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년 9월 25일
역관 마루는 차갑다. 얇은 솜이불 한 장으로는 이른 봄 새벽의 냉기를 막기에 역부족이지만, 동준은 그것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밤새 뒤척이며 문 안쪽을 향해 귀를 기울이던 그는, 여명이 밝아올 무렵에야 비로소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가 이내 깨어난다. 방 안에는 분명 어제의 그 정체 모를 여인이 쓰러져 자고 있을 터다.
어젯밤의 일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황급히 안에 눕히긴 했지만, 그 순간부터 동준의 가슴은 긴장감과 묘한 떨림으로 얼어붙었다. 누가 볼까 두려워 덜덜 떨며 지새운 밤. 역관에서 제일 두꺼운 이불을 내어주고는 문밖에서 기다렸다.
보통 여인 같았더라면 역졸들에게 시켜 의원도 오라 하고, 읍내 주막 어디라도 보내주었을 터이지만, 이 여인은 달랐다. 왜관 밖에서 발견한 일본 여인은 운이 나쁘면 효수당하는 것이 조선의 국법이었음을 동준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여인 한 명의 생명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국가 간의 약속이자, 임진년 이후 이어진 양국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원칙임을, 연루되는 날이면 자신에게도 심한 문책이 따를 것임을 통사(通事)만큼 잘 아는 이가 누가 있으랴.
이러한 사리분별과는 별개로, 저항할 수 없을만치 동준은 이미 그녀에 대한 궁금증으로 꽉 차있다. 도대체 이 여인은 누구일까. 왜 여기 나타났을까. 그리고 조선 여인 차림으로 어디로 향하던 것일까. 장옷으로 온몸을 감싸고, 진흙 묻은 짚신을 신고 먼 길을 홀로 걸어온 그녀의 모습에 배어 있던 절박함. 무언가 피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기운다.
순간, 기억은 여인의 소맷자락에서 떨어졌던 서신에 닿는다. 어제는 워낙 경황이 없고 여인의 상태가 안쓰러워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동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역관 앞, 어제 여인이 쓰러졌던 길가로 달려간다. 아니나 다를까 나비모양으로 접힌 새하얀 서신은 바닥에 고이 누워있다.
동준은 조심스레 말들이 묶여있는 역관의 마방(馬房)에 들어가 쪽지를 살핀다. 서신 겉면 봉인을 먼저 확인한다. 대마도주가 보내는 공식 서계라면 으레 찍혀 있어야 할 대마도의 인장. 그게 없지 않은가! 그 자리는 낯설고도 위압적인 세 잎 접시꽃 문장이 대신하고 있을 뿐. 내용은 한문으로 적힌 어떤 장소와 이름이었다.
운문사 雲門寺, 각명 覺明
승려의 이름인가? 운문사라는 절은 걸어서 대략 이틀 거리다. 서신을 쥔 손이 잠시 멍해진다. 왜 그곳으로 향하던 걸까. 저 승려가 여인을 숨겨주기로 약속이라도 한 걸까. 아니면 더 큰 음모의 일부인가. 젊은 왜국 여인을 자신의 역관에 눕힌 건 순간의 딱한 심정 때문이었지만, 그 이후 어찌해야 할지 도통 갈피가 안 잡힌다. 머릿속으로는 온갖 최악의 시나리오가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녀의 상태가 괜찮은지 확인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터. 동준이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서신을 소매 안쪽 깊숙이 감춘 뒤, 천천히 방문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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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앞에 서서 숨을 가다듬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문고리를 잡으려다 말고, 그는 헛기침으로 안의 기척을 살폈다.
"에헴, 에헴."
지금이 대략 진시(辰時)쯤 되었으니, 여인이 깨어 있을 만한 때다. 혹여 간밤에 숨이라도 끊어지지 않았는지 확인해야 한다. 동준은 연거푸 기침을 했다. 한 번, 두 번. 점점 소리를 키워가며.
그러자 안에서 바스락, 이불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몸을 일으키는 듯한 낮은 신음. 살아 있구나. 동준은 가슴을 쓸어내린다.
작전이 성공하자, 동준은 얼른 의관을 정제하고, 주방에 들어가 가마솥에 남은 밥과 찬을 모아다가 대략 상을 차려낸다. 평소 상 봐주는 사령(使令)이 해야 할 일을 남의 눈에 띌 수 없는 처지인지라 주먹구구식으로. 밥과 국을 푸는 솜씨며, 그릇의 위치나 뭐나 뭔가 스스로 보기에도 상당히 어설프다. 쓴웃음을 지으며 어쨌든 평상에 상을 놓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기다린다.
십여 분 지났을까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어제의 여인이 나타난다. 어둑어둑한 밤길에 제대로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날이 밝고 제대로 보니 영락없는 왜인 화장 아닌가. 분을 칠해 얼굴은 희고, 반달 모양의 쌍꺼풀 없는 눈은 슬퍼 보였지만 생기가 있다. 눈썹은 일자로 가지런했고 입술은 작고 도톰하다. 자신의 나이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이십 대 초반의 고운 자태가 그대로 드러나는 가녀린 목과 손.
사실 동준과 같은 왜학 전문가도 왜국 여인과 실제 말을 섞어볼 기회는 극히 드물었다. 부산 왜관의 왜인들은 모두 남성이었다. 관리, 상인, 통역관, 심지어 요리사나 심부름꾼들도 남자 아니던가! 대마도에서 조선의 직을 받은 관수왜들도 가족들은 모두 대마도에 두고 건너오는 것이 관례였다. 조선 여인이 왜관에 출입하는 것도, 왜국 여인이 왜관에 머무는 것도 모두 사형에 처해질 만큼 엄격하게 다스리고 있었다. 도대체 이 상황은 무엇인지!
"몸은 좀 어떠시오? 다친 데는 없소? お加減はいかがですか。お怪我はありませんか。"
동준의 물음에 여인은 고개를 숙인 채 나직이 대답했다.
"폐를 끼치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ご迷惑をおかけして、申し訳ございません. 助けていただき、心より感謝申し上げます。"
동준은 여인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인다.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먼저 가장 중요한 것부터 물어야 한다.
"궁금한 게 많지만 내 한 가지만 물어보리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말투를 보아하니 본토에서 건너온 명망 있는 가문의 처자 같은데 말이오."
여인은 고개를 더욱 숙인 채 입술만 떨고 있다.
"송구스럽습니다 恐れ入ります。"
동준은 한숨을 내쉬며 목소리를 낮춘다. 위협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태의 심각성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아시오? 여기는 역관이지만 나름 조선의 관청으로, 나는 왜국과의 소통을 돕는 조정의 관리요. 내 원래대로라면 국법에 따라 그대를 관아에 넘기는 것이 정상이지만, 먼저 사정이 딱해 보여 어떤 사연인지 듣고 싶어서 그러오."
여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린다. 그러나 여전히 입을 열지 않고 있다.
"송구스럽습니다."
동준은 답답함에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가, 이내 진정하고 진심을 담아 말한다.
"내 진심으로 돕고 싶어서 하는 말이오. 첩자는 아니라고 믿고 싶어서 말이오."
동준은 여인의 눈을 응시한다. 여인도 천천히 고개를 들어 동준의 눈을 바라본다. 순간 차갑고 조용한 방 한가운데서 일말의 진심이 통한다. 그 눈빛 속에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동시에 간절함도 서려 있기에. 여인은 동준의 말을 이해한 듯, 천천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기 시작한다.
"저는… 사실 몰락한 무사집안의 딸로 교토 수호직(京都守護職) 번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松平容保)의 심복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동준의 눈이 커진다. 교토 수호직이라면 막부의 핵심 세력이 아닌가.
"금문의 변(禁門の変, 1864년 7월) 이후로 교토는 매일 피바다라 하던데… 그럼 아이즈번 출신이요?"
"예." 여인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뜬다. "저희 가문은 대대로 도쿠가와 가문에 충성해 온 무가로, 교토를 습격한 초슈 낭인들과 몇 달 전 맞서 싸웠습니다. 그중 아버지는 막부 측의 선봉으로 여기저기 부상을 입었지만 결국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지요."
여인의 목소리에는 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이 배어 있다. 하지만 이내 그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한다.
"하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교토 막부 내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서로가 서로를 모함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특히 사쿠라다몬(桜田門外の変)에서 막부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암살당한 후에, 저희 번 내부의 사정도 좋지 않아 졌죠. 아버지는 그래도 저와 저희 가족을 안전하게 해 주려고 이번 전투에서 혼신을 다했습니다. 그치만…"
여인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동준은 숨을 죽이고 기다린다.
"아버지가 오히려 전투 후에 약해진 틈을 타, 번주님 측근의 다른 무사들이 아버지를 모함했어요. 초슈와 내통했다는 거짓 증거를 보이면서. 그래서 결국 아버지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할복하셨고, 남은 저희 가족들은 모두 참수당했습니다."
동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낀다.
"그대는 그럼 어떻게…"
여인은 눈물을 닦으며 가까스로 말을 잇는다.
"아버지와 평소 친분이 두텁던 고잔(五山) 승려 가쿠잔(覺山)이라는 분이, 아이즈까지 와서 저를 빼돌려 대마도로 데려가셨고, 토막파의 세력이 대마도에 확산될 즈음 제가 발각될까 두려워, 다시 저를 조선 왜관으로 보내주셨습니다. 물론 배에 숨어서요."
동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계속 죽음을 피해 달아나고 있었구려."
"예." 여인의 대답은 짧았지만 그 속에 담긴 무게는 무겁다.
"조선에서는 어찌 살아남을 생각이었소?"
여인은 잠시 숨을 고르고 대답한다.
"운문사의 승려 각명(覺明) 스님이 가쿠잔 스님과 인연이 있어, 그분이라면 저를 이곳 조선땅에서 목숨 부지하도록 도와주실 거라 믿으셨어요. 저도 그곳에 들어가면 조선말을 배우고 비구니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초량왜관에서는 어떻게 탈출한 거요?"
동준의 물음에 여인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연다.
"사실 가쿠잔 스님께서 대마도에서 소개해주신 무사 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원래 초량왜관에 출입하는 관수왜의 호위무사이더군요. 스님께 사정을 전해 들은 그 무사님이 목숨을 걸고 밤에 저를 설책 너머로 데려다주셨습니다."
동준의 얼굴이 굳어진다. 설책을 넘었다는 말은 곧 왜관의 경비를 뚫었다는 뜻이다. 단순한 밀항이 아니라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적 신의를 깨뜨린 중대한 사건이지 않은가.
"그거 아시오? 지금 이 모든 상황은 조선 조정이 알게 되면 관련자를 모두 색출하고, 대마도주에게 참형하라는 서계를 띄워야 하는 중차대한 외교적 결례요."
동준의 목소리에는 긴장이 배어 있다. 통사로써 이것은 자신의 목숨까지 내걸어야 할 일이다.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여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호하게 들린다.
"하여, 지금 저와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 가문을 걸고 나으리께 간청하는 것입니다."
여인의 입술이 떨린다. 떨림 속에 전해지는 필사적인 의지.
"아시다시피 저와 아버지, 그리고 저희 가문과 그동안 섬겨온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과의 우호를 중시 여겨 왔습니다. 비록 막부 내에도 조선을 하대하여 히데요시와 같이 정벌하자는 미친 자들의 목소리도 있습니다만... 그건 대부분 막부 중신들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여인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잇는다.
"저를 숨겨주신 가쿠잔 스님도 본래 대마도에서 관수왜를 도와 여기 부산 왜관과 소통하는 분이시지요. 스님께서는 늘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조선이 임진년 이후 저희 일본국과 척을 지어, 서로 간에 앙심이 남아있고 경계심이 높지만, 지금 양이(洋夷)가 들어와 포를 쏘는 세상에 비하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우호는 적지 않아 남아있다고. 저희 아버님도 늘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동준은 말없이 여인을 바라본다. 절박한 눈빛, 그리고 그보다 더한 아버지에 대한 깊은 신뢰.
잠시 침묵이 흐른다. 밖에서는 바람 소리만 들려온다.
"비록 이 한 몸 저희 가족들처럼 지금 자결한다 하여 아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지만…"
여인의 목소리가 잠시 떨린다.
"저는 아버지의 딸, 그리고 가문의 마지막 피로써 저희 일본국 아이즈 번에서 겪은 억울함을 언젠가 평화가 찾아오면 해명하기 위해 살아남은 것입니다. 부디 제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여인이 무릎을 꿇은 채 바닥에 공손히 조아린다.
동준은 찻잔을 든 손을 멈췄다. 손끝에 전해지는 차가운 도자기의 감촉.
아이즈번의 비극, 가문의 몰락, 그리고 가쿠잔이라는 승려의 개입. 듣고 나니 이제 이 일은 단순한 밀항이 아니었다. 이것은 자신의 목을 걸고 도박을 해야 하는 거대한 파도. 한 번 잘못 판단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가문 전체가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는 일.
하지만 여인의 눈동자 속에 담긴 아버지에 대한 효심과 살고자 하는 의지를 본 이상, 문을 열고 당장 역졸을 불러들일 수는 없었다.
동준은 조심스레 찻잔을 상 위에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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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질 녘의 붉은 노을이 부산 초량왜관의 기와지붕을 물들이고 있다. 왜관 안쪽 골목에서는 대마도에서 건너온 상인들이 하루 장사를 마무리하며 짐을 정리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설책 너머로는 조선 역관들이 오가며 내일의 교역 일정을 확인하고 있고, 관수왜의 저택에서는 촛불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다.
한 무사가 주변을 살피며 걷고 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옷에는 그을음 냄새가 배어 있다—옷을 태워야만 했다. 설책 너머의 세계로 몰래 보내준 여인의 모든 흔적을 그는 왜관 별당(別堂)의 한 부엌 아궁이에서 태워 없앴다. 누가 봤을까. 그는 주위를 다시 여러 번 살핀다.
왜관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나무 울타리 설책(設柵) 주위로 근엄하게 늘어선 조선의 군사들이 보인다. 작년 말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집권한 이래 군사들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경직되고 표정은 엄중하다. 대마도 관수왜의 호위무사인 그를 보는 조선 무사들의 표정은 왜인지 일종의 경쟁자를 대하는 듯하다. 여기서 그들과 적대할 일은 결코 없을 터였지만, 왜인지 그들의 날선 눈동자는 칼자루를 잠시 손에 쥐게 만든다.
설책을 따라 걷는 그의 시선 너머로 저녁노을에 물든 산들이 겹겹이 펼쳐져 있다. 금정산의 웅장한 능선이 하늘을 가르고, 그 아래로 동래성읍의 기와지붕들이 점점이 박혀 있다. 성읍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굴뚝 연기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민가들의 평온한 일상을 드러낸다. 연기는 천천히 하늘로 올라가 노을빛과 뒤섞이며 흐릿한 담채화를 그린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설책 사이로 스며든다. 짠 기운이 섞인 그 바람은 일본의 바다와는 또 다른 냄새를 품고 있다. 조선의 흙냄새, 소나무 향, 그리고 어디선가 타오르는 장작 연기가 뒤섞여 낯설면서도 묘하게 정겨운 공기를 만들어낸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이곳은 분명 이국이었지만, 이 바람만큼은 그를 안심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가쿠잔의 부탁을 받고 어젯밤 설책을 넘게 해준 여인을 잠시 생각한다. 그녀가 헤치고 나온 아수라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가녀린 몸, 앳된 표정, 맑은 눈. 그러나 확실히 그녀에게는 두려움이 없었다. 치즈루(千鶴)라고 했던가. '천 마리의 학'이라… 고고한 그녀의 기상, 그러나 꺾인 날개. 잘 어울리는 이름이군, 홀로 조용히 읊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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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린당(交隣堂)으로 향하는 중, 두어 명의 조선 군졸들이 그를 가로막는다. 악의는 없는 듯. 단지 그가 찬 칼을 의례적으로 압수하기 위함인 듯하다. 왜관에 들어오는 모든 일본인들은 입구에서 무기를 반납하는 것이 원칙이다. 오직 관수왜 같은 왜관의 책임자나 그를 호위하는 소수의 왜인들만이 제한적으로 칼을 찰뿐.
"거기, 잠깐." 군졸 하나가 무사를 불러 세웠다. "칼을 좀 보이게."
무사는 조선어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군졸의 손짓만으로도 그 의도를 읽을 수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일부러 고개를 숙이며 답한다. "미안한데, 난 조선어를 모른다네. 申し訳ないが、朝鮮語はわからぬ。”
군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한다. 그중 하나가 손가락으로 그의 허리춤에 찬 칼을 가리키며 반납하라는 모양새를 취한다. 왜관의 규율이다.
무사는 천천히 허리춤에서 칼을 뽑는다. 그리고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공손히 칼을 제시한다. 동작에는 한 치의 거침도, 주저함도 없다. 오랜 세월 왜관을 드나들며 배운 지혜—조선 조정이 왜관 안에서 가장 주의 깊게 감시하는 것은 칼을 찬 사무라이들의 태도인 것을, 한 번의 무례한 눈빛, 한 번의 거만한 몸짓이 자칫 외교 문제로 번질 수 있음을 익히 알고 있는 듯.
군졸 중 키가 작은 사내가 겐지로의 칼을 받아 들며, 의외로 유창한 일본어로 묻는다. "잠깐, 친구. 자네 어디 출신인가?"
"나는 미토번 출신이요 水戸藩の者だ." 그가 담담히 대답한다. "쇼군을 모시는 무사 집안 출신이지요."
군졸들의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그가 찬 칼을 천천히 살피며, 마치 시험하듯 쏘아붙인다. "쇼군을 모시는 집안의 무사가... 왜 이런 변방 왜관에서 하급 호위무사로 있는가?"
"…"
"잠깐, 내 사과하지." 키 작은 군졸이 황급히 손을 내젓는다. "자네를 모욕할 의도는 전혀 아니었네. 다만..." 잠시 주저하다가 솔직하게 말을 잇는다. "우리는 자네가 익힌 일본의 검술을 좀 구경하고 싶긴 하네."
무사는 미간을 좁힌다. "왜관에서 칼을 휘두르는 걸 당신들 상관이 알면 가만 안 둘 텐데?"
"알지, 알지." 군졸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슬며시 웃는다. "그렇지만 지금 여기 우리밖에 없지 않은가. 싸우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는 멀리 설책 근처에 놓인 통나무를 턱으로 가리킨다. "저기 저 통나무 한 번만 베어 볼 수 있겠나? 나와 내 친구들이 내기를 했네. 여기 최고의 일본 검객이 저 통나무를 일격에 베어 넘길 수 있는지 말이야."
무사는 한숨을 내쉰다. "당신네 조선인들도 결코 무예를 모르지 않을 텐데, 뭐가 그리 궁금하오."
"만약 저 나무를 벤다면, " 군졸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한다. "내 오늘 별당에서 술을 한잔 대접하겠네."
무사는 곤란한 표정으로 잠시 침묵한다. 저녁노을이 설책 너머 산들을 붉게 물들이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그의 옷자락을 스친다. 그는 군졸들의 눈빛을 읽은 모양이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진정한 무인으로서의 경외심이 서려 있음을, 그저 구경꾼이 아니라, 무예를 아는 자들임을 간파한 걸까?
무사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인다. 말없이 허리춤에 손을 가져간 채, 천천히 통나무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 시작한다. 무릎을 구부린 엉거주춤한 자세는 마치 일본의 전통극 노(能)를 보는 듯하다. 눈은 매섭게 통나무를 노려보고 있다.
숨소리마저 멎은 듯 주변이 고요해진다. 손이 칼자루에 닿는다.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오직 그와 통나무만이 존재할 뿐.
스윽.
소리도 없었다. 통나무는 상단이 매끄럽게 미끄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단면은 거울처럼 매끄러웠다. 군졸들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멍하니 겐지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은 이제 같은 무사로써의 존경심으로 일렁였다. 그중 하나가 흥분한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자네 대단하군. 이름이 뭔가?"
"이름은 사토 겐지로(佐藤 源次郎). 검은 무소신덴류(無双神伝流). 허나, 내 칼은 주인을 지키기 위해 뽑는 것이지, 쓸데없이 누굴 해하거나, 타인의 위세에 눌려 뽑는 것이 아니니... 무례는 삼가주시오. 名は佐藤源次郎。無双神伝流を嗜む。だが、我が刃は主を守るために抜くもの。無益に人を斬るためや、他人の威勢に屈して抜くものではない。……無礼は慎んでもらおう。
겐지로가 조용히 몸을 일으킨다. 이어 조선 군졸들에게 다시 한번 허리를 깊이 굽혀 예를 표한 뒤, 칼을 두 손으로 받쳐 공손히 내어준다.
이번 화를 위해 특별히 왜관 관련 블로그 글을 선뜻 공유하고 응원해 주신 @꽃보다예쁜여자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