 것 같았다.
자비.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 또는 그렇게 여겨서 베푸는 혜택을 말하는 단어다. 자식의 어떠함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엄마의 용납, 그리고 그 용납을 경험하며 자란 아이. 그런 아이는 자기 자신이 사랑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며 스스로를 존중하는 아이로 자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넉넉한 마음은 내가 아닌 남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아이로 자라게 해 주겠지.
하지만 아무리 부모라 해도 아이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에 자비를 보여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아들이라서, 딸이라서가 아니라, 부모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작년 여름, 한국 천안에서 여행용 캐리어에 갇혀 생을 마감한 아이가 있었다. 아이가 게임기를 고장 냈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 그 이유였다. 아이가 캐리어에 갇혀 소변을 보자 엄마는 반성하지 않는다며 더 작은 캐리어에 아이를 옮겨 가두었다. 갇혀있던 아이가 실밥을 풀어 손가락을 내밀자 아이를 캐리어에 가둔 채 올라가 밟았고 숨을 쉴 수 없던 아이는 결국 사망했다.
물론 그 여자처럼 아이를 생체적 죽음에 이르게 하는 비정상적인 부모는 흔치 않다. 그러나 정도가 다를 뿐, 자녀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감정적 죽음에 이르게 하는 부모도 분명히 있다. 나 역시 용납보다는 율법을 내세울 때가 있다. 끌어안아주기보다 몰아세울 때도 있다.
엄마가 자비를 보여주었다며 내 목을 끌어안고 행복해하던 딸을 생각하며 다시 다짐한다. 물질적으로는 크게 물려줄 것 없는 부모지만, 아이의 모습 그대로를 용납하고 용서하는 부모가 되어주어야지. 엄마에게 받은 그 자비의 경험이 내 아이 인생의 저력이 되어주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