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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사랑 May 20. 2021

엄마의 용납을 먹고 자라는 아들

캐나다에서 맙스(MOPS)라는 젊은 엄마들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어린아이를 둔 엄마들이 모여서 육아, 부부생활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다. 그 날은 아들 육아에 대해 이야기하는 날이었다.


아들만 넷을 키우는 엄마가 '말해 뭐해'라는 표정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그녀의 비범한 아들 육아 에피소드에 아들 가진 엄마들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딸만 둘인 나랑은 먼 이야기라며 건성으로 듣는데, 한 문장이 귀에 와서 꽂혔다.


"내 아들이 나를 통해서 자비(Mercy)가 무엇인지 배우기를 바랄 뿐이야."


그녀의 말을 들으니 첫째 딸이 세네 살쯤 되었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어느 날 딸아이가 "엄마, 화내지 마." 하며 내 손을 끌어당겼다. 거실로 나가보니 애지중지 키우던 채소 새싹이 모조리 엎어져있다. 모종 크기가 되어 땅에 심길 때까지 정성을 다해 키우던 것을 딸아이가 몽땅 쏟아버린 것이다.


아이와 함께 심었던 채소 씨앗. 한인마트가 없으니 봄이면 한국 채소 씨앗을 심어 싹을 틔우는 것이 나름대로는 연중행사다.


혼날까 봐 잔뜩 얼어서 연신 미안하다는 딸아이를 혼낼 수가 없었다. 그저 매일매일 정성을 쏟아 기르던 것이 망가져 속상할 뿐이었다. 깊은 한숨을 꾹 눌러 삼키고 "어쩔 수 없지, 괜찮아" 하고 쏟아진 흙을 치우는데 아이가 내 목을 끌어안고 말했다.


"땡큐, 마미."

"뭐가?"

"Because you show me mercy!"

 (왜냐하면 엄마가 나한테 자비를 보여줬잖아.)


딱히 그렇게 크고 훌륭한 생각을 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는데, 아이는 용서받았다는 사실이 꽤 행복했나 보다. 크게 혼이 날 줄 알았는데 화내거나 짜증 내지 않는 엄마에게 감동받은 것 같았다.




자비.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 또는 그렇게 여겨서 베푸는 혜택을 말하는 단어다. 자식의 어떠함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엄마의 용납, 그리고 그 용납을 경험하며 자란 아이. 그런 아이는 자기 자신이 사랑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며 스스로를 존중하는 아이로 자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넉넉한 마음은 내가 아닌 남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아이로 자라게 해 주겠지.


하지만 아무리 부모라 해도 아이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에 자비를 보여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아들이라서, 딸이라서가 아니라, 부모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작년 여름, 한국 천안에서 여행용 캐리어에 갇혀 생을 마감한 아이가 있었다. 아이가 게임기를 고장 냈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 그 이유였다. 아이가 캐리어에 갇혀 소변을 보자 엄마는 반성하지 않는다며 더 작은 캐리어에 아이를 옮겨 가두었다. 갇혀있던 아이가 실밥을 풀어 손가락을 내밀자 아이를 캐리어에 가둔 채 올라가 밟았고 숨을 쉴 수 없던 아이는 결국 사망했다.


물론 그 여자처럼 아이를 생체적 죽음에 이르게 하는 비정상적인 부모는 흔치 않다. 그러나 정도가 다를 뿐, 자녀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감정적 죽음에 이르게 하는 부모도 분명히 있다. 나 역시 용납보다는 율법을 내세울 때가 있다. 끌어안아주기보다 몰아세울 때도 있다.


엄마가 자비를 보여주었다며 내 목을 끌어안고 행복해하던 딸을 생각하며 다시 다짐한다. 물질적으로는 크게 물려줄 것 없는 부모지만, 아이의 모습 그대로를 용납하고 용서하는 부모가 되어주어야지. 엄마에게 받은 그 자비의 경험이 내 아이 인생의 저력이 되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가 실수로 엎었던 화분들. 생각해보면 나뿐만 아니라 함께 가꿨던 아이도 꽤나 속상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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