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6화 눌러 놓은 감정이 더 오래 남는다.

서툴지만 로딩 중입니다.

by 슬미탐

AVINE 클라이언트 미팅 며칠 전, 마이클은 R을 조용히 자신의 오피스로 불렀다.

그는 창밖을 잠시 바라보다가, 곧 본론으로 들어갔다.


“AVINE는 정제된 감각과 까다로운 기준을 가진 브랜드예요.

이번 프로젝트 핵심 메시지를 재정비하고, 흐트러진 방향을 하나로 정리하는 것입니다.”


AVINE 클라이언트 미팅 당일, R은 AVINE 본사 앞에서 조금 긴장한 얼굴로 캐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R 씨.”

R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클레어가 다급히 뛰어 오고 있었다.


R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클레어 씨?”


그녀는 약간 숨이 찬 얼굴로, 짧게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소피아 씨에게 연락받으셨어요?

캐런 씨가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서 제가 대신 왔어요.. “


“어, 잠시만요...” R은 그제야 소피아에게 연락 온 문자를 확인했다.


R은 잠시 당황한 얼굴을 하다, 곧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어 씨가 대신 오게 될 줄은 몰랐네요.”


“저도요. 출근길에 급하게 연락받아서.. 늦지는 않았죠?”


“네, 충분히요.”

그 말을 들은 R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클라이언트와의 첫 미팅. 준비해 온 자료는 대부분 캐런의 손을 거친 것이었고,

클레어는 단지 그녀를 대신하여 참석한 입장이었다.


그런 생각이 스치려는 순간, 클레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저번에 소피아 씨랑 한번 같이 오긴 했는데..”


R은 클레어의 말에 조금 안심했지만, 한편으로는 오늘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AVINE 본사에 들어선 R과 클레어는 미팅룸으로 안내를 받았다.

그곳엔 AVINE 마케팅 디렉터 엘리슨과 브랜드 매니저 카밀라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엘리슨은 말을 많이 하지 않지만, 눈빛 하나로 분위기를 주도하는 타입이었고,

브랜드 매니저 카밀라는 섬세하지만 예민하게 반응하는 실무 중심의 감각파였다.


먼저 클레어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클레어입니다. 저번 미팅 때 인사 드렸죠?


오늘 캐런 씨가 급한 사정이 생겨서 제가 대신 참석했어요, 양해 부탁 드립니다.

이쪽은 이번 프로젝트를 맡게 되신 R 씨입니다.”


R은 긴장했지만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AUREL & Co. 의 크리에이티브 전략팀 R입니다.”


마케팅 디렉터 엘리슨은 아침에 마이클에게 연락을 받았다고 짧게 인사한 뒤,

지난번 요청 사항에 대하여 어떻게 수정되었는지 물었다.


그렇게 미팅은 조용한 긴장 속에서 시작되었다.


먼저, R은 준비해 온 프레젠테이션을 열며 말했다.


“요청하신 사항들을 반영하여 제안드릴 방향은 AVINE의 기존 감성과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소비자가 일상 속에서 ‘아주 작지만 분명한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저희는 이걸 Subtle transformation in everyday life,
즉, ‘일상에서의 섬세한 변화’라고 정의했습니다.”


“드러내지 않아도, 존재감 있는 변화. 그게 AVINE가 추구하는 감성이라고 생각합니다.”


R은 차분하게 말을 마무리했다. 논리적으로 정리된 브리핑, 완성도 있는 슬라이드였지만,
엘리슨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한 결을 유지하고 있었다.


슬라이드가 넘어갈 때마다 그녀는 손끝으로 노트를 일정한 박자로 두드렸고,

가끔 옆에 앉은 브랜드 매니저 카밀라와 짧고 조용한 대화를 나눴다.


그 대화는 속삭임이었지만, R에겐 마치 속삭임보다 더 큰 침묵처럼 들려왔다.

‘무표정이 가장 무서운 피드백이다’ 그 말이 떠오르는 순간, 그의 목 뒤로 천천히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당신의 선택, 작은 변화, 확실한 스타일, AVINE'


그때, 엘리슨이 손을 들며 질문했다.

“이 카피. 어떤 감정을 전달하려고 한 거죠?”


“지난번 보다 좋긴 한데.. 뭔가 조금 건조한 느낌이에요.”

순간 회의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R은 말문이 막혀 잠시 말을 고르고 있었다.


“참, 캐런 씨가 담당자죠” 엘리슨은 별 기대하지 않는 듯한 말투였다.


클레어 발표.png

그때 조용히, 클레어가 일어서면서 입을 열었다.


“AVINE은 도시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를 지닌 브랜드지만,

동시에 소비자와의 거리감이 있다는 피드백도 있었어요.


그래서 감정을 지나치게 끌어올리기보단, 여백을 남기는 방식으로 접근해 보면 어떨까요?
소비자가 그 여백을 통해 스스로 감정을 연결할 수 있도록요.”


“당신의 일상에 가장 조용한 변화, AVINE...”

엘리슨이 호기심이 생긴 듯 클레어를 보며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클레어는 조심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눌러놓은 듯한 감정은 오히려 더 오래 남을 수도 있거든요.
도시는 늘 화려하지만, 사람들은 그 안에서 가장 조용한 감정에 오래 머무르잖아요.”


엘리슨은 클레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건 좀 흥미로운 해석이네요.”


“AVINE가 지향하는 정제된 감성, 그리고 감정의 여백.

그걸 이런 식으로 풀어낸 건… 생각보다 더 설득력 있어요.”


그녀는 조용히 시선을 돌려 동료와 눈을 마주쳤고, 다시 클레어를 보며 말했다.


“소비자가 감정을 채우도록 여백을 남긴다…
요즘처럼 강한 메시지에 익숙한 시대에,
그런 조용한 어필은 오히려 더 신선할 수도 있겠네요.”


그 말에 클레어는 약간 놀란 듯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R은 옆에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차분한 언어, 단단한 감각으로 분위기를 전환시킨 그녀. 지금껏 알지 못했던 얼굴이었다.


엘리슨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클레어를 보며 말했다.

“다음 미팅 때도 클레어 씨 함께 오세요. 감각이 있네요. 마이클씨에게 연락해 놓을게요."


클레어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감사합니다" 하며, 이내 수줍게 웃었다.


그렇게 R의 첫 번째 클라이언트 미팅이 끝났다. AVINE를 나서면서 R은 클레어를 보며 말했다.

“… 멋졌어요. 방금.”


클레어는 미소를 지으며..


“휴… 우리 잘한 거 맞죠? 다행이에요..

사실, 이 브랜드, 예전부터 좋아했거든요.ㅎㅎ”


클레어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가슴 한편은 묘하게 따뜻했다.


누군가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믿고 내뱉은 말이 분위기를 바꾸고,

회의의 흐름을 움직이고,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조금 바꿔놓았다는 사실이,

이상하리만치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AVINE 본사 건물을 뒤돌아봤다.

높고 차가운 유리창 너머로 방금 전까지 긴장과 눈빛이 오갔던 회의실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R이 한 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멋졌어요.! 방금.. “


하지만, 클레어는 몰랐다. 그날 같은 시간에, 누군가는 자신의 자릴 지키지 못하고,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AVINE 클라이언트 미팅 후 클레어 이야기는 회사 안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카피 초안을 클라이언트가 바로 채택했다더라”,

“디렉터가 따로 칭찬했대”,

“다음에 같이 오라고 했다는데”


누군가는 부러워하고, 누군가는 놀라는 듯한.. 이야기의 중심에는 클레어가 있었다.

클레어소문.png

그날 오후, 회의실에서 나온 마이클이 클레어를 보며 불렀다.

“클레어 씨.”


그녀가 놀란 듯 고개를 들자, 마이클은 평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AVINE 건 캐런 씨가 없었는데, 잘 처리했어요. 클라이언트 쪽에서도 꽤 만족한 것 같아요.”


클레어는 당황한 듯 멈칫했지만, 이내 작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자신의 언어로 승부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에요. 앞으로도 그런 감각, 잘 살려보세요.”

그 말을 마친 뒤 마이클은 돌아서 걸어갔고, 그 순간만큼은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클레어 스스로를 인정해 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장면을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지켜보던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캐런이었다.

오늘 새벽 그녀의 딸이 갑작스러운 고열로 병원에 갔던 것이다.


그녀는 클레어에게 고맙다는 인사 하지 않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운이 좋았네. 평소에 워낙 말도 잘 못 하던 애였는데, 뭐 하나 걸린 거지.”


클레어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얻은 작은 승리조차, 어떤 이들에겐 견딜 수 없는 자극이 된다는 것과


‘잘한다’는 말 뒤엔

종종 ‘너 따위가?’ ‘그래봐야, 인턴이지’라는 시선이 따라붙는다는 것을..


그 모습을 R이 멀리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클레어는 다시 크레이티브 전략팀으로 복귀해서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환한 조명 아래, 모니터를 켜고 다음 회의 안건을 정리했다.


그날 저녁, 클레어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오늘 하루 애써 눌러 두었던 감정들이, 조용히 새어 나왔다.


마케팅 디렉터 엘리슨의 단단한 표정, 회의실에서 마주친 수많은 시선,
그 속에서 아무 말 없이 침착하게 앉아 있어야 했던 순간들…
모두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애써 덮어 둔 마음들이었다.


클레어는 유리창 속의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아주 작게나마 진짜 미소가 번졌다.


‘그래, 잘하고 있어! 조금 서툴러도 괜찮아.’

그녀는 또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순간이었다..

'띵'

기다리던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는 하는 순간,

“클레어....” 누군가 클레어를 다급하게 부르는데...





에필로그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감정을 눌러 담는다.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이며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 털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여백 속에 오래 머문다.

격렬하게 터진 감정보다 울컥했지만 참은 마음이 더 오래 남는 이유다.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했던 마음.

스쳐가는 말 대신 꾹 눌러 담은 감정 하나.
그것이 더 오랫동안 나를 기억하게 만든다.


그리고 오늘,
그 모든 순간들을 지나
나는 스스로에게 조용히 속삭인다.

서툴렀지만, 그래도 괜찮았던 하루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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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화 예고


클레어를 다 급하게 부르는 그 사람은 누구였을지??..

그리고, 그날 아침, 캐런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점점 미궁속으로 빠져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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