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cket Man - 로캣맨에게 필요했던 의지와 결단
2023년 5월 30일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까미노 - 만시야 델 라스 물라스 26.3km
순례를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이 들어 심기일전하기로 했다. 내일은 사자의 도시 레온에 도착한다. 조만간 메세타 구간이 끝난다. 알려진 바와 달리 지루하지 않았던 길. 고지대의 대평원과 차분히 작별하자는 마음으로 출발했다. 오전 5시 40분, 간단히 세면 한 후 떠날 채비를 했다. 베드 주위에 빠진 물건이 있는지 살피고 나서 침낭을 둘둘 말아 배낭에 얹어 조용히 방을 나왔다. 휴게실을 열지 않아 복도에서 소리 죽여 짐을 정리했다. 곤히 잠든 투숙객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새벽에 떠나는 순례자들이 지켜야 할 알베르게 에티켓이다. 동키로 보낼 짐은 잠긴 현관 앞에 세워뒀다. 떠나기 전에 하룻밤 편히 보낸 라 페랄라Albergue La perala 전경을 한껏 눈에 담았다. 뜨내기손님을 진객으로 환대한 주인 할머니께 고맙다는 가슴속 인사와 함께.
동트기 전이라 사방이 제법 어둡다. 고요함이 잔뜩 물든 거리 위에 자박대는 안단테 리듬의 발자국이 정적을 깨운다. 덩그러니 서있는 가로등이 순례자에게 길 밝히며 잘 가라 인사했다. 푸르스름한 구름아래 아무도 없는 거리를 걷는 기분은 언제 맛봐도 상큼하다. 부지런한 이들은 이 맛에 늦잠의 유혹을 뿌리치나 보다. 마을을 빠져나와 가도에 들어섰다. 빨간색 SUV가 전조등을 켠채 횅하니 지나친다. 왜 그리 바삐 가는지 궁금해 뒤돌아봤다. 구름이 무성한 하늘 아래로 땅끝이 붉어진다. 짙은 주황색을 머금은 아침노을이 상서롭게 다가왔다. 여명이 시작되기 직전의 신비로운 새벽녘 분위기가 당조唐朝의 유명 시인 온정균의 '상산조행商山早行'의 시구와 잘 어울렸다.
'새벽 일찍 일어나 말방울 울리며 출발하니 나그네 길은 고향 생각에 슬퍼지네
닭 우는 소리에 지는 달은 초막 위에 걸리고 서리 내린 판자다리 위로 발자취 남아 있네'
이른 아침에는 딱히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떠올리려 애쓰지 않는다. 인위적인 단상이나 소고에 연연해 고즈넉이 저물어가는 새벽의 흐름을 놓치고 싶지 않다. 서광이 던져주는 감상과 심정에 충실하다 보면 단 몇 초라도 자연과 물아일체로 동화되는 평정심을 음미할 수 있다. 그러다 저절로 떠오르는 건 마다치 않고 하나씩 차분히 마주한다. 지나온 옛 일은 곱씹으며 마음 깊이 담아둔 후회는 되새긴다. 순례하며 얻은 짧은 성찰과 각오를 잊지 않으려 다짐한다. 하루 중 아주 짧게 허락된 시간이다. 이 때는 롤링스톤지가 선정한 500대 명곡을 듣지 않는다. 나중에 얼마든지 들을 시간은 충분하니까.
구름이 꽤나 성나 있다. 해가 한참 전에 떴는데 여전히 잔뜩 찌푸린다. 구름에 가려 대지가 달아 오르지 않아 빈 속을 데울 음식이 당겼다. 마침 첫 번째 마을인 엘 부르고 라네로El Burgo Ranero에 라면 파는 식당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현지인이 맛있게 끓여준다길래 들릴 참이었다. 프랑스 루트에서 라면을 제공하는 식당이 내가 알기로 세 군데 있다. 지난번 카스트로헤리스에서 찾았던 오리온 알베르게와 이 마을의 펜션 레스타우란테Pensión Restaurante, 그리고 엿새 뒤에 도착할 라바날 델 까미노Rabanal del Camino의 알베르게 필라Albergue Pilar다. 이곳은 라면을 스파게티 그릇에 담아낸다. 현지인이 조리하는 터라 맛을 기대하기 보다 라면 먹는 자체에 의의를 두려 했다.
야외 테이블은 MTB 순례자들로 만석이었다. 주차된 자전거가 간판을 가려 여긴 아니겠지 하고 지나치려던 순간, 분필로 적은 입간판에 ‘신라면 + 햇반’이라는 한글이 반갑게 시선을 잡아끈다. 옳다구나, 여기로구나. 누나를 가게 안으로 끌었다. 아침에 라면 괜찮지라는 물음에 누나도 반색했다. 그런데 자리가 없다. 어제 만난 한국인 젊은 여성 순례자가 자기는 다 먹었다며 합석을 권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방금 식사를 마친 상태다. 라면을 주문하고 돌아와 그녀와 짧은 한담을 나누었다.
사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십여 일 전이다. 에스테야 아니면 로스 아르코스 근처로 기억된다. 그녀를 지나치며 인사했는데 냉랭한 답변에 말을 섞기가 싫은가 보다 여겼다. 한국 청년들이 순례길에서 장년의 한국인과 어설프게 말을 나눴다가 예의 없는 하대와 당돌한 요구에 질색한다는 얘기를 익히 알던 차였다. 불필요한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아 그 이후 서너 번 더 만나도 못본 척 했다. 그러다가 어제 식료품 앞에서 다시 만났다. 시에스타로 문 닫은 가게가 5시 오픈이라 다들 식품점 주위에 서성이던 참이었다. 뒤늦게 도착한 그녀는 가게가 닫힌 줄 알고 우리더러 영업 끝났냐고 물었다. 아직 오픈 전이니 그늘에서 같이 기다리자 했다. 그리 좋지 못한 기억에 말을 더 잇기 불편했다. 볼 일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누나가 한 마디 했다. '급하긴 급했나 봐. 한국어가 바로 튀어나오는 거 보니.'
그녀에게 처음 만난 당시 상황을 얘기했다. 어두운 표정에 말 붙이기가 어려웠다고. 그녀는 그 무렵 물집이 잡혀 걷는 게 너무 힘들고 경황이 없었다고 했다. 좀 나아졌지만 지금도 썩 좋은 상태가 아니라면서. 미리 걷는 연습을 하지 않아 고생이 많았다는 것이다. 의사소통마저 쉽지 않아 초반에 괜히 왔다는 후회와 포기하고 돌아갈까 하는 고민이 컸단다. 한 걸음 떼는 자체가 이미 고통이었을 텐데 생면부지의 행인이 건네는 인사에 신경 쓸 여력이나 있었을까? 적응하기 어려웠던 저간의 사정을 몰라 크게 오해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말처럼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나 보다. 그제서야 완만한 언덕을 오르던 그녀 행색이 어딘가 지쳐 보이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리를 살짝 절뚝인 거 같기도 했고. 내 마음대로 섣불리 판단한 확증편향이 미안했다. 진심을 담아 홀로 걷는 만큼 절대 무리하지 말라 조언했다. 컨디션에 맞춰 걸으면 충분히 완주할 거라 격려했다. 라면 덕분에 오해를 풀게 되어 다행이었다. 맛도 오리온 알베르게보다 훨씬 나았다. 모두가 기대 이상이었다.
의지할 곳 하나 없는 낯선 환경과 30일 넘게 걸리는 도보 순례에 맞이한 최악의 컨디션이라면 나라도 막막했을 게다. 산티아고까지 완주할 수 있을지 번민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내게도 미래를 회의적으로 그리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원 졸업은 내 인생의 두 번째 전환점이었다. 대학원 2학기 말이었다. 재무관리 전공에 신임 교수를 충원하기로 했다. 임용 후보자들에 대한 공개 프레젠테이션이 진행되었다. 경영학과 교수님 외에 석박사 과정들도 참관이 허용되었다. 후보 교수 중, K 교수와 C교수가 발군이었다. 두 후보자 중 누가 임용되어도 충분한 자질을 갖췄다. 공히 PT를 진행하는 아우라가 보통이 아니었다. K 교수는 기 발표된 연구실적에서 탁월했다. C 교수는 비록 등재된 연구 건수가 K 교수보다 적지만 메이저급 저널에서 에디팅 중인 톱픽이 있었다. 만일 아티클이 최종 게재된다면 연구 역량의 잠재력을 인정받을만했다. 내심 C 교수가 되길 바랐다. K 교수의 실증 연구도 흥미로왔지만 C 교수가 소개했던 마르코프 체인 Markov chain을 활용한 주가결정모형이 참신해서다. 2학기에 동태적 자산가격 결정이론, CAPM과 OPM 등을 증명하는 수리 재무이론 수업에서 마지막 남은 벽 하나가 버겁던 차였다. 나를 한 단계 레벨업 시킬 깨달음이 올 듯 말 듯 머릿속을 간질거려 애가 탔다. 수리이론 분야에서 정평이 난 시카고 대학 출신의 Ph.D인 C 교수가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거라 기대되었다. 결론은 K 교수가 임용되었다.
한편으로 C 교수의 PT는 내게 절망이기도 했다. ‘내가 과연 수리 재무이론의 끝을 볼 수 있을까?’ 노력하지 않고 회의부터 앞섰다. 지금은 모르겠으나 90년대 초중반에 미국 대학은 연구 중심 교수와 강의 위주 교수를 구분했다. 나는 학계에 남을 경우 수업 못지않게 전공 분야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겨야 한다는 강박이 컸다. 티칭 교수에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내게 독창적인 계량모델을 만들 역량이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기념비적인 논문을 남길 자신이 없었다. Sanjoy Basu 교수는 저 PER주가수익비율, Price to Earning Ratio 주식의 이례적인 초과수익 현상을 처음 입증했다. 그와 관련된 전설같은 일화가 있다. 연구실 벽면에 가득 채운 주가 수익률 데이터를 눈으로 훑기만해도 머리속에서 PERx축와 Returny축의 점도표를 가늠해 연구결과를 어림잡았다 한다. 나는 불가능에 가까운데 C 교수도 이 범주에 해당한다 여겼다. 교육 여건을 잘 갖춘 서울 소재 대학, 그것도 모교에서 임용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다. 용케 바늘귀에 통과한 낙타가 되었다 스스로 만족할 연구를 이루지 못할 바에야 공부를 더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심사숙고한 끝에 박사 과정에 진학하지 않았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신 격이다. 그럼에도 교편을 잡으면 모교에 남고 싶다는 맹랑한 욕심과 학업에 대한 미련의 끈을 아예 놓기도 싫었다. 모교에 임용되려면 아무래도 유학이 필수다. 그리하여 취업 후 몇 년간 유학자금을 모아 훗날을 도모하자는 두리뭉실한 계획만 가졌다. 직장 2년차이던 1997년 12월,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환율이 급등해 유학 자금이 거의 두 배 이상 늘었다. 결국 유학에 대한 미련을 포기했다. 전업 직장인의 삶을 굳히게 된 연유였다.
한창때인 29살의 나는 박사과정을 얼마나 원했을까? 천재와 수재에 못 미치는 기예라 해도 불굴의 노력으로 그 격차를 극복하려는 진심을 가졌을까? 극복 여부를 떠나 석사과정에서 맛본 공부하는 희열을 추구하려는 절실함이 있기는 했던 걸까? 돌이켜 보면 아니었다. 의지는 나약했고 계획은 흐릿했으며 공부에 인생을 걸지 않았던 것 같다. 20살의 내가 그랬듯이 삶과 목표에 대해 진정성이 부족했다. 내 앞에 놓인 미지의 길을 고민만 했지 그 길에 과감히 뛰어들 엄두를 내지 않았다. 김 남주 시인은 '길 2'라는 시에서 우리에게 놓인 길을 회피하지 말고 여기서 네 할 일을 하라고 역설했다.
'길은 내 앞에 있다.
나는 알고 있다. 이 길의 시작과 끝을
그 역사를 나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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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너의 장소 너의 시간이다. 여기서 네 할 일을 하라
행동의 결단을 요구하는 역사의 목소리가 있다.
그래 가자 아니 가고 내가 누구에게 이 길을 가라고 하랴.
가고 또 가면 혼자 가는 길도 함께 가는 길이 되느니
가자 이 길을 다시는 제 아니 가고 길만 멀다 하지 말자
가자 이 길을 다시는 제 아니 가고 길만 험타 하지 말자'
오늘 산티아고에 서 있는 그녀와 젊었던 내 청춘에 필요한 것은 회의와 불신, 두려움이 아닌 의지와 결단이다. 자신 앞에 놓인 그 길을 제 아니 가고 길만 멀고 험하다 탓해서는 안된다.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언제나 결단을 내린 바로 이 순간이다. 젊은 시절만큼을 한 번 더 산 50대 중반에 이른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내 앞에는 안개가 잔뜩 낀, 미래가 불투명한 길이 놓여 있다. 여기서 내 할 일을 미루지 말고 결단해야 한다. 그래야만 불확실한 삶의 여정 속에서 로켓맨이 느낀 인생의 고독과 지난한 삶의 중압감, 혼란스런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 Elton John은 'Rocket man(242위)'에서 지구를 떠나 화성으로 향하는 우주 비행사가 광활한 우주에서 느꼈을 상실감과 외로움, 인간적 고뇌를 노래했다. 우주를 탐험하는 이야기에서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이 은유적으로 전달하려던 핵심 메시지는 길을 잃어 하염없이 방황하는 청춘의 표상이 아니었는지.
미국의 저명한 코미디언 스티븐 라이트는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 다 가진다면 그것들을 어디에 둘 것인가?'라는 명언을 남겼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는 진리를 유머러스하게 풍자한 것이다. 정말 그랬다. 동키를 보내 한결 가벼워진 행장에도 동키 신청한 첫날을 빼고는 누나 컨디션이 평소보다 떨어졌다. 왼발목과 족삼리에 경미하게 통증이 와 걸음이 불편하다신다. 페이스의 완급을 조절하며 오후 1시경 숙소에 도착했다. 주인 내외의 반가운 환대가 정겨웠다.
점심 메뉴를 고민하다가 구글 검색을 했다. 햄버거와 샌드위치가 당겨 평점이 높은 카사 토노Casa Tono에 갔다. 그런데 점심은 메뉴델디아 풀코스만 가능하단다. 가격은 저렴한 편이지만 라면을 거하게 먹은라 풀코스가 부담스러웠다. 풀코스와 단품 메뉴를하나씩 주문 가능한지 부탁했는데 매정하게 안된단다. 메뉴델디아 2인분을 주문해 먹다 남길까 하다 내키지 않아 가게를 나왔다. 숙소로 돌아오면서 영업중인 가게를 찾았다. 적당한 평점의 라 라구나La Laguna에 들어갔다. 가게가 한산했다. 우리가 유일한 손님이다. 무료한 표정의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이한다. 문어 요리인 뽈뽀Pulpo와 스페인 전통 스튜인 카요스Callos를 주문했다. 요리가 나왔다. 뽈뽀는 먹음직스러웠다. 그런데 카요스는 아니었다. 우리로 치면 소내장탕과 비슷하게 기름진 데다 향과 맛이 입맛에 맞지 않았다.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맛있냐는 질문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주인장이 스페인어로 뭐라 뭐라 했다. 구글 번역기를 쓰려던 차에 누나가 치킨으로 바꿔주려나보다 일러줬다. 누나가 용케 스페인어를 알아 듣네! 뭔가 미심쩍었지만 순례 중인 우릴 위해 친절을 베푸시는구나 싶었다. 흔쾌히 그러마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히 메뉴를 바꿔줘 고마웠다. 배 부른 와중에 치킨을 남기면 실례라 여겨 간신히 다 먹었다. 아이스크림 먹겠냐는 제안에 고맙다고 인사했다. 생각치 않게 배불리 먹고 과식 후에 계산대에 섰다. 43 유로가 나왔다. 예상을 넘는 요금이 당황스러워 자초지종을 물었다. 물린 카요스와 아이스크림에 제공된 생수까지 함께 계산한 것은 물론이요 뽈뽀도 메뉴에 적힌 가격보다 비싸게 받았다. 단품은 더 받는다는 설명과 함께. 넉넉한 몸매만큼 후덕한 인상이라 별생각 없이 제안대로 따랐는데 우리 남매가 어리숙한 뜨내기손님인 셈이었다.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났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하면 어이없을 일이 아니었다. 순례자를 배려해 잘못시킨 메뉴를 대가 없이 바꿔준다는 생각 자체가 틀렸다. 풀코스가 아니었으니 후식도 당연히 추가 주문이 마땅했다. 어느 틈엔가 주민들이 까미노를 찾은 순례자를 배려할 거란 기대에 빠졌다. 기실 세상물정 모르는 내 착각이었다. 오리온 알베르게 한국인 여사장이나 라 라구나 주인장에게 우리는 수많은 손님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중 누구를 가객佳客으로 맞을지는 전적으로 그들 마음에 달린 사안이다. 진객珍客으로 대접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을 책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주민들이 순례자들을 가빈으로 대해줄 거라는 과도한 기대를 당연시했다. 잘못된 내 기대가 어긋나자 불현듯 The Drifters가 부른 'Money honey(252위)'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돈이 필요해! 나랑 잘 지내고 싶으면’이라는. 라 라구나 여사장은 ‘내 친절한 서비스를 원해? 그럼 내게 이문을 남겨줘’라는 심정이었겠지.
자본주의 체제에서 돈은 생존에 직결된 수단이다.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느 정도 돈이 필요하다. 돈을 추구한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비난해선 안된다. 이기적 유전자의 집합체인 인간이 유전자를 성공적으로 퍼트리려면 결코 돈을 도외시할 수 없다. 여유가 부족할수록 돈만큼 절실한 게 없을 것이다. 돈에 대한 견해가 일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경제적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와 이를 초과하는 부에 대한 태도이다. 사람마다 원하는 부의 수준이 상이할뿐더러 돈에 대한 철학이 다르다. 나는 돈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생각한다. 중산층을 유지할 정도의 노후 자금이면 족하다. 굳이 더 벌려 애쓰지 말고 아주 풍족하지 않아도 안분지족 하며 여생을 즐기고 싶다. 누구와 잘 지내기 위해 일정한 부가 전제되거나 돈이 매개 되어야 한다면 기꺼이 그 관계를 포기하겠다는 입장이다. 도움이 간절할 누군가를 위해서라면 응당 자발적으로 물질적 도움을 무조건적으로 행해야 한다고 생각이지만.
아침에 이어 점심까지 배부르게 먹은 터라 저녁은 간단하게 넘기자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토르티야 하나면 족해 보였다. 침대에서 졸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저녁 늦게 휴게실로 갔다. 순례객들이 테이블에 앉아 각자 준비한 저녁거리를 나눠 먹는 중이었다. 자리가 애매해서 머뭇거리는데 아르헨티나 출신의 부자와 스웨덴 여성이 앉으라며 선뜻 자리를 비켜 준다. 어제 페랄라에서 강의를 잘 들었다는 농담과 함께. 안면이 익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다른 이들도 자기들은 충분히 즐겼으니 토마토 빈Tomato Bean 수프와 샐러드를 마음껏 먹으라 했다. 예상 못한 환대에 낯 부끄럽게 웃으며 우리가 준비한 토르티야와 과일을 셰어 하자고 했다. 순례객들끼리 저마다 준비해 꺼낸 단출한 먹거리였지만 한데 모아 놓으니 꽤 풍성했다. 초면에도 진한 교감을 나누며 힘든 길에서 서로를 가빈으로 융숭히 대접한 정겨운 만찬이 흥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