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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R에게 기대된 역할은 선명했다. 고객의 정체성과 시장 흐름을 정확히 분석하고, 늘 새로운 방향성과 캠페인을 창조하는 것.
매번 신선한 아이디어를 요구하면서도, 동시에 언제나 검증된 성과를 기대했다. R은 창의성과 현실성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AVINE 리브랜딩 프로젝트' 관련 중요한 브리핑이 있는 날이다. R은 평소 보다 일찍 도착해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준비해 온 자료를 한 번 더 보고 있었다. 회의실 안은 회색 톤 조명 아래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잠시 후 소피아, 캐런이 들어왔고, 곧 따라 잭과 리처드가 함께 회의실로 들어왔다.
서로 눈인사는 오갔지만, 누구도 먼저 말을 잇지 않았다. 회의실 안엔 말보다 더 큰 ‘침묵’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바로 그때, 똑똑—가볍게 노크 소리가 울리고 회의실 문이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고, 순간 R은 깜짝 놀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후 며칠 동안 보지 못한 그녀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클레어가 모두들 향해 짧게 인사를 했다.
소피아가 살짝 미소 지으며,
“클레어 씨 오랜만이네.. 마케팅팀에서 일은 잘 돼 가요? 거기 이 저 저거 엄청 시키죠?
다음 주에 다시 복귀하는 거 맞죠?”
클레어는 작은 소리로 “네” 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 순간 R과 클레어는 서로 눈이 마주쳤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얼굴을 마주친 R과 클레어는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클레어는 순간 동공이 흔들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있지...”
R 또한 그녀의 모습에 깜짝 놀란 사이, 그녀의 이름이 클레어라는 것과 자신과 같은 크리에이티브 전략팀에서 근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곧이어 마이클이 회의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그럼, 지금까지 진행된 프로그레스 리포트를 시작하죠?”
먼저, 캐런이 곧바로 대답했다.
“클라이언트 측 브리핑 내용입니다.”
목소리는 또렷했고, 어깨엔 익숙한 자신감이 실려 있었다.
“AVINE 브랜드 리포지셔닝에 기존 캠페인 메시지 중 일부가 전략 방향성과 어긋난다는 피드백이 있었고, 마케팅팀에서는 SNS 채널 문구와 프로모션 배너 문안을 제품 중심에서 브랜드 중심으로 조정하고, 슬로건 후보도 2~3개 제안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캐런은 클레어를 보면서
“클레어 씨, 부탁드렸던 자료 좀 볼 수 있을까요?”
클레어는 놀란 듯 고개를 들었지만, 곧 말이 흐려졌다.
“그게… 백업 디스크를..... 아직, 정리 중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고,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직도 안되었나요? 지난주에 이야기한 건데..”
캐런은 예의 차린 듯했지만 말끝은 날카로웠다.
“그게… 안 한 건 아닌데... 잃어...버려서”
캐런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클레어의 말을 믿지 못한듯 했다.
“네? 잃어 버렸다구요?” 안한거 아니에요?”
클레어의 이야기를 들은 R은 지난번 지하철역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떠올랐다.
그 순간, 마이클이 다소 언짢은 말투로...
“클레어 씨 중요한 자료일수록 중요하게 챙기고, 우선순위에서 밀리면 안 됩니다.
작은 누락이 전체 프로젝트에 영향을 줄 수 있어요. 빠르게 정리해 주세요.”
회의실 안은 잠시 정적에 잠겼다. 클레어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애쓰며 태블릿을 움켜쥐었고,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죄송합니다… 빨리 정리해서 공유드릴게요.”
캐런은 별다른 말 없이 클레어를 바라봤다. 그 짧은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 걸 말해주는 듯했다.
이때, 지하철 사건을 모르는 소피아가 눈치 빠르게 분위기를 전환하며, 말을 꺼냈다.
“마케팅팀에서 클레어 씨에게 시키는 일이 많은가 봐요..
클레어 씨 자료는 공유되는 대로 확인하고, 잭은 어때요?”
잭은 태블릿 화면을 넘기며 말했다.
“저희 쪽도 AVINE 관련 제안서 업데이트가 있는데, 리처드가 시안 하나 준비해 뒀어요.”
리처드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기며 보탰다.
“이번엔 기존 톤을 좀 정제한 버전이에요. 좀 더 ‘모던하고 자연스러운’ 방향으로 잡았습니다.
자연광 질감과 AVINE의 유기적 감성을 살리는 쪽으로 보시면 될 듯합니다.”
그러는 사이, R의 시선은 조용히 클레어에게 머물렀다. 말없이 화면을 바라보는 그녀의 손끝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는 클레어를 보면서 지난번 일을 생각했다.
‘그때, 지하철에서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말하면 되는 거 아닌가?…’
이어, 마이클이 R을 보며 말했다.
“R 씨는 코어브랜드에서 시니어 컨설턴트로 전략 기획과 리포지셔닝 경험이 많습니다.
우리 팀에 합류시킨 이유는, 우리의 감각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번 ‘AVINE 리브랜딩 프로젝트’를 R 씨가 리딩해 주실 겁니다.”
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R을 향했다.
기대, 경계, 무심함. 각기 다른 표정이 회의실 안에서 조용히 얽혔있었다.
R은 잠시 숨을 고르고 R이 말을 이어갔다.
“네, 이번 ‘AVINE 리브랜딩 프로젝트’에서 구조 재설계와 핵심 메시지 정리를 맡게 되었습니다.
각 팀 간 커뮤니케이션의 일관성을 조율하는 것도 제 역할이고요.”
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캐런이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다.
“R 씨, 그럼 이번 AVINE 메시지 리포지셔닝 안에서 메인 슬로건도 새로 기획되는 건가요?”
R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 듯 캐런을 보면 말했다.
“그건 아닙니다. 기존 프로젝트는 그대로 진행하면서, 이번 리포지셔닝 안은 별도로 구성하려고 합니다.”
그때 다시 마이클이 말을 이어갔다.
“R 씨, 다음 주에 AVINE 클라이언트 미팅이 있으니, 금주 중으로 초안 공유해 주시겠어요?”
“네, 금주 안으로 정리해서 전달드리겠습니다.” R은 자신에 차 있었다.
“그리고 다음 주 클라이언트 미팅은, 캐런 씨가, 함께 가는 게 좋겠어요”
캐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마이클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회의실을 둘러보며 마무리했다.
“좋아요.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죠.”
회의가 끝나자 모두 빠르게 자리를 떴다. 자료는 공유될 것이고, 대화는 메신저로 이어질 테니까 굳이 말이 길 필요는 없었다. R은 자리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그때 클레어가 조용히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그때 엘리베이터서 만나고 오랜만이네요.. 우리 팀 이셨어요?
저번엔 정말 고마웠는데, 뵐 기회가 없어서 말을 못 했네요”
“클레어입니다. ”
R도 당황한 표정으로..
“저..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같은 팀에서 일하게 될 줄은....”
“R입니다.”
클레어는 반가운 마음을 뒤로한 채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그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고, 먼저 나가실래요?. 저 여기 정리 좀 하고..”
그 말에 R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실을 나왔다.
회의실 정리를 마친 클레어가 밖으로 나오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피아가 클레어를 성급히 따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깨달았다.
이 도시에선, 사람을 가장 무너뜨리는 건 큰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가 지나간 뒤의 침묵일지도 모른다는 걸.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조금씩 알 것 같았다. 이 도시에선, 우연도 상처도 다 이유가 된다.
‘사실대로 말 안 하셨어요? 이 말 한마디 못했네....’
R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자신이 침묵한 사실에 대해서 화가 났다.
그날 늦은 밤이 되도록 R은 사무실에서 ‘AVINE 리브랜딩 프로젝트’ 초안을 정리하고 있었다. 몸은 다소 피곤했지만, 그가 버몬트를 떠나면서 다짐했던 일들이 눈앞에 있으니 오히려 정신은 더 맑아지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뉴욕은 여전히 환했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걷고 있었다.
“정말 다들, 행복하게 살고 있는 걸까…”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텅 빈 사무실에 또각또각 구두소리가 들렸다.
“R 씨 아직 안 가셨네요?” R은 고개를 돌렸다. 바로 클레어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가와 그의 책상 옆에 섰다.
R은 반가우면서도 놀란 얼굴로
“네, 자료 정리 중입니다.
클레어 씨는 왜?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저도… 그날 지하철에서 잃어버린 백업 디스크에 있던 자료 정리 했거든요..
뭐, 제 부주의니까 어쩔 수 없죠..
마케팅팀 일도 마무리 해야 하고.”
R도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다 하셨다니, 다행이네요..
다른분들은 그 사실을 모르시니까..”
클레어는 살짝 미소를 보이며
“괜찮아요, 뭐, 제 부주의니까 어쩔 수 없죠..
저, 지금 퇴근할 건데, 혹시 언제 끝나세요?”
“늦었지만 커피 한잔 어떠세요? 회사 앞에 늦게까지 하는 커피숍 있거든요..
그때, 지하철 도둑 잡아주신 거... 고맙기도 했고.. 또 이렇게 다시 만나는 거 신기하기도 하고 ”
그녀의 밝은 모습에 R은 마음이 놓였다. 그런 클레어에게 우연과 인연의 감정 조각들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럴까요?...”
그렇게 두 사람은 맨해튼의 밤거리 속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불빛과 자동차 소음, 바쁘게 지나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들의 걸음은 마치 자신들만의 리듬을 따라가고 있었다.
말보다 먼저 흐르는 건, 아직 다 전하지 못한 서로에 대한 마음이었다.
조금은 어색하고, 조금은 조심스럽지만 그 조용한 공기 속엔 분명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서로의 그림자가 겹쳐지고 마주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온기.
이 순간만큼은, 말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에필로그
어떤 말은, 듣는 순간 아프고 어떤 말은,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아프다.
하지만 가장 마음 깊이 오래 남는 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침묵의 순간이다.
그래서 그 침묵은 결국 마음 한구석에 조용히 자리 잡고,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우리가 무너지는 건, 꼭 큰소리나 날 선 말 때문만은 아니다.
어쩌면 가장 차가운 건, 상처를 주는 말보다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의 그 공기.
서로 마주 앉아 있지만 닿지 않는 마음들 사이에 흐르는 '침묵'
그건 때론, 말보다 훨씬 더 날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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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화 예고
서툰 감정을 감싸주는 또 다른 사람,
R은 AVINE 클라이언트 미팅에서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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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당신의 마음을 다독이는 이야기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