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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수 Oct 02. 2020

누가 날 좀 죽여줘

‘누가 날 좀 죽여줘’


죽지 못해 소리치는 자신이다. 솔직히 너무 두렵다. 죽은 후는 걱정 없지만 죽는 그 순간이. 실제로 죽을 때 어떤 느낌인지 모르지만 티비 속에서 죽는 사람들은 괴로워 보였다. 살려달라고 발버둥 치는 모습. 그것이 진짜 아파서인지- 아니면 그저 미련이라는 한낱 감정 때문인지 모르기에 두렵다. 후자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


두렵다. 머리가 울린다. 생명이란 것이 그냥 살아가라고 소리쳐댄다. 어떤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죽음에 이르는 저주에 걸렸다는데, 내겐 그 반대일 테다. 내겐 생명이란 저주다. 생명을 얻었기에 필연적으로 죽음과 마주해야 하는. 어떠한 탈출구도 없는 일방통행. 그 끝은 너무도 명확해서 그저 조금씩 다가갈 뿐인데도 이따금 그 존재감에 소스라치곤 한다.


또한 우리가 죽음을 마주하기 전, 지금 이 순간에도 겪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삶이다. 탄생과 죽음을 잇는 동아줄 같은 것. 그 줄을 굳이 이름 짓자면 시간이라 할 테다. 허나 그 시간 또한 너무도 고통스럽다. 우리는 그저 살아가기 위해 시간을 쓴다. 매 순간마다 죽음에 한 층 가까워지면서 ‘먹고살기 위해’라니, 찰리 채플린도 이런 블랙 코미디는 꿈도 못 꿀 테다. 그렇다고 인생이 절망만 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 하나 없겠지. 뭣 하러 살아. 그냥 순도 백 프로의 고통만 있는데. 하지만 인생은 우리에게 희망 또한 준다. ‘너 좀 더 살 수 있어.’ 물론 그 앞에 ‘노력’이란 조건이 붙지만 말이다. 허나 늘 그렇듯, 노력, 사랑, 감사, 슬픔- 이런 뜬구름 잡는 단어들은 그 애매한 범주에 항상 우리들을 안심하게 한다. 그래서 ‘이 정도면’하고 곧 안심할 테다. 이젠 더 살 수 있다고 하며.


딱 한마디만 하겠다. 노력은 개뿔. 그건 희망이 아니라 악독한 회유책이다. 삶을 조금 더 유지시키려는. 마치 기생충이 바로 그 숙주를 죽이지는 않듯, 생명은 그저 야금야금 나와 제 자신을 잠식해갈뿐이다. 그리곤 결국의 결국엔 죽음을 마주시키곤 ‘어쩔 수 없잖아. 이게 인생인 거고 너도 알고 있었잖아.’라며 준비된 단어들을 나열한다.


뭐, 이젠 이런 고민들도 너무 흔해 빠져서 그저 낡은 망상일 뿐이라고 할 테지. 모든 걸 부인하는 건 아니다. 그저 사실을 망상이라 일컫는 수많은 인생들에게 일말의 동정을 느낄 뿐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인생을 일찍 끝내려 했다. 나름 괜찮은 생이라 자부하며 살고 있지만 이게 다 무슨 의민가 싶었다. 가끔은 사람들이 왜 저렇게 악착같이 사는 거지- 그 이유를 열심히 생각해보려 했다. 나름 스물두 살의 시간을 바치며 그 해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내가 이상한 걸 수도 있을 테니. 하지만 결국엔 찾지 못했다. 내가 대체 왜 고통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건지, 그 적절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죽으려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창문으로 뛰어내리려 했고, 초등학교 5학년 땐 가출을 해 아무도 모르게 죽어야지 결심했으며, 중학교 2학년 땐 나를 괴롭히던 친구들을 다 죽이고 나도 자살해야지 생각했고 고등학교 1학년 땐 가정불화로 그랬으며 3학년 땐 역겨운 스스로에 또 한 번 다짐했다. 시간이 갈수록 나름 점점 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고 몇 번은 직전까지 갔던 적도 있었다.


허나 여러분들도 짐작하셨다시피- 나는 여기 이렇게 살아있고 모니터를 두고 자신의 모순에 대해 얘기하는 중이다. 어떻게 살아남았냐고? 음- 글쎄. 구원, 회복, 깨달음, 되돌아봄, 적어도 그런 이유들에서만큼은 아니었다고 하겠다. 그저 두려움. 이 하나의 감정이 나를 아직까지 살아있게 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아무것도 모르는 공포감. 이것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내게 일관된 자세로 나를 타이르고 있다. ‘죽지 마’.


그러니 누군가 나를 죽여주길 바란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여도 좋고, 그저 우연히 길 가다 마주친 다른 누군가여도 좋다. 그저 이 생을 얼른 끝내주길 바란다. 아, 물론 불치병이나 시한부 판정, 큰 사고 같은 방법들은 아니길 빈다. 고통은 질색이니까. 지금까지 겪은 거면 충분하잖아? (인생의 고통의 크기가 정해져 있다고, 그러니 견디라고 한 모든 책들에게 중지를 반쯤만 올려보겠다. (웃음))


나는 내년, 아니 내일 당장이라도 이곳에 더는 없을지도 모른다. (뭐, 그건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들 또한 그럴 것이다. 아, 모욕적이라고 생각하진 않길 바란다. 그것이 인생이란 것이니.) 그러니 지금이라도 열심히 글을 써본다. 첫째는 이 글을 읽는 어느 누군가가 나를 죽여주길 바라며, 둘째는 혹여나, 만약에라도 누군가가 내가 삶을 살아도 될 한치의 이유를 알고 있다면, ………………………………………………………………………………………………………………………………………………………………………………………부탁한다. 부디 그 이유를 알려주길. 가능하면 빨리. ….. 글을 읽어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 그럼, 다음 글로 볼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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