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4화 우연과 인연, 감정의 조각들

서툴지만 로딩 중입니다.

by 슬미탐

모두가 자신만의 속도로 바쁘게 살아가는 공간. 누구도 시선을 오래 두지 않고, 누구도 이름을 먼저 묻지 않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던 순간, 낯익은 목소리가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그 짧은 인사 한마디가 어쩌면 R에게 아주 작은 숨을 틔워주었는지 모른다.


“잠깐만요.!”


그녀는 얼굴을 아래로 한 채, 조금 부끄러운 듯 입술을 다물며 말끝을 흐렸다.


"죄송합니다."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R은 그녀의 목소리가 어딘가 낯익었다. 조용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 R과 클레어는 서로 눈이 마주쳤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둘의 눈빛에 어렴풋한 놀라움이 스쳤다.


“저 남자, 어디서 봤지? “

클레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생각이 났는지 너무 반가운 눈 빛으로..


"아.. 생각났다..

아침에.. 지하철… 그 도둑놈… 맞죠?”


클레어의 말에 R은 멋쩍게 웃었다.

“네… 아마도.”


엘리베이터 안에 사람들은 R과 클레어의 대화에 놀란 듯 번갈아 쳐다봤다. 사람들 사이에 서 있던 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아깐… 고마웠어요. 인사도 못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만날 수 있죠?"


'Tenth floor. Doors opening.'


그녀는 속삭이듯 말을 이어갔다. “몇 층 가세요?”

“21층 갑니다.”


클레어는 순간 놀란 듯

“21층요?.. 저도 21층 가는데…"


그 순간, 엘리베이터가 21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그녀는 "나중에 또 봐요, 아침엔 정말 고마웠어요!."


짧게 인사하고, 서둘러 어디론가 뛰어갔다. R은 말없이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짧은 인사 한마디가 오늘 아침, 이 낯선 도시 안에서 가장 따뜻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21층 긴 복도를 가운데 두고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사무실 풍경은 전혀 다정하지 않았다. 모두가 모니터에 집중해 있었고, 공간을 가득 메운 키보드 소리와 커피잔이 내려앉는 미세한 소음만이 흘렀다. 누구도 고개를 들지 않았고, 누구도 낯선 이방인의 얼굴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오는 한 남자.


“R 씨, 오셨군요. 바로 올라오셨네요.”


말은 반갑다는 뜻이었지만, 말투는 업무 시작의 알림처럼 건조했다. 환영보다는 브리핑이 더 우선인 분위기였다. 그는 크리에이티브 전략팀 리더 마이클이다.


R은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마이클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말했다.

“제 오피스로 가시죠.”


사무실 복도 중앙에 마이클의 오피스가 있다. 방문이 닫히고, R은 본능적으로 등을 곧게 펴고 긴장했다 마이클은 책상 너머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출근하시는데, 어려움은 없으셨어요? 뉴욕은 처음 이시죠? "


"네, 괜찮습니다."


"이곳은 빠르게 돌아가는 조직입니다.

처음엔 많이 버거울 수도 있지만, 앞으로 잘 적응하실 거라 믿습니다.”


R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마이클은 몇 장의 종이를 꺼내며 브리핑을 시작했다. R은 그의 말에 집중하려 애썼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그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소피아."

마이클은 데스크폰 수화기를 들어 짧게 말했다.


“잠깐 들어와 줄래요?”


잠시 후, 부드럽게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씩 웃으며 들어왔다. 어깨까지 오는 풍성한 파마머리에, 네모난 안경 너머로 반짝이는 눈. 베이지색 카디건을 걸친 모습은 사무실 안에서도 유난히 따뜻하고 느긋해 보였다.


“소피아” 이번에 우리 팀에 합류한 R 씨입니다.”

“자리 안내해 주시고, 간단한 소개도 부탁드릴게요.”


“네, 마이클” 그녀는 경쾌하게 대답했다.


“반가워요, 소피아예요. 환영해요~"

그녀는 R을 보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자리 안내해 드릴게요. 혹시 커피 좋아하세요?

우리 층 커피는 그럭저럭이지만…

3층 카페테리아 커피는 정말 맛있거든요. 거기다가 공짜예요...ㅎㅎ 좀 멀어서 그렇지..."


R은 그녀를 따라나서며 조용히 웃었다. 소피아는 복도를 걸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21층엔 크리에이티브 전략팀, 마케팅, 그리고 디자인실이 있고요"


"회의실은 저쪽이고.."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아, 우리 팀은 좀 자유로운 편이에요. 대체로 오전엔 조용한 편이지만, 마이클은 정시주의 자니까

시간은 꼭 지키는 게 좋겠죠.."


“자~ 이곳이 우리 크리에이티브 전략팀이에요."

"잠깐 인사하시죠.”

"오늘부터 함께 일하실 R 씨입니다."


R은 멋쩍은 듯 팀원들을 바라보며 인사했다. 그의 얼굴엔 어색함이 가득했다.

“안녕하세요. R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기 창가에 앉은 분이 비주얼 디렉터 리처드예요. 말씀이 거의 없지만 아이디어엔 날카롭죠.
그리고 그 옆쪽이 잭, 리서치 담당인데 수치는 정확한데 감성은 제로에 가까워요.”


“캐런은 카피라이팅 담당인데…”

소피아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더니 작게 속삭였다.


“얼굴은 예쁜데 좀 싸가지예요… 어찌나 잘난 척을 하는지.
아니… 뭐, 좀 잘나긴 했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치 들으라는 듯 캐런이 말을 끊고 고개를 돌렸다.


“버몬트 출신이라고요?

여긴 뭐… 일 하는 속도도 다르고, 익숙해지기까진 시간 좀 걸리실 거예요.”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지만, 눈빛은 차가웠다.


“이곳 뉴욕은 속도도 다르고, 기류도 다르거든요. 앞으로 기대할게요.”


그 말은 얼핏 환영 같았지만, 꼭 "얼마나 버티는지 보겠어요" 그 말로 들렸다.



R은 그 말에 가볍게 웃으려 했지만, 입꼬리가 어색하게 떨렸다.

그 순간, 소피아가 조용히 R의 팔을 건드리며 속삭였다.


“신경 쓰지 마세요. 늘 저런 식이에요.

그냥 자기 스타일대로 굴러가는 사람이라 생각하면 편해요.”


“여기가 R 씨 자리예요. 필요한 건 말씀하시고요."


R은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밖의 분주함과는 사뭇 다르게 주변은 놀랄 만큼 조용했다. R의 자리 왼편에 소피아가 앉았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여기서 PM으로 7년째 일하고 있어요. 말이 PM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야 해요..

Pay는 똑같은데.. 이제 열정 pay 시기도 지났는데 말이에요.. ㅎㅎ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 안에 깔린 현실감과 체념, 그리고 지친 유머감각이 묘하게 느껴졌다.


“아, 참... 한 명 빠졌다.. 클레어... 클레어 인턴인데요, 지금 마케팅에 며칠 업무 지원 나갔어요."

약간 긴장 많이 하는 스타일이긴 해도 센스 있고 착해요."


"입사 첫날 실수로 마이클 태블릿에 커피를 쏟아서 어찌나 당황을 했는지.. 지금은 꽤 잘 적응했죠.”


R은 익숙한 ‘클레어’라는 이름에 잠시 놀랐다.


“아시다시피, 크리에이티브 전략팀은 AUREL & Co. 핵심 부서라 직원들 프라이드들이 엄청 강해요

모두 한 성깔 하는 캐릭터이죠... ㅎㅎ"


"그래서, 처음엔 힘들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일들은 참 깔끔하게 해서,

여긴 프로답게 재 속에 맞춰 가는 사람을 더 좋아해요.”


그녀의 말은 마치 이곳에서 오래 버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 같았다. R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R은 조금 긴장이 풀린 듯, 자리에 앉아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21층에서 내려다보는 도시는 복잡하게 얽힌 도로와 크고 작은 빌딩들이 햇살에 부서지고 있었다. 움직이는 사람들, 바쁘게 흐르는 택시, 그 모든 풍경이 마치 거대한 설계도처럼 질서 정연해 보였다.


"준비된 자리에 앉는 것과

그 자리에 '속한다'는 건 다르다는 것."


R은 이제야 그 의미를 조금씩 알아고 있었다. 익숙한 의자에 앉아 있어도, 마음이 아직 그 자리에 닿지 못한 기분이었다.



에필로그


우리는 매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그냥 스쳐 지나간다. 그 속에 피어나는 인연은 우연처럼 시작되지만, 우리가 알 수 없는 감정의 조각들은 이유를 품고 있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 모든 장면들 수많은 이야기가 모여, 이미 우리를 향해 조용히 방향을 틀고 있을지도,

그것은 도시가 우리에게 주는 하나의 ‘작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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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화 예고


AVINE 프로젝트 브리핑 당일.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앞둔 R은,

회의실로 향하기 전, 잠시 들른 사무실 복도 한편에서 뜻밖의 얼굴과 마주친다.

차가운 공기 속, 마주친 그 순간은 불편함과 그리움, 그리고 어떤 감정의 미세한 떨림을 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