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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설 Oct 19. 2024

[24 일차] 아! 대한국민

Knockin' on Heaven's Door -  고독한 군중

2023년 6월 3일 산 마르틴 델 까미노 - 아스트로가 23.7km


  새벽마다 어김없이 찾아온 날씨 요정이 마술 지팡이를 휘둘러 비를 그쳤다. 성모 마리아가 축복한 태양이 이글거리며 떠올라 짙은 구름을 꾸짖는다. 준엄한 호통에 부끄러워진 회색구름이 붉어진 낯으로 뒷걸음질 쳐 물러난다. 주황색 서광이 푸르스름하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들판은 지루할 짬이 없다.  


  까미노에 펼쳐진 웅장한 파노라마를 감상하는 호사가 여상한 날에 새로운 동행자가 합류했다. 어제 누나와  같은 방을 쓴 경기도 별내에서 온 젊은 여성 순례객이다. 레온에서 순례를 시작했다는 별내댁과 아스트로가까지 이심전심으로 동행하게 되었다. 순례 이틀째인 별내댁은 아직 까미노에 적응하지 못한 초보 순례자다. 듣자니 한국을 떠나기 전 미리 연습 삼아 많이 걷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별내댁 페이스에 맞춰 걷기로 마음먹었다. 느긋하게 평속 사 킬로미터로 걸어도 여섯 시간이면 목적지에 도착한다. 여섯 시 이십 분에 출발한 덕분에 쉬는 시간을 고려해도 오후 한 시 반 안짝으로 아스트로가에 입성이 가능하다. 미리 사립 알베르게에 예약해 두었겠다 서두를 일이 없다. 느긋하게 길을 나섰다.


떠오르는 태양의 정기를 받아 시시각각 변하는 들판. 그 길 위로 순례자들이 행렬을 이어간다.


  순례길에서 누군가와 종일 함께 걷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하물며 같은 한국인 아닌가! 초반에 김 선배 일행과 이틀간 동행한 적이 있긴 하다. 로스 아르코스와 나헤라를 갈  때였는데 두어 시간 같이 가다가 페이스에 달라 중간에 헤어졌다. 오늘은 별내댁이 적응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티 나지 않게 보조를 맞춰 볼 작정이다.


  지금껏 스무 명 넘는 한국인을 만났다. 아마 대부분은 우리와 같은 날에 시작했을 것이다. 첫날에 열 명 넘게 만난 사실과 보통 그론세 닷컴이 추천하는 일정을 따라 하루 이동 거리가 엇비슷한 점을 감안해서다. 프랑스 루트의 첫날에 머무는 론세스바예스엔 알베르게가 하나밖에 없다. 호텔 등 다른 숙소들은 숙박료가 비싸 이용빈도가 낮다. 이 마을 유일한 공립 알베르게는 182명이 정원이다. 우리가 출발한 5월 11일엔 만실에 가까웠다. 아마도 180명 이상이 순례를 시작했을 가능성이 확실하다. 그런 만큼 5월 11일 이곳을 이용한 한국인 순례자 비중은 십 퍼센트가 넘었을 게 분명해 보였다.


   아마 수년 내 산티아고를 순례한 한국인들은 누구나 외국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번 이상 받았을 것이다. 한국인들이 왜 이리 많이 오냐고. 나도 같은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 그럴 때마다 일목요연하진 않아도 머리에 떠오르는 나름의 답을 언급했다. 질문에 답하기 앞서 먼저 주지할 사항이 있다. 내가 걸었던  2023년 산티아고 순례길 통계다. 작년에 순례길을 공식 완주한 순례자는 모두 44만 6천 명이었다. 국적별로는 스페인이 가장 많다. 전체 순례객의 절반 가까운 19만 7천 명이다. 두 번째가 미국인으로 3만 2천 명이다. 한국인은 아홉 번째인 7,563명이다. 얼핏 내 예상에 한창 못 미친 숫자다. 전체에서 1.7%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런데 왜 한국인이 많다는 걸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먼저 아시안 중에 제일 많다. 중국, 대만, 일본, 인도네시아 순례자를 합한 수치보다 조금 더 많다. 까미노에서 마주친 아시안 두 명 중 한 명은 한국인이다. 좀 더 살펴보자. 한국인들은 대부분 생장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생장 피에르 포흐에서 순례를 시작한 완주자는 총 3만 1천 명이다. 보수적으로 한국인 순례자의 칠십 퍼센트가 생장에서 출발한다 가정해도 생장 기점 순례자의 십칠 퍼센트가 한국인이다. 열 명 중 두 명 꼴로 한국인을 만나게 된다. 우리가 출발한 날보다 비중이 더 높다. 한편 산티아고에서 114km 떨어진 사리아는 공식 완주증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마을이다. 거리가 짧아 전체 순례자의 삼분의 일이 이곳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통계상으로 사리아 구간 이전의 프랑스 루트에서 한국인이 많다고 느낄 법하다. 여기에 여행사들이 모아 온 한국인 단체 순례자들이 한 손 거든다. 단체로 무리 지어 다니며 알베르게 베드를 쓸어가는 탓에 이들을 목도한 외국인 순례자라면 극동 아시아의 작은 나라 사람들이 이상하리만치 흔하다 여기기에 충분하다.


  순례자들이 까미노를 방문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전체 순례자의 사십이 퍼센트는 종교적인 이유를 꼽는다. 신앙을 바탕으로 종교적 헌신 차원에서 고행에 나선다. 삼십오 퍼센트는 신앙 이외에 동기부여 등 다른 목적을 언급한다. 비 종교적인 동기를 응답한 이는 이십삼 퍼센트에 불과하다. 이처럼 종교와 신앙 외에도 가족이나 연인의 죽음 혹은 이별에서 오는 상실감, 자아성찰이나 사색 혹은 재충전 등의 동기부여, 트레일링이란 도전과 성취욕구, 여행 같은 다양한 이유와 목적을 꼽을 수 있다.


까미노에서 듣는 새소리는 언제나 싱그럽고 막힌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준다. 이 맛을 느끼려 기꺼이 순례를 자청하는 걸 거다.


  한국인들이 산티아고 순례에 열광하는 현상도 상기한 요인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까미노를 가톨릭 3대 성지의 하나인 산티아고와 성 야고보를 기리는 순례길로 간주하는 것이 전통적인 인식이다. 최근에는 나를 되돌아보는 사색과 성찰의 길 내지 상처받은 자아와 내면을 치료하는 치유의 길이나 도전해야 할 트레킹 코스로 인식한다. 다만 내가 보기에 문제의 본질엔 아직 미흡한 답인 것 같다.


  산티아고 순례는 관심 있는 이들에게 한 번쯤 도전하고 싶은 로망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를 결행하기가 쉽지 않다. 막상 가려해도 만만치 않다. 가장 큰 난관은 충분한 시간을 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는 한 달 이상 장기 휴가를 쓰는 게 아직 보편화되지 않았다. 한 달 넘는 프랑스 루트 순례 일정을 감당할 이들이 많지 않다. 나도 그랬다. 이십여 년 전부터 동경했지만  휴가를 낼 수 없어 퇴직 이후로 미루던 참이었다. 작년에 두 달간 리프레시 휴가를 받는 행운이 없었다면 재직 중에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 순례자 중에 오륙십 대 이상의 은퇴 세대가 가장 많은 이유이다. 그다음도 마찬가지다. 시간에 덜 구애받는 대학생과 취업 준비생,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는 이삼십 대가 대부분이다. 직장과 가사에 바쁠 사십 대가 상대적으로 드물다.


  시간 제약에서 자유로운 한국인들이 순례길을 찾는다는 사실은 질문에 대한 본연의 답이 아니다. 우리보다  더 노령화되었으며 원하는 만큼 휴가를 쓸 수 있는 선진국들에 비해 왜 우리 장년층과 젊은 이삼십 대가 많은 지에 답해야 한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까미노로 부르는 걸까?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잖아요라는 가사처럼 행복을 한마디로 정의하긴 어렵다. 행복을 계량화하려는 시도가 우문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 산하 자문기관에서 매년 발표하는 세계행복보고서를 참고하려 한다. 2024년 조사결과는 다음과 같다. 북유럽과 일부 동유럽, 오세아니아 국가가 대거 상위권을 차지했다. 미국과 서유럽 주요 선진국들은 중위권에 포진해 있다.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6.05로 조사대상 143개국 중 52위에 그쳤다. OCED 38개국 기준으로는 일본에 이은 33위로 최하위권이다.


  특이한 사항은 경제 발전 단계에 따라 연령별 행복지수가 비대칭하게 차이나는 점이다. 이미 부가 축적된 선진국은 노령층의 행복 순위가 최상위권인 반면 연령이 낮아질수록 급격히 떨어져 중하위로 쳐진다. 예를 들어 미국의 육십 세 이상의 행복 순위가 10위인데 반해 삼십 세 이하는 62위다. 선진국 경제는 저성장 트랩에 갇혀 일자리 경쟁이 치열하며 실업 문제가 꽤 심각하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허약해져 상위 계층으로 오를 기회가 적다. 사회 역동성이 떨어진 만큼 신분 구조가 고착되어 미래의 나은 삶을 꿈꾸기 어렵다. 그 결과 희망을 잃은 채 불만족스럽게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리라. 반대로 개발 도상국은 나이가 젊을수록 행복지수 순위가 높다. 당장은 초라하고 비루하지만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거란 믿음이 통용되는 사회일수록 저 연령대의 행복지수가 높다는 건 행복의 조건에서 꿈과 희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반증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도 저도 아닌 정체된 모습이다.


  우리나라는 불균형 압축 성장을 지향한 개발정책에 근거해 분배를 뒷전으로 해왔다. 개발 시대의 주역인 노령층은 소득의 상당분을 주택 구입과 자녀 교육, 결혼 비용 등에 충당해야 했다. 노후 준비가 불충분하여 노인 빈곤이 사회 이슈로 부상 중이다. 전 세대 중에 육십 세 이상 노령층의 행복도가 가장 낮다. 순위로는 59위다. 삼십 세 이하나 사오십 대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삼십 세 이하의 행복순위는 52위, 사오십 대는 55위다. 그나마 순위가 가장 높은 삼사십 대마저 45위에 그친다. 스스로를 낀 세대라 토로하는 이 세대의 행복도가 다른 세대보다 콩알만치 높은 건 직장과 일을 중시한 이전 세대와 달리 개인 사생활과 여가를 우선시하는 라이프 스타일에 있을 거라 추측된다.


  개도국 청년들과 달리 우리 젊은 세대가 그리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궁금하다. GDP 성장률 삼 퍼센트에 흡족해하는 저성장 사회에서 이들은 유아기 때부터 무한 경쟁에 내몰렸다. 지옥 같은 입시 전쟁의 승자가 되어도 대학에 진학하자마자 숨 돌릴 틈 없이 곧바로 취업 전선을 준비하는 전사로 거듭난다. 문제는 그래봤자 바늘귀 통과하는 낙타 신세를 면치 못한다는 점이다. 1980년에는 대학 진학률이 이십칠 퍼센트에 불과했다. 고교 졸업생 네 명 중 한 명만 대학에 들어갔다. 고도성장 시기에 풍족한 일자리를 메꿀 대졸 취준생들이 한정되었다. 2023년 진학률은 무려 칠십삼 퍼센트였다. 네 명 중 한 명만 대학에 들어가지 않는다. 일자리는 형편없이 줄었는데 경쟁할 대상이 두 배가 늘었다. 눈에 불을 켜도 고소득 직종은 극히 제한적이다. 대기업과 금융권, 일부 전문직을 제외하고선 통상 최저 임금을 면하는 수준에 수렴한다. 반면 고려시대 음서제로 변질된 수시 입시를 대비하려면 엄청난 사교육비가 부담이다. 정시는 하늘의 별따기다. 집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올랐다. 부모 찬스가 없는 청년들을 흑수저라 칭하는 게 공감된다. 만혼과 출산 태업이 미풍양속으로 정착한 현실이 어찌 이해되지 않겠는가! 아이들에게 꿈이 없는 나라, 아니 꿈을 꿀 수 없게끔 독촉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고단한 삶에 지신 심신을 아름다운 강과 메마른 황토 자갈길, 거친 황야를 동변상련의 순례자들과 어울려 걸어가다 보면 어느새 지독한 고독의 끝에서 헤쳐나온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전쟁을 방불케 하는 경쟁에 시달린다. 장성한 이후에는 가사와 일에 치여 자신을 돌아볼 여유는 값비싼 사치다. 퇴직할 때까지 법정 휴가조차 제대로 소진하지 못한 채 활시위를 팽팽히 바짝 당겨야 한다. 엉겁결에 시위를 놔버리면 그나마 현재 누리는 지위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마땅히 감내해야 한다. 이삼십 년을 이렇게 긴장 속에 살아가려니 얼마나 고단하겠는가! 정년퇴직은 땡큐일 테고 원치 않은 해고여도 훌훌 털어낸 다음 어디라도 떠나자는 심정일게다. 휴학이나 일시적인 실직에 직면해도 마찬가지다. 군중 속에서 무기력하게 고독했던 만큼 자연을 벗 삼아 고독에 푹 절여진 자신을 뽀송하게 말리려는 욕구가 간절할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가슴속에 수십 년 동안 똬리 튼 자유에 대한 갈증을 툴툴 털어내려는 건 아닐까 싶다.


  긴장은 우리가 누군가 되려 하거나 무언가 이루려 할 때 생기고 이완은 우리가 처한 상황을 덤덤히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 이완은 결코 포기가 아니다. 내일을 향한 재충전이다. 죽음보다 더 큰 공포가 어디 있으랴! 우리가 당면한 헬조선이 죽음보다 두려운 대상이 아닐 것이다. 두 눈 부릅떠 직시할 일이다.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보안관일지언정 이를 평온히 받아들여 죽음 앞에 무력한 자신을 평온한 수용의 감정으로 승화시킨다. 까미노에서 듣는 Bob Dylan의 'Knockin’ on heaven’s door(190위)'가 오늘따라 더 새롭게 와닿는다.


Bob Dylan - Knockin’ on Heaven’s Door(1973년, 190위)


  중세 시대 순례자들에게 병원과 휴식처를 제공했던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 마을에 들어섰다. 이 마을은 오르비고강을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푸엔테 데 오르비고 돌다리와 명예로운 길을 뜻하는 엘 파소 호노로스라는 마상 창대결로 유명하다. 기사 수에로 데 키뇬네스는 실연의 고통 끝에 사랑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성 야고보 축일인 7월 25일 전후 한 달 동안 창 삼백 개를 부러뜨릴 때까지 오르비고 돌다리를 건너는 기사와 결투를 벌였다. 동료 기사들과 함께 결투에 나서 마침내 자신의 명예를 지켜낸 그는 성 야보고를 기리기 위한 순례를 떠났다. 매년 6월 첫째 주에 그를 기리기 위한 축제가 벌어지는데 때마침 오늘이 그날이다. 다리 옆 공터에는 마상 창시합 경기장이 마련되었고 인도 주변으로 노점들이 줄지어 축제 준비에 한창이다. 이른 아침이라 아쉽게도 축제 전이다. 주택가 샘터에 잠시 앉아 지축을 울리는 기사의 말발굽 소리를 연상하며 쉬다가 마을을 빠져나왔다.   


  발데이글레시아스의 평원과 언덕을 지나 빌라레스 데 오르비고 마을에 세워진 순례자의 십자가에서 걸음을 멈췄다. 땡볕 아래 걷는 게 힘들었는지 별내댁 페이스가 조금씩 쳐져 그늘 쉼터에서 꿀 같은 휴식을 가졌다. 현재 시각 열 시 삼십 분. 세 시간만 더 걸으면 된다며 격려했다. 다시 길을 나섰다. 떡갈나무가 우거진 숲을 빠져나와 부드럽게 이어진 마른 흙길과 너덜 길을 지나 성 토르비오의 십자가에 도착했다. 저 아래로 아스트로가 전경이 훤히 보인다. 육 킬로미터 남짓 남았다. 아스트로가 전 마지막 마을인 산 후스토 데라 베가에서 목을 축이기로 했다. 카페에 들어가 레몬 조각을 얹은 콜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명예로운 길'에서 치열한 결투 끝에 온갖 아픔과 삭신의 아픔과 심연의 고통을 쓰러트렸다. 동네 터줏대감 고양이와 개들이 나그네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줄거라 누가 알았으랴.


  아스트로가 초입에서 별내댁과 헤어졌다. 그녀가 머물 알베르게는 언덕을 좀 더 올라야 한다. 우리가 예약한 마이 웨이 알베르게는 아담한 뜰을 'ㄷ' 자로 품은 남향집이다. 모녀가 정성껏 관리했을 베드가 하얗고 정갈했다. 때 늦은 점심은 무척 소담스러웠다. 잠깐 시에스타를 즐겼다. 한결 개운해진 몸을 이끌어 마실을 나갔다. 언덕 위 성당 옆에 로마 성벽과 목욕탕 유적이 있다. 고대 로마 시대에 군사 요충지이자 북부 지역에서 채굴된 금을 수송하는 교통 중심지였던 아스트로가는 중세 기독교 왕국의 주요 거점으로 레콘 키스타에서 일익을 담당했다. 마을을 대표하는 아스트로가 대성당과 가우디가 건축한 주교궁을 둘러본 다음 언덕을 내려갔다. 밑에서 올려다본 주교궁 풍경이 색달랐다. 마을 곳곳을 둘러보며 중앙 광장에 들어섰다. 고대에 찬란했던 아스트로가로 타임 슬립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오늘 밤에는 마술로 되살아난 고대 로마의 번화가에서 활개 치며 노닐 것만 같은 기분이다. 신발에 단 천사의 날개로 하늘을 날아올라 춤추는 남자가 되어. 도시가 깨어나 사람들이 디스코 리듬에 몸을 흔들어 대면 지독한 경쟁통에 녹초가 된 한국인이더라도 이 순간만큼은 살아 있음을 느끼겠지. The Bee Gees가 나는, 우리는, 아니 대한국민은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흥겹게 외쳐댄다. 디스코 시대의 서막을 화려하게 올린 그들의 대표곡인 'Stayin’ alive(189위)'에서.


The Bee Gees - Stayin’ Alive(1977년, 189위)


서쪽 하늘을 향해 끝모르게 이어진 흙길을 따라, 노란 화살표와 십자가를 따라 정진하다 보면 하루 안식할 숙소를 만나게 된다. 매일 그리하면 된다. 인생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우디 주교궁과 아스트로가 대성당 전경, 고대 로마 광장에 들어선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아스트로가 광장. 독수리를 짓누르고 선 사자. 전성기 레온 왕국의 영화를 상징하는 것 같다.



김 선배가 오늘 철의 십자가에서 일출을 맞이했다. 우리는 이틀 뒤에 철의 십자가를 만난다. 이십 년 전부터 이곳 돌무덤 위에 서 있는 나를 갈망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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