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31일 만시야 델 라스 물라스 - 레온 18.5km
새벽 말미에 전혀 예기치 않은 꿈을 꿨다. H은행 투자전략부장으로 있는 과 동기 K가 급한 부탁을 해왔다. 지주회사에서 H금융그룹의 미래발전전략을 준비 중인데 은행에 할당된 과제를 맡았다고 했다. 염두에 둔 주제가 있냐고 물었다. 친구는 아무래도 핀테크를 강조해야 하지 않겠냐며 반문했다. 너네가 6 년 전에 설립한 핀테크 자회사인 '핀크'의 누적 적자가 천억 원에 가까운 만큼 추가로 핀테크 진출을 모색하는 것보다 기존 비즈니스 모델을 어떻게 개선해 사업성을 확보할 계획을 고민해 보라 일렀다. 뭐라도 성공해야 그룹의 핀테크 전략이 탄력 받지 않겠냐면서.
구체적인 나름의 견해를 제시했다. 마이데이터 사업자와 제휴해 개인신용정보를 최대한 수집한다. 그다음, 은행의 기존 신용모델은 깡그리 무시하고 성별, 나이, 학력, 결혼 여부, 세대수, 카드와 통신비 연체 횟수 등 구분 가능한 모든 파라미터를 분류해 대출 이력과 연체 실적을 검증하는 빅데이터 분석으로 계량신용모델을 새로 구축한다. 마지막으로 이를 '핀크'의 기존 대환대출 서비스와 연계시키되 H은행 고객이 아니어도 이용가능하게끔 시스템을 개선하라고 조언했다. 고금리 시대에 새로운 신용모델로 평가된 차주에게 경쟁력 있는 최저 대출금리를 제시함으로써 H은행의 대출이 증가하는 시너지가 기대되며 핀테크의 핵심은 무엇보다 닫힌 시스템이 아닌 오픈 플랫폼이어야 한다는 강조와 함께.
꿈속에서 했던 내 제안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거나 합리적인지는 중요치 않다. 그저 떠오르는 대로 얘기했을 뿐이니까. 단지 꿈결에 한숨 돌렸다고 안도하는 친구의 웃음에 족했다. 그간 내게 힘이 되어준 동기에게 보답할 기회를 얻어 기쁠 뿐이다. 꿈이 좋은 건 현실에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꿈은 일종의 보상기제이다. 무의식적으로 바라마지 않던 욕구가 꿈을 통해서라도 구현되기를 간절히 희망하는 것이다. 희망 없는 삶은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인생과 다름 아니다. 꿈이 꼭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꿈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비몽사몽 중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로부터 부풀어 올랐던 만족감이 얼마 못 가 잦아들었다. 출발할 무렵이었다. 우리 앞쪽 베드를 썼던 독일인 부부가 배낭을 챙겨 먼저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잘 가라는 배웅 인사를 했는데 눈동자만 힐끔 돌리고 나서는 못 들은 것 마냥 일언반구 없이 그냥 문을 나서는 게 아닌가? 전날 만찬 때도 다른 순례자와는 달리 우리에게만 말을 걸지 않는 등 투명인간 취급하던 기억이 겹쳤다. 기분이 좀 상했다. 푸엔테 비야렌테 근처에서 만났을 때도 그랬다. 분기점에서 지도를 보고 있길래 그대로 직진하라 일러줘도 고맙단 인사 한 마디가 없다. 그나마 아내가 겸연쩍은 눈웃음을 살짝 비춘 게 전부다. 남편은 시종일관 무시하는 모습이었다. 공치사받자는 건 아니었지만 썩 개운치 않았다.
이게 말로만 듣던 인종차별인가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딱히 그들에게 실수한 게 없었던 걸로 짐작해 볼 때 한국 순례자나 한국인에게 안 좋은 기억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되었거나 설령 인종차별을 당했다 쳐도 마음에 담아둘 일은 아니다. 살다 보면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날 수밖에 없지 않겠나. 산티아고 순례길을 앞서 다녀왔던 분들도 아주 가끔 인종차별을 겪었던 경험을 토로하곤 했으니까.
사자굴을 향한 아침 첫 발걸음이 무거웠던 것은 사람에 대한 상념에 젖어 들었기 때문이다. 이유없는 불편함은 과연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중 기억에 남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다. 장년의 한국 여성분-이하 A-의 사연이다. 며칠 전부터 비슷한 연령대의 미국 여성-이하 B-과 길에서 마주치거나 같은 숙소에 머물렀는데 A가 다가가는 걸 꺼리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알베르게 만찬에서 서로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요리가 나오기 전 차례대로 자기소개를 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A가 영어를 잘 못한다며 짧게 얘기했다. 그러자 B가 주위 사람 들으라는 듯 영어도 제대로 못하면서 무슨 순례냐며 핀잔하듯 크게 웃었다. A는 결례라 여겼지만 그냥 넘겼다. 이어 B가 제공된 와인을 근처에 앉은 순례자들에게 쭈욱 따라주는데 바로 옆에 앉은 A만 패스하더란다. 슬슬 부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까 했지만 이미 지불한 식대가 아깝기도 하거니와 어찌 되었건 시장기는 달래야겠기에 애써 견뎠다. 샐러드가 나왔다.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그릇을 전달받아 자기 접시에 담은 후 옆 사람에게 건네주기 시작했다. B 차례가 되었다. 그녀는 자기 접시에 담고는 A를 건너뛰어 그 옆 자리 앞에 샐러드 그릇을 넘겼다. B가 선을 넘은 것이다. 이미 엉망이 된 기분에 저녁을 먹어도 얹힐 거라 여긴 A는 구글 번역기를 돌렸다. 한국에서 태어나 비록 영어에 능숙하지 않지만 네가 무시할 만한 인생을 살지 않았다. 너는 미국에서 태어나 영어가 자연스러울지 몰라도 그간의 언행이나 행색으로 보아 나보다 잘난 것 같지 않은데 왜 그리 유난을 떠냐. 부끄러운 줄 알아라. 앞으로 나 보면 조심해라. 이런 요지를 핸드폰 볼륨을 높여 좌중이 다 듣게끔 한 연후에 자리를 떴다. 홍당무가 된 B의 얼굴을 잔뜩 째려보면서.
나라면 어떻게 대응했을까? 아마 굴욕을 느꼈어도 성격상 스피커를 틀지 못했을 것 같다. 조용히 왜 그러냐 물어보며 해명을 요구하는 정도에 그쳤을 공산이 크다. 한쪽 이야기만으로 B에게 인종차별 의도가 분명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냥 A가 싫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지나친 결례였음은 분명했다. 확실히 도를 넘은 B에게 항의한 A의 대응을 지나치다 보기 어렵다. A로선 그 순간 최선을 다해 부당한 처사에 저항했으니 말이다.
그녀의 기지에서 오랫동안 잊었던 ‘2857 버스’를 상기했다. 바로 로자 파크스의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사건이다. 1955년 12월 1일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백화점에서 일하던 그녀는 퇴근 후 집으로 가기 위해 2857 버스를 탔다. 버스에 올라 뒷부분 유색인 칸으로 지정된 열한 번째 좌석에 앉았다. 몇 정류장을 지나 앞쪽 백인 전용칸은 만석이 되었다. 또 다른 정류장에서 백인 네 명이 탔다. 버스 운전사가 흑인 전용칸으로 가서 백인들에게 앉을자리를 내어주라고 했다. 당시 미국에는 버스에 탑승한 흑인 승객을 차별하는 법이 존재했다. 버스 기사는 백인이어야 하며 흑백 좌석을 분리해야 한다. 맨 앞 네 줄은 오로지 백인만 앉되 흑인 전용칸에 앉은 흑인은 서 있는 백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기사의 요구대로 앉았던 세 명의 흑인 승객이 자리를 양보했다.
그러나 로사는 이를 거부했다. 백인에게 양보할 이유가 없다며 한사코 버텼다. 화가 난 버스기사는 그녀를 경찰에 신고했고 결국 로사는 체포되어 끌려갔다.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 흑인 여성이 감옥가게 생겼다는 소식에 지역의 흑인 사회가 동요했다. 재판이 열리는 날, 모든 시민들이 항의하는 뜻으로 버스를 보이콧하자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재판 결과 법원은 로자 파크스에게 벌금 십 달러와 소송비용 사 달러를 합해 십사 달러를 선고했다. 벌금 액수와 상관없이 부당하다 여긴 그녀는 곧장 항고했다. 흑인 단체는 무명의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내세워 382일간 무저항 버스 보이콧 운동을 이어나갔다. 일 년이 지나 대법원은 인종차별과 분리행위가 위헌이라 판결했다. 하지만 차별에 항의하는 흑인들의 거센 저항을 가라앉히기엔 너무 늦었다. 조직화된 흑인 인권 운동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로자 파크스가 흑인 인권의 애드발룬을 띄운 지 이십 년이 채 되지 않은 1970년대, 뉴욕 브롱크스의 아프리칸 아메리칸과 라틴 청년들로부터 비롯된 힙합 물결이 백인들을 서서히 변화시켰다. 빈곤과 차별, 경찰의 부당한 폭력, 그리고 삶의 애환을 생생하게 그려낸 힙합 가사로부터 흑인들의 처지를 공감하게 되었다. 힙합의 강력한 메시지는 백인 사회가 불평등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도록 도와주었다. 백인 청소년들이 힙합 문화에 열광하면서 흑백의 문화적 경계가 조금씩 허물어져 나갔다.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연대의 싹이 틔우기 시작했으며 흑인 사회가 미국 대중문화의 중심에 서는 계기로 작용했다. 문화의 힘은 위대했다. 음악이 미국 사회에서 뿌리 깊었던 인종 갈등을 해소하는 특효약이었으니 말이다.
힙합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오랜 꿈을 이뤄주었다. 언젠가 미국이 일어나 만인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진리를 자명하게 받아들이는 신념의 진정한 의미가 실현되는 꿈을 말이다. 이처럼 위대한 힙합 역사 중에서도 'Planet rock(237위)'은 미국 팝 음악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982년 Afrika Bambaataa와 Soulsonic Force가 싱글로 발표한 이 곡은 전통적인 펑크나 소울 샘플링에서 벗어나 최초로 전자 음악을 샘플링했다. 힙합에 독일 크래프트베르크 그룹의 전자음악을 채용한 것이다. 이 노래를 시발탄으로 힙합과 R&B, EDM 등 팝송의 다양한 장르에서 신시사이저와 드럼머신이 필수 장비로 자리 잡았다. 이후 디제잉을 장착하고 브레이크 댄스로 중무장한 일렉트로닉 힙합은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랩으로 미국을 넘어 전 세계를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Afrika Bambaataa and the Soul Sonic Force - Planet Rock(1982년, 237위)
‘2857번 버스’처럼 갈등이 긍정적으로 승화된 경우도 있지만 무사히 종착지에 이르지 못한 채 끝내 비극적인 파국으로 치달은 사례 또한 많다. 나치가 조장한 '아리안 민족주의'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히틀러는 아리안 인종, 그중에서도 북유럽에 자리한 게르만 민족이 지구상에 가장 우월한 민족이라 맹신했다. 인종적으로도 우수한 특성을 지닌 위대한 아리아인이 인류를 지배해야 한다고 믿었다. 독일 사회에서 게르만 순수혈통을 위협하는 유대인과 집시, 슬라브인을 열등하고 위험한 존재로 간주하여 박해했다. 아리안 민족의 번영을 위해서라면 열등한 민족들은 희생시켜도 무방하다 여겨 동유럽을 나치의 제물로 삼았다.
이 같은 나치 사상은 배타적 민족주의가 극에 달한 파시즘이다. 나치즘은 모든 민족이 평등하며 세계 평화를 위해 민족 간의 협력을 강조하고 민족자결과 자주국가를 형성할 권리를 인정하는 보편적 민족주의를 부정한다. 게르만 민족의 세계 정복이란 광기를 실현하려던 나치는 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란 인류 역사상 전대미문의 참극을 이끌었다. 그런데 열혈 나치당원이나 히틀러를 추종하는 광신도만으로는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한 홀로코스트를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겉보기에 선량해 보이는, 하지만 선악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지 않은 채 비인도적인 상부의 명령을 아무 생각 없이 충실히 따른 아돌프 아이히만 같은 소시민들의 삐뚤어진 협조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한나 아렌트가 지목했던 '악의 평범성'이야말로 대학살의 주범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만났던 독일인 남편이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 믿고 싶다. 까미노에 선 인종차별주의자 내지 배타적 민족주의자라니. 상상이 가지 않을 일이다. 악의 평범성을 따르는 이라 여기고 싶지도 않다. 살다 보면 아무 이유 없이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이가 있지 않나. 나 또한 그런 편견에 사로 잡히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독일인 부부가 그랬을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도 아니면 남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B형 남자겠거니 치부하기로 했다. 침소봉대해 고결한 순례의 의미를 허물고 싶지 않았다. The Byrds는 자신에게 싫증난 여인이 떠나 주기를 바랐다. 'I’ll feel a whole lot better(234위)'의 당신이 떠나면 기분이 훨씬 좋아질 것이라는 구절처럼 독일인 부부를 더 이상 보지 않게 되자 기분이 점차 되살아 났다.
보편적 민족주의가 지향하는 평등은 까미노 어디서나 쉽게 체험할 수 있다. 다리가 불편하거나 나이 많은 어르신이나 건장한 체격의 젊은이들이나 목적지까지 모두가 똑같이 한 걸음씩 걸어야 한다. 체구가 좋다 해서 두세 걸음을 한 번에 뗄 수 없다. 한 발자국을 내디뎌야 하는 조건이야 같다 해도 다리 불편한 덴마크 아주머니와 누가 짊어져도 무거울 배낭을 멘 헝가리 할머니의 까미노가 신체 건강한 청춘들의 기행과 같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 분들의 미소가 더 환히 빛나는 건 장애와 나이가 주는 핸디캡에 굴하지 않고 순간순간의 고통을 이겨낸 아름다움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걸음씩 쌓아 레온까지 18.5 km의 진보를 찬찬히 이뤄낸 숭고한 아름다움이다.
그렇다. 그녀들의 걸음처럼 진보는 무수한 이들이 누적한 역사의 공덕으로 만들어진다. 미국 시민들이 남북 내전을 승리로 이끈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에 만족하는데 그쳤다면 어땠을까? 명목적으로야 노예제가 폐지되었겠으나 관습상 여전히 백인우월주의가 미국에 팽배했을는지 모른다. 바로 이 점에서 로자 파크스와 같은 작은 저항들이 역사의 진보에 한 손을 거들었다. 흑인 인권의 한계를 넓히는 불쏘시개가 된 것이다.
까미노에서도 고행의 진보를 맛볼 수 있다. 순례에 적응하는 초반엔 이십 킬로미터 정도가 걷기 적당했다. 이 거리를 훌쩍 넘게 걸으면 제법 피로했다. 그런데 일정상 선택의 여지없이 삼십 킬로미터 가량을 한 두 번 걸은 결과, 이제 이십 킬로미터 정도는 가뿐하다. 동네 마실 가는 듯해 걸은 거 같지 않다. 이렇게 보면 진보는 어느 날 갑자기 손에 쥐어지는 게 아니다. 힘들게 마련한 여건 속에서 조금씩 한계에 적응해 나가 한 뼘 한 뼘 지평을 늘려나감으로써 진보를 이뤄내는 것이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첫 술은 뜨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지 그 자체로 배 부를 수 있으랴! 지난날 내 젊음 역시 마땅히 그래야 했다. 앞으로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
스무 해 전에 타계한 Ray Charles는 음악적 진보를 이룬 싱어 송 라이터였다. 그가 레날드 리처드와 공동으로 작곡한 'I got a woman(235위)'는 팝 역사상 중요한 시금석 중 하나로 최초의 소울이란 영예를 얻었다. 소울 음악은 흑인의 정서와 영혼을 대변한다. 종교적인 가스펠의 영향을 받아 소울 가수들은 자신의 감정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가창법을 구사하며 백 보컬과 교감을 나눈다. 블루스의 감성을 밑바탕에 두되 R&B의 강한 리듬과 멜로디에 재즈의 풍부한 화성을 혼합한 장르적 특징이 있다. 레이 찰스는 가스펠 곡조에 블루스의 감성과 세속적인 가사를 결합한 소울의 선구자였다.
Ray Charles - I Got a Woman(1954년, 235위)
상념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레온에 가까워졌다. 고속도로 옆으로 난 순례길을 따라 언덕에 올랐다. 저 아래로 너른 평원에 카스티야레온주의 중심지 레온이 가득 펼쳐져 있다. 부르고스에서 시작되는 백칠십팔 킬로미터 메세타의 절정이 갈무리되는 곳이다. 아침에 겪은 유쾌하지 않은 끈적한 기억은 오전 내내 롤링 스톤지가 꼽은 명곡으로 바짝 말려 탈탈 털어버린 지 오래다. 헝가리 할머니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사이좋게 레온시 외곽에 들어섰다.
오래된 성당 위 종탑 자리에 나무덤불로 만든 황새집이 얹혀 있다. 이곳의 황새들은 겨울이 되면 이베리아 반도를 종단해 지브롤터 해협과 사하라를 건너 그들의 서식지로 이동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삼천 킬로미터를 순례하는 황새는 우두머리를 정해 무리 지어 난다. 우두머리라 해서 독단적으로 무리의 이동을 정할 수 없다. 무리의 대다수가 동의해야 가능하다. 대신 일단 이동이 결정하면 어디로 향할지는 우두머리 새에게 전적으로 맡긴다. 무리는 우두머리가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 우두머리가 더 안전하고 먹잇감이 많은 곳으로 이끌 거라 믿는 것이다. 우두머리는 바람을 잘 살펴야 한다. 순풍을 타야 무리가 부담 없이 날 수가 있다. 간혹 역풍을 거슬러 나는 경우가 있는데 힘들어도 황새무리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며 우두머리에게 보낸 신뢰를 거두지 않는다. 우두머리가 무리의 믿음을 깬 적이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오해였으면 좋을 끈적거리는 기억을 탈탈 털어내며 사자굴을 향해 나간다. 덴마크 아주머니와 잠깐 행보를 같이 했다. 그녀도 무사히 완주하기를 기원했다.
황새무리가 수천 킬로미터를 거뜬히 날아가는 원동력은 서로를 믿는 신뢰의 행진에 있다. 그들은 하늘을 날 때 무슨 생각을 할까? 적어도 나처럼 누구를 책망하거나 의심하는 번민에 사로잡히지는 않겠지. 나를 비롯한 모든 인류에게 황새의 신뢰가 가득하면 어떤 기적이 일어날지 궁금하다. 황새 무리들에게도 까미노를 걸어가는 우리가 바라듯이 안전하고 평안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기를. 그리하여 우두머리의 바람대로 어느 한 마리도 낙오되지 않은 채 건강하게 겨울집으로 귀향할 수 있기를 기원했다.
드디어 용기 없는 사자가 겁도 없이 사자굴 한복판에 들어섰다. '라이온 킹(1994년)'의 스카를 닮은 간악한 사자를 만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레온 대성당이 그리 멀지 않은 카푸친 수도회가 운영하는 성 프란치스코 알베르게에 짐을 풀었다. 레온대학과 여타 교육기관에 속한 학생들이 기숙하는 곳이라 그런지 전반적으로 관리가 잘 되어 깔끔하고 편의시설이 풍족한 숙소이다. 만나는 직원들마다 순례객들을 진심으로 응대하는 마음이 전해졌다. 잠시 잃어버렸던 나그네의 행복을 까미노에서 만난 덴마크 아주머니와 헝가리 할머니, 당나귀 가족과 명곡, 그리고 황새와 알베르게의 친절한 스태프들이 되찾아 주었다.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다.
주택가 널찍한 마당에 사는 당나귀 일가, 레온을 향해 헝가리 할머니가 묵묵히 앞서 나간다.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가는 황새가 종탑위에 둥지를 틀었다. 모두가 나를 위로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