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하지 못했던 명곡들 (하)
2023년 6월 1일 레온 연박
어제 우리가 배정받은 방은 2층 침대 3개가 비치된 6인실이다. 보통은 베드까지 지정하는데 성 프란치스코 알베르게Albergue Residencia San Francisco de Asís는 호실만 지정하여 선착순으로 베드를 고를 수 있다. 먼저 도착한 브라질 60대 부부는 출입문 왼쪽 침대에서 쉬고 있었다. 2층 침대 하나를 고를까 하다가 누나에게 아래칸 두 개를 쓰자고 제안했다. 베드 선택이 가능하면 다들 아래칸부터 차지한다. 출입하기 편해서다. 나도 한 번쯤 아래칸을 써보고 싶었다.
침대 양쪽으로 아래칸을 하나씩 차지했다. 아래칸이 확실히 편하다. 사다리를 오르내릴 일이 없으니 말이다. 오랜만에 침대에 뒹구는 안락한 호사를 누리는데 기분이 점점 불안해졌다. 늦게 도착한 날 누나도 위칸을 써야 했던 달갑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만 편하자고 이래도 되나 고민되었다. 그래도 크게 신경 쓰지 말자 했다. 괜찮아 자유롭게 고를 권리를 누린 것뿐이니까. 애써 찜찜한 기분을 속였다. 비가 그친 후 길을 익힐 겸 레온 산타 마리아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ía de León 주변을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 늦게 포르투갈에서 온 젊은 연인들이 입실해 비어 있는 이층 침대에 짐을 풀었다. 두 사람이 짐 정리를 마칠 때까지 자리 바꾸자 얘기할까 고민하다가 눈을 감았다. 밤새 전전반측했다. 새벽 일찍 브라질 부부가 떠났다. 아침 일찍 누나에게 얘기했다. 누나 역시 마음이 불편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포르투갈 젊은이들이 깨기 전, 조용히 브라질 부부가 쓰던 침대로 옮겼다. 연인들이 일어난 후 어제 일을 사과했다. 남은 침대 중 마음에 드는 걸로 편히 쓰라 제안했다. 밝은 미소로 괜찮다는 제스처와 함께 여성 순례자가 아래칸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제야 아래칸을 독점해 바위에 눌린 듯한 답답한 마음이 풀렸다. 아침 먹으러 가는 발걸음이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포근하다. 역시 자유는 파레토 최적 안에서 누려야 했다.
철학자 세네카는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이 우리를 가난하게 만든다고 했다. 심리학자 칼 융은 욕망은 우리의 삶을 이끄는 불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을 태우기도 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하룻밤 편히 자려던 작은 욕심이 내 마음을 가난으로 이끌고 깡그리 불살라 버렸다. 한 스푼에 불과한 욕망에 사로잡힌 채. 다시는 아래 칸을 독점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Howlin Wolf가 내 어리석은 한 줌의 욕망을 'Spoonful(219위)'에서 절묘하게 표현했다. 한 스푼에 지나지 않는 오욕칠정 때문에 죽자사자하며 싸운다. 작은 스푼에 담긴 조그마한 배려와 사랑이 나를 만족시키는 줄 모르고 말이다.
미망을 헤쳐 나와 그런지 밖은 눈이 시리도록 화창했다. 레온 한 복판에 우뚝 서 있는 레온 대성당에 갔다. 부르고스 대성당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모신다. 그러나 같은 고딕 양식이라도 외관이나 분위기는 서로 사뭇 다르다. 전자가 3세기에 걸친 화려함이 극치를 이루는 반면 후자는 간결한 웅장함이 돋보인다. 레온 대성당을 돋보이게 하는 건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유리화다.
성당 안에서 쳐다보는 유리화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유리화가 물결치는 바다 위로 오색 찬란한 빛의 파도가 넘실거린다. 부르고스 대성당 안팎의 화려하기 그지없는 장식 못지않게 화사하고 아름답다. 그런데 부르고스와는 달리 이곳에 들어설 때 옷차림새를 가다듬어 경건한 기도를 올렸다. 자유민과 농노들을 배려하는 성직자와 건축가의 숨은 정성에 감흥 했기 때문이다.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은 중세 시대에 필사된 책을 가질 수 있는 이들은 극히 소수였다. 성직자나 왕족 외에 봉건 영주와 기사 같은 귀족 계층만 성경을 소장할 수 있었다. 교회는 글을 못 읽거나 성경이 없는 평민들을 위해 성당 내부를 유리화와 성화로 꾸몄다. 성경의 한 장면이나 성인의 일생을 묘사한 스테인드글라스는 이들에게 눈으로 보는 성경이었을 것이다.
레온 대성당이 친근하게 다가서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레온 대성당 관계자들은 성당 문화와 예술이 가톨릭 교회나 신자들의 것이 아니라 여겼다. 시대를 이은 후대의 것이라는 성숙된 의식을 가져 성당 부속 건물을 수리해 박물관으로 활용했다. 사각형 모양의 박물관에는 로마네스크 시대 조각품을 포함해 1,500여 점의 교회 예술품이 소장돼 있다. 정원을 품은 'ㅁ' 자 모양의 회랑에 조각상들이 전시돼 있고 복도 천장에 프레스코화로 그려진 성화가 가득 차 있다. 유럽의 유명한 성당 박물관 중에서도 높이 평가받는 이유다.
찬란하게 눈부신 유리화를 제외하면 레온 대성당은 산타 마리아 대성당에 비해 단순한 절제미가 돋보인다. 간결한 절제미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부르고스 대성당이 신라 금관이나 불상이라면 레온 대성당은 백제 왕관 내지 부처상에 비할 만하다. 유홍준 교수는 단아하고도 우아한 왕관과 부드럽고 온화한 '백제의 미소'가 돋보이는 서산 마애 삼존불에서 백제인의 심미적이고 평온한 미의식을 격찬했다. 반면에 신라 왕관은 화려하고 상징적인 장식을 통해 신성한 왕의 권위를 드러내며 석굴암 본존불의 신비로운 미소는 종교적 상징을 넘어 자비로운 인간미를 보여준다고 평한 바 있다. 레온 대성당은 표현과 감정의 절제로 드러낸 우아한 부드러움이 호화롭고 찬란한 아름다움에 필적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박물관 정원을 둘러보는데 순례자로 보이는 미국인 두 모녀가 번갈아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마땅히 부탁할 사람이 없어 그런 거 같아 찍어줄 테니 둘이 같이 서 보라 말했다. 뜻밖의 호의에 웃으며 핸드폰을 건넨다. 답례로 우리도 찍어주겠다는 말에 괜찮다며 손사래 쳤다. 부엔 까미노 하자고 인사했다. 사진 찍어준 인연이 간단치 않았는지 이들 모녀와 산티아고에 도착할 때까지 매일 한두 번씩 마주쳤다. 만날 때 마다 반가워하며 격의 없는 미소를 주고받았다. 그녀들의 밝은 미소는 줄리아 로버츠를 닮았다. Roy Orbison이 부른 영화 ‘프리티 우먼(1990년)’의 주제곡 'Oh, pretty woman(222위)'의 경쾌한 드럼과 시원한 기타 장단에 어울리는 미소다.
성당을 나와 주변을 거닐며 시가지를 둘러보았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ATM기기에서 유심을 충전했다. 기한이 며칠 남았지만 레온을 벗어나면 만료 전에 충전할 곳이 마땅치 않아 그랬다. 유심이 연장됐다는 통신사 문자가 왔다. 누나와 달리 충전금액이 별로 없다는 답신이 신경쓰여 매장을 방문했다. 만기가 되면 자동으로 연장된다는 확인을 받았다. 누나가 가벼운 감기에 걸린 것 같다. 잦은 기침을 한다. 다음 주 철의 십자가와 오 세브레이로를 넘어야 하는데. 당분간 누나 컨디션에 유의하여 웬만하면 동키를 보낼 작정이다.
지면의 한계로 소개하지 못한 명곡들 (하)
Bonnie Raitt - I can’t make you love me(331위)
블루스 가수 보니 레이트가 애절한 감정을 담담하게 드러냈다. 헤어지려는 연인과 마지막 사랑을 나눈 뒤 아침이 밝으면 사랑의 전쟁을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을 담았다. 전쟁 같은 사랑을 그치고 떠날 거란 임재범의 '너를 위해'가 생각난다.
Black Sabbath - Iron man(310위)
1970년 하드 록과 헤비메탈 사운드의 전형을 알려준 메탈 음악의 클래식이다. 인류를 구원하려고 미래 여행을 다녀온 대가로 선구자가 철인으로 변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외면하고 무시하자 분노에 차 인류에게 복수를 결심한다는 내용이다.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만화 '마즈(1976년)'가 이 곡으로부터 영감을 얻었을까? 마즈는 고대에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들이 심어놓은 감시인이다. 인류의 잔혹성을 일찌감치 파악한 그들은 인류가 언젠가 우주에 피해를 줄 걸 우려해 마즈와 로봇 가이아, 이들을 수호하는 6 신체를 동면시켰다. 마즈는 6 신체가 파괴될 정도로 과학이 발달하면 가이아를 자폭시켜 지구를 멸망시키게끔 프로그래밍 되었다. 그러나 인간에 호의를 갖게 된 마즈는 6 신체와 맞서 싸운다. 격렬한 전투 과정에서 도시가 파괴되고 무고한 이들이 희생당하자 사람들은 그에게 돌을 던지며 비난한다. 인간의 잔혹성을 체감한 마즈는 절규하며 가이아를 자폭시킨다. 예술은 시대와 영역을 뛰어넘어 창작의 영감을 잇는 것 같다.
Neil Young - Heart of gold(297위)
닐 영이 등을 다쳐 공연조차 하기 힘든 시기에 작곡했다. 심신이 아프고 지쳤을 때 마음씨 좋은 사람들을 만나 대인 관계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자신의 심정을 그린 듯 노래 속 주인공 역시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을 찾고 싶어 한다. 나를 이끌어준 고마운 인연들을 되돌아보게 하는 노래다.
Bill Withers - Ain’t no sunshine(280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빌 위더스는 9년간 해병으로 근무하다 전역해 항공기 부품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주경야곡晝耕夜曲의 노력 끝에 이 곡로 하룻밤 새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단조로우면서도 격정적인 슬프고 애절한 멜로디로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https://youtu.be/5PeyzXvvdmw?si=GrKdMfNJOKmQLaL8
Bill Withers - Ain’t no sunshine(1971년, 280위)
Chuck Berry - Sweet little sixteen(272위)
척 베리가 콘서트장에서 사인을 받으려는 10대 소녀들을 보고 작곡했다고 알려진다. 원곡보다 The Beach Boy의 'Surfin’ USA(1963년)'가 더 유명하다. 그는 라디오에서 표절곡을 듣고 깜짝 놀라 협상 끝에 저작권 절반을 넘기는 대가로 저작권료를 받아냈다. 백인가수가 흑인가수 히트곡을 일상으로 표절한 시절이 있었다. 창작의 고통을 겪다 보면 표절의 유혹에 무릎 꿇기 쉽다. 늘 경계할 일이다.
Jeff Buckley - Hallelujah(259위)
레너드 코헨이 1984년에 발표한 동명의 노래를 어쿠스틱 버전으로 재해석한 커버곡이다. 원곡보다 낫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노래 제목으로 인해 신을 찬양하는 CCM이라 오해를 받았다. 다윗과 밧세바, 삼손과 데릴라의 세속적이고 금지된 사랑에서 비롯된 인간의 고독과 상실감을 노래했다. 할렐루야는 상처받고 무너진 상태에서 고귀한 존재에게 드리는 찬양이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극한의 경지 혹은 성적인 쾌감의 절정에서 저절로 자아내는 감탄사다. 신성과 불완전한 인간의 사랑을 중의적으로 표현했다. 처음에는 그리 인기가 없다가 1997년 제프가 요절한 후 점차 유명해졌다.
Black Sabbath - Paranoid(250위)
블랙 사바스가 1970년에 발표한 동명의 앨범에 수록된 타이틀 곡이다. 그런데 앨범 기획 당시에 미리 계획한 게 아니라 앨범을 채울 시간이 부족해 급조된 곡이다. 강렬한 기타 리프와 빠르고 경쾌한 템포에 간결하고 단순한 구성이 인기의 비결이다. 곡이 인기를 얻자 원래의 'War Pigs'란 앨범 제목을 'Paranoid'로 바꾸었다고 한다. 블랙 사바스를 헤비메탈의 원조로 부상시킨 기념비적인 앨범이다.
The Sugarhill Gang - Rappers delight(248위)
힙합 최초로 빌보드 핫 100위에 진입했다. 뉴욕의 하류 문화이던 힙합을 대중에게 처음으로 널리 알렸다. Chic의 히트곡 'Good time (1979년)'의 베이스 라인을 활용한 샘플링 기법이 힙합의 작법으로 자리잡게 하였다. 경쾌한 디스코 비트에 리드미컬한 랩이 일품이다.
The Animals - We gotta get out of this place(233위)
1960년대 중반 급속한 도시화 속에서 자신의 삶에 불만이 컸던 미국의 젊은이들이 크게 공감했다. 지난한 도시에서 희망조차 쉽지 않을 정도로 힘겹게 살아가는 노동자, 빈민 계층의 애환을 그렸다. 더 이상 고통과 억압에 시달리지 말고 더 나은 곳으로 떠나자는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어렵게 취업을 해도 앙등한 집값과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사교육비에 허덕이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힘내라 들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