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계 거부 사건

사료읽기

by HJ


아래에서는, 소설 [왜학훈도 안동준]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가 되는 사료를 몇 가지 분석해 보고자 합니다. 아래 기사는 고종시대사 > 고종 6년 > 11월에 수록된 문건을 옮긴 것이며, 해설은 저자의 부족한 시각이 섞여 있습니다.


https://db.history.go.kr/

(원문 출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서계, 대마주태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1869년 11월 (일자 미상)

고종 6년 | 동치 8년 | 메이지 2년


발신자: 조선국 접대관 훈도·별차 안동준(安東晙)

수신자: 草梁公館 館司 (초량공관 관사)



본문


각(覺)*

'깨닫다', '알아차리다', '일깨우다'라는 어원으로 한일 간에 왕래하던 정식 국서(國書)와 달리 외교실무자가 직접적으로 보내는 일종의 시정요구서.


좌근위소장(左近衛少將: 사코노에 쇼쇼)

공(功)으로 인해 관직을 더하는 일은 혹 있을 수 있지만 본국에서 시행하는 것이 옳고, 교린문자(交隣文字)는 본래 강정(講定)해서 바꿀 수 없는 규칙이 있는데, 어찌 갑자기 여기에 몇 자를 더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 예조 참의로 말하자면 원래 우시랑(右侍郞)이요, 동래 부사는 관례상 예조 참의를 겸직하는데 전부터 삭제하고 적지 않았습니다. 귀국은 어찌 혼자만의 생각으로 관직명을 증감해서 전례(前例)를 준수하지 않는 것입니까?

一. 左近衛少將: 因功增秩, 想或有此, 而行之本國可也. 至於交隣文字, 自有講定不易之規, 則何可遽加幾字於此乎? 若我國禮曹參議, 原是右侍郞, 東萊府使例兼禮曹參議, 而自前刪而不書. 貴國何獨惟意增減, 不遵前例乎?

해설: 안동준은 일본 내부의 관제 개편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은 일본 "본국에서 시행할 일"이지, 양국 간에 고정된 규칙(不易之規: 불역지규)인 교린 문서에 반영할 사안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조선의 동래부사가 예조참의를 겸임하면서도 외교 문서에는 전례에 따라 직함을 생략하는 사례를 들어, 고위직이라 해도 성명 중간에 관직이나 신분을 끼워 넣는 방식은 전례에 없던 형식(格外)임을 지적했다.

평조신(平朝臣: 타이라노 아소미)

지난 문첩(文牒)을 낱낱이 상고해 보건대, 설령 고관대직의 인물이라도 성명 중간에 관직을 이어 붙인 경우가 없었으니 이 또한 격외(格外)입니다.

一. 平朝臣: 歷考往牒, 雖高官大職之人, 未有官職之贅於姓名中間者, 此亦格外.

이전 관례에서 대마도주는 보통 '대마주태수(對馬州太守)' 혹은 '대마도주(對馬島主)'라고 불렸다. 이름까지 병기하는 경우에도 [대마도주]+[소 요시노리]와 같이 [직함]+[이름]을 각각 분리해서 표기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조신(朝臣)'은 일본 국내에서 관위의 서열을 나타내는 용어로 철저히 국내용이었으며, 조선과의 외교 관계에서 사용하는 대외적인 직함이 아니었다. 여기서 안동준이 발견한 문구는 [이름: 平] + [관직명: 朝臣]처럼 이름 뒤에 관직을 명함처럼 붙여버린 새로운 형식이었다. 이는 조선의 입장에서 메이지 일본이 새로 만든 관직 체계를 강제로 인정하라는 무례한 신호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서계(書契)에 신인(新印)을 찍은 것

귀국의 봉강지신(封疆之臣)은 그에 합당한 원래의 인장을 사용할 수 있지만, 귀주(貴州)가 서계에 반드시 우리나라 인장을 사용해야 함은 빙신(憑信)의 뜻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니, 이는 바로 바꿀 수 없는 규칙입니다. 이제 다른 인장으로 바꾸려 한다면 결코 받을 수 없습니다.

一. 書契押新印: 貴國封疆之臣, 相當原有印章行之本國, 而貴州之必用我國印章於書契者. 欲爲憑信之意, 乃是不易之規. 今欲改以他印, 則決不可受也.

일본의 "경계를 지키는 신하"(封疆之臣: 봉강지신)가 대마도주가 조선과 소통할 때 조선에서 내린 인장을 사용하는 것은 문서의 진위를 증명하는 빙신(憑信: 믿음의 근거)의 핵심 절차였다. 안동준은 이를 "바꿀 수 없는 규칙"(不易之規: 불역지규)이라 명시하며, 규격에 맞지 않는 인장이 찍힌 서계는 외교적 유효성을 갖지 못하므로 수령할 수 없다는 실무적 원칙을 고수했다.


예조참의공(禮曹參議公: 레이소 산기코)

공(公)은 군공(君公)의 칭호로 오등후백(五等侯伯)의 으뜸이니 대인(大人)과 비교하면 사실 폄강(貶降)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서계의 칭호는 대인(大人)으로 300년 간 이미 시행한 전례가 있으니, 이제 갑자기 '공'으로 칭하는 것은 격외(格外)입니다. 이 또한 마땅히 전례에 따라야 할 뿐입니다.

一. 禮曹參判公

公是君公之稱, 首於五等侯伯之爵, 則較諸大人, 實非貶降, 蓋此書契之稱以大人, 三百年已行之例, 今忽稱公, 係格外也. 亦當依前而已.

일본 측은 "우리가 우리 영주를 더 높은 등급인 '공(公)'으로 격상시켜 부르겠다는데 뭐가 문제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안동준은 호칭의 높고 낮음(貶降)보다 '300년간 시행된 전례' 여부를 우선순위에 두었다. 외교적 호칭은 양국 합의의 산물이므로, 일방적인 격상 제안 역시 규칙을 벗어난 '격외'의 행위로 간주하여 종전의 방식을 요구했다.


황실(皇室:코시쯔) / 봉칙(奉勅:호쵸쿠)

황(皇)은 천하를 통일해서 솔토(率土)가 함께 높이는 칭호입니다. 설령 귀국에서 시행하더라도 귀국과 우리나라 사이에 왕래하는 서계에서는 교린한 이래로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자구는 결코 받을 수 없습니다.

一. 皇室: 皇是統一天下, 率土共尊之稱, 雖行之於貴國, 而貴我間往來書契中, 則交隣以來未有之事, 如此字句, 決不可受.

칙(勅)은 천자의 조령(詔令)이니, 이것이 설령 귀국인이 존봉(尊奉)하는 설이라도 교린한 이래로 처음 있는 글자입니다. 다시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一. 奉勅: 勅是天子詔令, 此雖貴國人尊奉之說, 而蓋自交隣以來, 創見之字也, 不須更論.

이 대목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외교적 질서 파괴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클라이맥스였다. 안동준은 일본이 서계에 '황(皇)'이나 '칙(勅)'과 같은 용어를 사용한 것을 문제 삼았다. 이는 천하를 통일한 황제만이 쓸 수 있는 표현으로, 단순한 자구 수정이 아니라 조선과 일본이 수백 년간 유지해 온 외교적 위계질서를 전면 부정하는 행위였다.
안동준은 '황'이 온 세상이 우러러보는 절대적 칭호이며, '칙'은 천자의 명령이라는 엄격한 유교 질서 안에서의 개념임을 명확히 했다. 이러한 표현들은 일본 내부에서 어떻게 사용하든 상관없으나, 조선과의 국교 관계(교린) 내에서는 단 한 번도 사용된 적 없는 '불가능한 용어'라고 못 박았다.
더 나아가 그는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자신들의 국가 체제를 황국(皇國)으로 선포하며 조선을 하위의 관계로 재편하려는 야욕을 품고 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떠한 타협이나 논의의 여지도 없이 "결코 받을 수 없다(決不可受)"고 선언함으로써 당시 메이지 정부의 '중국과는 대등, 조선보다는 우위'를 목표로 하는 외교정책의 방향을 일정기간 좌초시켰다.


후의(厚誼:코기)가 여전히 남아 있어 쉽게 바꿀 수 없다는 것

귀주(貴州)에서 대대로 우리 인장을 받은 것은 사(私)가 아니라 바로 공(公)으로 귀결됩니다. 후의가 남아있는 것이 미미하다고 하는 것은 이를 사의(私誼)로 여기려는 속셈입니다. 심지어 "사(私)로써 공(公)을 해친다"는 구절까지 있으니 크게 놀랍고 괴이할 뿐입니다. 당초 인장을 언제 사적으로 주고받은 일이 있었기에 '사'라는 한 글자를 그 사이에 끼워 넣는 것입니까? 귀국의 주(州)를 관장하는 관리가 만약 이웃나라에서 사적으로 인장을 받았다면 귀국의 일이 어찌 괴이하지 않겠습니까?

一. 厚誼所存有不可容易改者: 貴州之世受我印, 非私伊公, 而歸之厚誼所存, 微者以此爲私誼底意, 而至於下段以私害公之句, 大覺駭異, 當初受印, 何嘗私自與受, 而乃以私之一字揷入其中乎? 貴國典州之官, 若私受印章於隣國, 則貴國之事, 豈不異哉?

일본은 기존의 인장 체계를 '대마도에 대한 조선의 사사로운 배려'로 격하시켜 폐지하려 했다. 이에 안동준은 인장 수령은 엄연한 공적 절차(非私伊公: 비사이공)였음을 강조했다. 만약 일본 측 주장대로 대마도주가 타국의 도장을 사적으로 받아온 것이라면, 오히려 일본의 국가 기강이 문제임을 지적하며 상대의 논리적 허점을 파고들었다.


대체로 양국의 조약은 금석과 같아 고칠 수 없는 글입니다.

서계의 왕복이 한만(汗漫)한 문자가 아니니, 만약 그 말 하나라도 격식에 위배되고 글자 하나라도 눈에 거슬린다면 반드시 수용해서 대접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100년을 버티더라도 한갓 인호(隣好)만 상하게 할 뿐이니, 어찌 일을 마칠 기약이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귀국에서도 사체(事體)와 도리를 깊이 아는 인물이 있을 터인데, 끝내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이 때문에 심히 개탄스럽습니다.

一. 大抵兩國約條, 卽金石不刊之文也. 書契往復, 非汗漫文字, 而苟其一言違格. 一字碍眼, 必無容受儐接之理, 雖百年相持, 徒傷隣好而已, 豈有濟事之期乎? 想貴國亦有深識事體道理之人, 而終不知悟, 窃爲之深慨々々.

양국의 약조를 '금석(金石)처럼 고칠 수 없는 것'으로 정의했다. 외교 문서의 자구 하나가 격식에 어긋나면 실무적으로 수용할 근거가 사라지며, 이 상태로는 백 년을 대치해도 해결 기약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사태가 해결되지 않는 책임을 사리와 도리를 깨닫지 못하는 일본 측의 태도 변화 부재로 돌리며 글을 맺었다.




기사년(1869) 11월 己巳十一月 日

훈도 준경(訓導俊卿) 안 첨지(安僉知) (印) 訓導俊卿安僉知印

별차 경문(別差景文) 이 주부(李主簿) (印) 別差景文李主簿印

관사 존공(館司尊公)





사진: Unsplash의 Jeanne Rouillard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7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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