겪어보지 않고 판단했던 나에게, <김밥의 탄생>이 건넨 이야기
차가운 마음을 녹이는 건, 따뜻한 품이다.
다름을 감싸 안을 때, 진짜 변화가 시작된다.
나는 얼마나 품이 넓은 사람일까.
아니, 품의 문제이기 전에, 나는 사람을 얼마나 제대로 보고 있는 걸까.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빠르게 판단하고 있었다.
말투, 분위기, 눈빛, 웃는 방식, 대화의 결, 말의 속도…
그 짧은 몇 분 안에, 이 사람은 나와 잘 맞겠다, 아니다, 조금 불편하겠다
결론을 내리고, 거리를 두었다.
예전에는 이걸 ‘센스’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잘 보는 눈, 낌새를 잘 읽는 능력쯤으로 여겼다.
불편함을 미리 감지하고 피하는 건 내성적인 사람에겐 일종의 생존법 같기도 했다.
낯선 무리에서 튀지 않고, 어울리되 무리하지 않으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관계 안에서만 머무르는 방식.
하지만 어느 날부터 그런 ‘감각’들이 조금씩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어색하다고 느낀 사람이 나중에 보여준 다정함, 조용해서 존재감이 옅어 보였던 사람이 사실은 깊이 있고 따뜻한 말들을 지닌 사람이었다는 걸 여러 번 그런 경험을 하고 나서였다.
그제야 알게 됐다.
내가 ‘판단’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불안에서 비롯된 ‘방어’였다는 걸.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늘 ‘주류’에 끼고 싶은 사람이었다. 도드라지지 않되 튀지 않고, 무난하고 적당히 말이 통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불필요한 갈등이나 낯섦 없이 지내고 싶었다.
예측 가능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과만 어울리고 싶었다. 그래야 관계에서 실수할 위험도, 예상치 못한 감정에 휘둘릴 가능성도 줄어들 테니까.
그랬다. 관계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나는 그렇게 선택하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더더욱, 내게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의 사람, 정서의 결이 다르거나 말의 리듬이 맞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게 됐다. 불편함보다 불확실성이 두려웠던 것 같다. 어울리는 데 너무 많은 감정노동이 들 것 같은 사람에게는 애초에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편이 나았으니까.
그렇게 나는 스스로도 모르게 관계의 다양성을 좁히고 있었고, 결국은 나라는 사람의 결도 좁아지고 있었다.
그건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모두 무의식적으로 안전한 사람들을 찾아 무리를 짓고, 익숙하지 않은 말투, 너무 빠르거나 느린 감정 표현, 낯선 분위기, 다른 리듬의 사람들을 조용히 경계한다.
그게 본능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 본능만으로 관계를 유지하면,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놓치게 된다.
조용한 사람 안에 숨어 있던 빛나는 문장들, 처음에는 두서없고 정신없어 보였지만 알고 보면 누구보다 배려 깊었던 마음들, 내 기준에 맞지 않았던 사람들이 사실은 내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는 걸 알게 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그 ‘시간’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첫인상에 반응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진심이 드러나는 순간까지 조금 더 기다릴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나 자신 또한 그렇게 기다려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 비로소 나다운 모습으로 설 수 있었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우리가 ‘다르다’고 여겼던 것들은 실제로는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 ‘또 하나의 색’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다양한 색깔들이 섞일 수 있을 때, 관계는 더 풍부해지고, 나라는 사람도 더 입체적으로 자라난다.
그래서 요즘은 김밥을 먹을 때마다 <김밥의 탄생>이 생각난다.
검은 김 한 장이 서로 다른 재료들을 조용히 감싸 안고, 그 안에서 각자의 맛은 그대로 살아 있으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완전히 새로운 하나가 되는지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그냥 김밥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려주는 책일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책은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 다름을 마주할 때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용히, 하지만 단단하게 묻는 그림책이었다.
겨울 나라에 시금치, 당근, 단무지, 달걀, 햄, 밥이 살고 있었다.
모두 맛있는 음식이 되고 싶어 했지만 변신 연습은 번번이 실패했다.
어느 날 검은 김이 새 이웃으로 왔다. 김은 친구들과 친해지려 애썼지만, 다른 재료들은 김을 무시하고 놀려댔다. 상처받은 김은 혼자 조용히 지냈다.
그런데 매서운 추위가 찾아와 모든 재료들이 얼어 떨게 되었다.
그때 김이 나섰다. "우리 꼭 안고 있는 게 어때?" 김은 가슴을 펼쳐 모두를 돌돌 말아 안아주었다.
"김쓰김쓰 킴킴킴 김밥되어불쓰!" 김의 주문과 함께 '김밥'이 탄생했다.
김밥을 처음 발명한 사람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서로 전혀 다른 재료들을 하나로 묶겠다고 결심한 그 순간, 그에게는 어떤 확신이 있었던 걸까.
나는 오랫동안 '섞인다'는 것과 '함께한다'는 것을 혼동해 왔다. 관계에서 조화를 이루려면 서로 비슷해져야 한다고, 나와 다른 사람과는 결국 어울릴 수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늘 나와 닮은 사람들만 찾아다녔고, 차이가 느껴지는 순간 그 관계에서 발을 빼곤 했다.
하지만 김밥 속 재료들을 보면서 깨달았다. 진짜 조화는 동질화가 아니라는 것을. 단무지는 여전히 짜고, 시금치는 여전히 쌉쌀하다. 그들은 자신의 맛을 잃지 않았다. 대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함께 있음으로써 각자가 가진 맛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제야 이해했다. 내가 그토록 피하려 했던 '다름'이야말로 관계의 본질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내가 가장 깊이 사랑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나와 달랐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어서 당황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차이가 오히려 나를 더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내가 보지 못했던 세상을 보여주고, 내가 경험하지 못한 감정을 느끼게 해 주고, 내가 생각하지 못한 질문들을 던져주었다.
나는 나 자신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에, 그들과 함께여야만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나는 그 소중한 '다름'을 두려워했을까. 왜 안전한 '같음' 속에서만 머물려고 했을까.
아마도 나는, 사랑을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사랑한다는 것이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완전히 알아주고, 완전히 받아들여지는 것. 하지만 진짜 사랑은 이해할 수 없음을 견디는 것,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하기로 결심하는 것이었다.
김밥을 감싸는 검은 김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는 능력이 아니라 서로를 완전히 감싸 안는 용기였던 것이다. 상대의 모든 면을 이해하지 못해도, 때로는 그의 날카로움에 상처를 받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가겠다는 의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다르다는 건 어울릴 수 없다는 게 아니라,
함께 새로운 조화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가능성.
이제는 그 가능성을 조금 더 기다려보고,
성급한 판단 대신 천천히 바라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김밥의 탄생> 신유미 作을 읽고...
글쓴이 │ 투유니즈맘 (Twoyooniiz M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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