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

고대의 싱크탱크

by HJ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

나일강 전방,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 위치한 한 섬이 존재하는데, 사람들은 그 섬을 파로스(Pharos)라고 칭한다. 그 섬은 뱃고물에 강한 순풍을 받아 하루 종일 항해해야 도달할 수 있는 거리이다. 그곳에는 좋은 정박지를 갖춘 항구가 있으며, 사람들은 검은 물을 길어 올린 후 자신들의 균형 잡힌 선박들을 공해로 출항시킨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는 파로스 섬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섬은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가 신들에게 합당한 예물을 바치지 않아 20일 동안 억류되었던 장소로 묘사된다.


호메로스는 파로스 섬을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닷속 아이깁토스(나일강) 강 어귀 앞의 섬"으로 묘사하며, "매서운 순풍이 부는 날 빈 배가 하루 종일 항해해야 도착할 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라고 표현한다. 이 섬에는 "훌륭한 정박지를 갖춘 항구"가 있어, 뱃사람들이 "검은 물을 길어 올린 후" 균형 잡힌 배를 바다로 띄울 수 있었다. 여기서 '검은 물'은 여름에 깊어 바닥이 보이지 않던 마레오티스 호수(Lake Mareotis)의 신선한 물을 의미했다.

오늘날 지도상 알렉산드리아의 위치

알렉산드리아는 고대의 유명한 항구도시였다. 이곳은 고대 세계의 문화적, 지리적, 지성적 중심지로서, 그 신비롭고 깊은 매력으로 오랫동안 학자, 정치가, 상인, 피난민 등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당시 고대 세계 최대 규모의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이 있었다.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은 이집트에 도착하여 나일강 삼각주 서쪽, 마레오티스 호수와 지중해 사이의 땅이 도시 건설에 가장 적합한 장소임을 직감했다. 그는 이곳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를 세웠다. 플루타르코스와 아리아누스의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더는 이 부지 선정과 도시 계획에 남다른 열정과 세심함을 보였다. 특히 그는 에테시안이라 불리는 지중해 북서풍의 방향에 맞춰 거리를 배치해, 도시 건물들 사이로 바람이 통과하도록 했다. 여름에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따스하고 쾌적한 지중해 기후는 이곳 도시민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했을 것이다.


실제로 고대 세계에서 알렉산드리아는 매우 건강하고 쾌적한 도시로 알려졌다. 남쪽에 위치한 마레오티스 호수는 나일강의 수많은 운하를 통해 도시에 신선한 물과 식량, 기타 물품을 공급했다. 특히 도시 앞바다에 위치한 파로스 섬은 항구와 가까워 편리한 정박지를 제공했다.


이 섬에는 소스트라투스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위해 백색 대리석으로 건설한 거대한 파로스 등대가 있었다. 이 등대는 30마일(약 60km) 밖에서도 보일 만큼 웅장했으며,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혔다. 등대는 위험한 암초와 얕은 수심을 피해 선박이 안전하게 항구로 진입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좌)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마르턴 판 헤임스케르크가 묘사한 파로스, (우) 오스트리아의 미술사학자 요한 베른하르트 에를라흐의 『역사적 건축의 계획』 (1721)


항구 로키아스 곶 근처에는 학문의 중심지인 무세이온(Museum, Μουσεῖον)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무세이온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고대 아테네에 설립했던 학교를 벤치마킹했을 뿐 아니라, 이에 연구소 개념을 더한 시설이었다. 이곳은 학자들을 위한 덮개 있는 산책로, 토론 공간(exedra), 그리고 공동 식당을 갖추고 있었다. 무세이온은 초기 프톨레마이오스 왕들의 후원,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와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다. 기원전 283년경에는 약 30~50명의 학자들이 왕실로부터 급여, 세금 면제, 그리고 왕궁 구역 내의 무료 숙식을 제공받으며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


무세이온이 연구 기관 및 학교였다면, 대도서관은 장서 보관 시설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서적 보관소를 넘어 문화 제국주의의 전초기지이자 지식 생산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파레론의 데메트리오스(Demetrius of Phaleron)가 알렉산더의 뜻에 따라 도서관 설립을 주도했으며, 이는 헬레니즘 세계 전역에 융합적인 헬레니즘 문화를 확산시키려는 마케도니아 통치자들의 이해관계와도 일치했다. 도서관은 히타이트와 아시리아의 인상적인 고대 기록 보관소와 바빌로니아의 거대한 도서관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세상의 모든 저작물을 수집하려는 '수집광'적인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각 구역을 나타낸 지도

도서관의 장서 대부분은 파피루스에 기록된 두루마리 형태였으며, 칼리마코스(Callimachus)가 약 12만 개의 시와 산문 두루마리를 수록한 세계 최초의 주제별 도서 목록인 피나케스(Pinakes)를 만들었다. 도서관은 지적 재산권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는데,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Ptolemy III Euergetes)는 전 세계 군주들에게 책을 빌려 원본을 보관하고 복사본을 돌려주었으며, 항구를 지나는 선박에서 책을 몰수하여 도서관에 보관하기도 했다.


도서관은 또한 초기에 유클리드(Euclid),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os) 등 수학과 자연 과학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학자들의 활발한 활동 공간이었다. 아르키메데스는 부력의 원리와 아르키메데스 나사를 발명했고,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의 둘레를 정확히 측정했으며, 아리스타르코스는 코페르니쿠스보다 1800년 앞서 태양 중심설을 제안했다. 도서관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지식에 대한 탁월한 접근성을 통해 문명 세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소설 속 이레네의 아버지 아르마투스는 이곳 도서관에서 독서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카파도키아에 작은 마을 도서관을 만들었다.


시련과 몰락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제국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로마 상인들이 정착하고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도시를 시찰했다. 루쿨루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클레오파트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등 로마의 주요 인물들이 다양한 이유로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했다.


기원전 4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가 클레오파트라의 형제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의 전투 중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을 때, 인근 창고에서 발생한 화재로 도서관 내 수천 권의 두루마리가 소실되었다. 일부 고대 자료는 대도서관 전체가 불탔다고 주장하지만, 카이사르 본인의 기록은 주로 항구의 선박과 창고가 불탔다고 언급했다. 역사가 스트라보의 목격담 또한 도서관의 파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어 파괴 규모에 대한 학술적 논쟁이 있다. 이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페르가몬 도서관의 20만 권을 클레오파트라에게 선물했다고 전해진다. (어쨌든 화재가 났던 것은 분명하다..)


로마 시대로 접어들면서, 알렉산드리아는 정치적 불안과 유대교, 기독교, 그 밖의 종교들이 뒤섞여 다양한 교리적 충돌로 혼란을 겪었다. 기원전 1세기 초부터 도서관은 혁신적인 연구보다는 보존적 학문에 치중하게 되었고, '알렉산드리아식'이라는 단어는 편집과 교정을 의미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번영은 점차 쇠퇴했으며, 도서관의 명성도 함께 저물었다.


서기 3세기에는 카라칼라 황제가 도시를 약탈했고, 서기 391년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와 테오필루스 총대주교의 선동으로 세라페이온 도서관(인근 '세라페움' 신전 내부에 위치한 대도서관의 분관)의 많은 책들이 불태워졌다. 최종적으로 서기 641년 아랍의 이집트 정복과 함께 알렉산드리아는 쇠퇴했으며, 도서관은 이전의 모습을 잃었다. 이 시기 칼리프 오마르(Omar)가 알라의 책과 일치하지 않는 책들은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남아있던 책들이 공중목욕탕의 연료로 6개월간 사용되었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전설로 남아있지만, 이미 서기 4세기말까지 알렉산드리아의 주요 도서관들은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대의 싱크탱크

알렉산드리아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싱크탱크', '대학원', '천문대', '도서관', '실험실'의 기능을 모두 수행하는 복합적인 모델을 제공했다. 무역과 사람, 사상의 교류가 활발했던 이 도시는 다양한 신들이 숭배되고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와 인도의 불교, 힌두교의 사상적 도전에 직면해 여러가지 신학적 논쟁을 벌이던 종교적 중심지이기도 했다. 심지어 신플라톤주의가 알렉산드리아에서 탄생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세계인의 기억 속에 단순히 고대 유적으로 남아있지 않다. 아무도 직접 가보지 못한 그 장엄한 전설 속의 공간은 국제주의, 비판적 질문, 자유로운 탐구와 같은 가치들로 현대 지성인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남아있다. 오랜 옛날 그곳에서 많은 이들은 등불을 밝히고, 파피루스를 더듬거리고, 텍스트의 바다를 유영하며 자신들의 좁은 세상을 확장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집트 정부는 유네스코의 후원 아래 초현대적인 비블리오테카 알렉산드리나(Bibliotheca Alexandrina)의 재건을 통해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2002년 개관한 '비블리오테카 알렉산드리나(Bibliotheca Alexandrina)' 도서관, 알렉산드리아, 이집트


연표

고대 시대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에 도착하여 알렉산드리아를 건설

기원전 283년경: 무세이온에서 약 30~50명의 학자들이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학문 연구에 전념

기원전 2세기 후반: 알렉산드리아가 로마 제국의 영향권에 들어감

기원전 1세기 초: 도서관이 혁신적인 연구보다 보존적 학문에 치중하기 시작

기원전 4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 점령 중 화재로 도서관 내 수천 권의 두루마리가 소실

로마 시대

3세기: 카라칼라 황제가 도시를 약탈

391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와 테오필루스 총대주교의 선동으로 세라페이온 도서관의 많은 책들이 불태워짐

4세기말: 알렉산드리아의 주요 도서관들이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높음

641년: 아랍의 이집트 정복과 함께 알렉산드리아 쇠퇴

2002년: 이집트 정부, 유네스코의 후원으로 비블리오테카 알렉산드리나 개관


참고자료

Wendy Brazil, 'Alexandria: The Umbilicus of the Ancient World ' in Roy M MacLeod (ed), The Library of Alexandria: Centre of Learning in the Ancient World (IBTauris 2010) 35-59.

Lionel Casson, Libraries in the Ancient World (Yale University Press 2008).

World History Encyclopedia, 'What happened to the Great Library at Alexandria?'

Wikipedia, 'Library of Alexandria' (English)

Cover image: Gemini created.

By Friedrich Wilhelm Putzger (1849-1913), nach O. Puchstein in Pauly, Real-Encycl. - F. W. Putzgers Historischer Schul-Atlas, Public Domain

Door Maarten van Heemskerck - Onbekend; originally from en.wikipedia; Public Domain

'Pharos Alexandria (Fischer von Erlach). jpg', author: Johann Bernhard Fischer von Erlach Public domain

'Library of Alexandria (1).jpg', Author: Randa Mostafa1, CC BY SA 4.0 Internation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