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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설 Oct 05. 2024

[22 일차] 한 스푼의 욕망

소개하지 못했던 명곡들 (하)

2023년 6월 1일 레온 연박


  어제 우리가 배정받은 방은 육 인실이었다. 이층 침대 세 개와 화장실 딸린 샤워실에 붙박이 옷장이 구비된 방이다. 보통 알베르게 관리인이 방뿐만 아니라 베드까지 지정하는데 성 프란치스코 알베르게는 호실만 지정해 주었다. 그래서 먼저 온 순례객들이 우선적으로 베드를 고를 수 있다. 먼저 도착한 브라질 육십 대 부부가 문 왼쪽 침대에서 쉬고 있었다. 어느 자리를 고를까 하다가 누나에게 아래칸 두 개를 쓰자고 제안했다. 베드를 자유롭게 고르게 되면 다들 아래칸부터 차지한다. 순례 초반, 숙소에 늦게 도착했던 우리는 두어 번 남은 위칸 중에서 침대를 골라야 했다. 한 번쯤 우리도 아래칸을 써보고 싶었다.


  침대 양쪽으로 아래칸을 하나씩 차지해 짐을 풀었다. 아래칸이 확실히 편했다. 침대에서 벗어날 때 다리를 내려 엉덩이만 들면 그만이다. 침대에 누워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며 오랜만에 안락한 호사를 누렸다. 하지만 기분이 점점 전전반측 불안해졌다. 누나마저 위칸을 써야 했던 당시의 달갑지 않은 심정이 떠올랐다. 우리만 편하자고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불편함이 머리를 들었다. 그래도 크게 고민하지 않으려 했다. 괜찮아 자유롭게 고를 권리를 누린 것뿐이니까. 애써 기분을 속였다. 비가 그친 후 레온 산타 마리아 대성당 가는 길을 익힐 겸 대성당 주변을 둘러본 다음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 늦게 포르투갈에서 온 젊은 연인 둘이 입실했다. 비어 있는 이층 침대 두 칸에 별 말없이 짐을 풀었다. 두 사람이 짐 정리를 마칠 때까지 침대를 바꾸자 얘기할까 고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며 눈을 감았다. 밤새 찜찜했다. 새벽녘에 브라질 부부가 떠났다. 아침 일찍 누나에게 얘기했다. 누나 역시 마음이 불편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포르투갈 젊은이들이 깨기 전, 조용히 브라질 부부가 쓰던 자리로 옮겼다. 연인들이 일어나자 어젯밤 일을 사과했다. 자리를 옮겼으니 남은 침대 중 마음에 드는 걸로 편히 쓰라 제안했다. 밝은 미소로 괜찮다는 제스처와 함께 자리를 옮겼다. 자기들도 우리처럼 연박을 한다면서. 그제야 아래칸을 독점해 바위에 눌렸던 마음이 풀렸다. 아침 먹으러 가는 발걸음이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역시 자유는 파레토 최적 안에서 누려야 했다.       

             

  철학자 세네카는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이 우리를 가난하게 만든다고 했다. 심리학자 칼 융은 욕망은 우리의 삶을 이끄는 불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을 태워버리기도 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하룻밤 편하게 자려했던 작은 욕심이 내 마음을 가난으로 이끌었으며 고통스럽게 불살라 버렸다. 한 스푼에 지나지 않았을 욕망에서 헤어나지 못한 결과였다. 다시는 아랫칸을 독점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Howlin Wolf가 내 어리석은 한 줌의 욕망을 'Spoonful(219위)'에서 제대로 표현했다. 한 스푼에 지나지 않는 오욕칠정 때문에 울기도 하며 싸우다 죽는다. 작은 스푼에 담긴 조그마한 배려와 사랑이 나를 만족시키는 줄 모르고 말이다.


Howlin Wolf - Spoonful(1960년, 219위)


  미망을 헤쳐 나와 밝아진 마음처럼 밖은 눈이 시리도록 화창했다. 레온 한 복판에 우뚝 서 있는 레온 대성당에 갔다. 부르고스 대성당과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모신 대성당이다. 그러나 똑같은 고딕 양식임에도 둘의 외관이나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전자는 3세기에 걸친 화려함이 극치를 이루는 반면 후자는 백 년이 채 안돼 완공되어 그런지 간결한 웅장함이 돋보인다. 레온 대성당을 돋보이게 해주는 건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유리화다.


  성당 안에서 고개 들어 보는 유리화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유리화가 물결치는 바다 위로 오색 찬란한 빛의 파도가 넘실거린다. 부르고스 대성당의 화려하기 그지없는 내외부 장식에 견줄 만큼 화사하게 아름답다. 그런데 산타 마리아 대성당에 들어설 때와 달리 몸매를 가다듬어 경건한 기도를 올렸다. 왜 그랬을까? 아마 자유민과 농노들이 처한 낮은 곳에 임하려는 성직자와 건축가의 배려에 나도 모르게 감흥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쇄술이 보편화되기 전인 중세 시대에 필사된 책을 가질 수 있는 계층은 극히 소수였다. 성직자나 왕족이 아니면 봉건 영주와 기사 같은 귀족들 만이 성경을 소장할 수 있었다. 이런 연유로 교회는 글을 못 읽거나 성경을 갖기 힘든 평민들을 위해 성당 내부를 유리화와 성화로 꾸몄다. 성경의 장면이나 성인의 일생 등을 묘사한 스테인드글라스는 이들에게 눈으로 보는 성경이었을 것이다.


유리화가 물결치는 바다 위로 오색 찬란한 빛의 파도가 넘실거린다.


  레온 대성당이 친근하게 다가서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레온 대성당의 구성원들은 성당 문화와 예술이 가톨릭 교회나 동시대 신자들만의 것이 아니라 시대를 뛰어넘어 후대를 위한 것이라는 성숙된 의식을 가졌다. 하여 성당에 맞붙은 부속 건물을 수리해 박물관으로 활용했다. 사각형 건물의 박물관에는 로마네스크 시대의 조각품을 포함해 1,500 여점의 교회 예술품이 소장되어 있다. 정원을 품은 'ㅁ' 자 모양의 회랑에는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고 복도 천장에는 프레스코화로 그려진 성화가 가득 차 있다. 유럽의 유명한 성당 박물관 중에서도 높이 평가받는 이유이다.


  현란하게 눈부신 유리화를 제외하면 레온 대성당은 산타 마리아 대성당에 비해 단순한 절제미가 돋보인다. 간결한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부르고스 대성당이 신라의 금관이나 불상이라면 레온 대성당은 백제의 왕관 내지 부처상에 비유할 만하다. 유홍준 교수는 단아하면서 우아한 디자인의 왕관과 부드럽고 온화한 '백제의 미소'를 엿볼 수 있는 서산 마애 삼존불에서 백제의 심미적이고 평온한 미의식을 격찬했다. 반면에 신라 왕관은 화려하고 상징적인 장식을 통해 신성한 왕의 권위를 드러내며 석굴암 본존불의 신비로운 미소는 종교적 상징을 넘어 자비로운 인간미를 보여준다고 평한 바 있다. 레온 대성당은 표현과 감정의 절제로 드러낸 우아한 부드러움이 호화롭고 찬란한 아름다움에 못지않다는 사실을 알려준 소중한 기회였다.


  박물관 정원에서 누나 사진을 찍는데 옆에 순례 중인 걸로 보이는 미국인 모녀가 번갈아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마땅히 부탁할 사람이 없어 그런 거 같아 내가 찍어줄 테니 둘이 같이 서보라 말했다. 뜻밖의 호의에 웃으며 핸드폰을 건넨다. 답례로 우리를 찍어주겠다는 말에 괜찮다며 손사래 쳤다. 부엔 까미노 하자며 서로 인사했다. 사진 촬영해 준 인연이 간단치 않았는지 이들 모녀를 산티아고에 도착할 때까지 매일 한두 번씩 마주쳤다. 매번 오늘도 만났다는 반가움에 격의 없는 미소를 주고받았다. 그녀들의 밝은 미소는 줄리아 로버츠를 닮았다. Roy Orbison이 부른 영화 ‘프리티 우먼(1990년)’의 주제곡 'Oh, pretty woman(222위)'의 경쾌한 드럼과 시원한 기타 장단에 어울리는 미소다.


Roy Orbison - Oh, Pretty Woman(1964년, 222위)


  성당을 나와 주변을 거닐며 도심을 잠시 구경했다. 숙소를 돌아가기 전에 ATM기기에서 유심을 충전했다. 기간이 며칠 남았는데 남은 기간 중 충전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다. 유심 연장이 되었다는 통신사 메시지가 왔다. 누나와 달리 충전금액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답신이 마음에 걸려 매장을 방문했다. 문의 결과 기간 종료되면 자동으로 연장된다는 확인을 받았다. 누나가 가벼운 감기에 걸린 것 같다. 잦은 기침을 한다. 다음 주에 철의 십자가와 오 세브레이로를 넘어야 하는데. 당분간 누나 컨디션에 유의하면서 어지간하면 동키를 보낼 작정이다.  


성당 박물관의 회랑과 정원, 대성당 이정표와 광장, 가우디가 건축한 보티네스 저택




지면의 한계로 소개하지 못한 명곡들 (하)


Bonnie Raitt - I can’t make you love me(331위)

  블루스 가수 보니 레이트가 애절한 감정을 담담하게 드러냈다. 헤어지려는 연인과 마지막 사랑을 나눈 뒤 아침이 밝아 오면 사랑의 전쟁을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을 담았다. 전쟁 같은 사랑을 그만두고 너를 위해 떠날 거란 임재범의 '너를 위해'가 떠올랐다.

Bonnie Raitt - I Can’t Make You Love Me(1991년, 331위)


Black Sabbath - Iron man(310위)

  1970년 하드 록과 헤비메탈 사운드의 전형을 알려준 메탈 음악의 클래식이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미래 여행을 다녀온 선구자가 부작용으로 철인으로 변해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다가 결국 분노에 휩싸여 인류에 복수를 결심한다는 내용이다.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만화 '마즈(1976년)'가 이 노래에서 영감을 얻은 걸까? 마즈는 고대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들이 심어놓은 감시인이다. 인류의 잔혹성을 일찌감치 파악한 그들은 인류 문명이 발달해 언젠가는 우주에 피해를 줄거란 우려에 감시인 마즈가 로봇 가이아와 이를 수호하는 6 신체를 잠들게 했다. 이들을 깨울 정도로 과학이 발달하면 마즈가 가이아를 자폭시켜 지구를 멸망시킬 계획을 세웠다. 마즈는 자신을 발견한 박사의 딸과 친해지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에게 내려진 사명에 반해 6 신체와 맞서 싸운다. 그러나 격렬한 전투 과정에서 도시가 파괴되고 무고한 이들이 희생당하자 사람들이 마즈에게 돌을 던지며 비난한다. 인간의 잔혹성을 체감하게 된 마즈는 마침내 가이아를 자폭시킨다. 어째 맥락이 아이언 맨과 유사하지 않나? 예술은 시대와 영역을 넘나들며 서로에게 창작의 영감을 주고받는 것 같다.


Black Sabbath - Iron Man(1970년, 310위)


 Neil Young - Heart of gold(297위)

  닐 영이 등을 다쳐 공연을 제대로 하기 힘든 시기에 만들었다. 심신이 아프고 지쳤을 때 마음씨 좋은 사람들을 만나며 대인 관계의 소중함을 깨달았다고 했다. 당시 닐 영의 심정을 그린 듯 노래 속 주인공 역시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을 찾고 싶어 한다. 나를 이끌어준 고마운 인연들을 되돌아보게끔 해준 노래다.


Neil Young - Heart of Gold(1972년, 297위)


Bill Withers - Ain’t no sunshine(280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 말더듬증을 앓았던 빌 위더스는 구 년 동안 해병으로 근무하다가 항공기 부품 공장의 노동자로 일했다. 주경야곡의 노력 끝에 이 곡을 발표하여 하룻밤 새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단조로우면서도 격정적인 슬프고 애절한 멜로디로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https://youtu.be/5PeyzXvvdmw?si=GrKdMfNJOKmQLaL8

Bill Withers - Ain’t no sunshine(1971년, 280위)

 

Chuck Berry - Sweet little sixteen(272위)

  척 베리가 콘서트장에서 가수들에게 사인을 받으려는 10대 소녀들을 보고 작곡했다고 알려진다. 원곡보다 The Beach Boy의 'Surfin’ USA(1963년)'이 더 유명하다. 라디오를 듣던 척 베리가 깜짝 놀랐다는 일화가 있다. 결국 저작권의 반을 넘기는 대가로 저작권료를 받았다고 한다.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다 보면 표절의 유혹에 쉽게 무릎 꿇기 쉽다. 늘 경계해야 할 일이다.


Chuck Berry - Sweet Little Sixteen(1958년, 272위)


Jeff Buckley - Hallelujah(259위)

  1984년 발표된 레너드 코헨의 동명곡을 어쿠스틱 버전으로 재해석한 커버곡으로 원곡보다 낫다는 찬사를 받았다. 노래 제목으로 인해 신을 찬양하는 CCM으로 많이 오해받는다. 다윗과 밧세바, 삼손과 들릴라의 세속적이며 금지된 사랑으로부터 인간의 고독과 상실감을 노래했다. 할렐루야는 상처받고 무너진 상태에서 고귀한 존재에게 드는 찬양이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극한의 경지에 몰린 상태 혹은 성적인 쾌감의 절정에서 저절로 자아내는 감탄이기도 하다. 신성과 불완전한 인간의 사랑을 중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리 인기가 없다가 1997년 제프가 요절한 후 그가 남긴 유산으로 점차 유명해졌다.


Jeff Buckley - Hallelujah(1994년, 259위)


Black Sabbath - Paranoid(250위)

  블랙 사바스가 1970년에 발표한 동명의 앨범에 수록된 타이틀 곡이다. 그런데 앨범을 기획할 때 미리 계획 게 아니라 앨범에 채워질 시간이 부족해 급조된 곡이었다. 강렬한 기타 리프와 빠르고 경쾌한 템포에 간결하고 단순한 구성으로 대중들에게 크게 어필했다. 곡이 인기를 얻으면서 원래 붙였던 'War Pigs'란 앨범 제목을 'Paranoid'로 바꾸었다고 한다. 블랙 사바스를 헤비메탈의 원조라 일컬어지게 해 주었다.


Black Sabbath - Paranoid(1970년, 250위)


The Sugarhill Gang - Rappers delight(248위)

  힙합 최초로 빌보드 핫 100위에 진입한 곡으로 뉴욕의 하류 문화였던 힙합을 대중에게 처음으로 널리 알렸다. 또한 Chic의 히트곡 'Good time(1979년)'의 베이스 라인을 샘플링하여 샘플링을 힙합의 작법으로 자리 잡도록 했다. 경쾌한 디스코 비트에 리드미컬한 랩이 일품이다.


The Sugarhill Gang - Rappers Delight(1979년, 248위)


The Animals - We gotta get out of this place(233위)

  1960년대 중반 급속한 도시화 속에서 자신의 삶에 불만이 컸던 미국의 젊은이들이 크게 공감했다. 지난한 도시에서 희망조차 쉽지 않을 정도로 힘겹게 살아가는 노동자, 빈민 계층의 애환을 그렸다. 더 이상 고통과 억압에 시달리지 말고 더 나은 곳으로 떠나자는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어렵게 취업을 해도 앙등한 집값과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사교육비에 허덕이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힘내라 들려주고 싶다.


The Animals - We Gotta Get Out of This Place(1965년, 23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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