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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설 Sep 21. 2024

[19 일차] 어떤 죽음(1)

Highway to Hell - 지옥으로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유혹

2023년 5월 29일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프라리오스 -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까미노 23.3km


  아침부터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조심한다 하면서도 발을 잘못 내디뎌 그만 기어가는 달팽이를 밟아 버렸다. 뚜~둑 껍질이 깨지는 소리와 물컹한 감촉에 내 부주의로 가여운 축생이 희생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제부터 달팽이들이 눈에 많이 띄어 나름 조심해 왔건만 선업을 쌓기 위해 기꺼이 길을 나섰을 아무 죄 없는 달팽이의 엔트로피를 강제로 증가시켜 버렸다.  


  우리가 잘 아는 열역학 1법칙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다. 에너지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지만 그 총합은 변하지 않는다. 열역학 2법칙은 시간이 흐를수록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법칙이다. 즉 어느 한 실존의 영역이나 어떤 관찰 대상으로 한정된 ‘계(system)’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필연이라는 뜻이다. 엔트로피는 흔히 무질서도로 설명된다. 그러나 에너지가 평형상태가 되어 안정화되는 것이라는 게 보다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특정 시스템이 열적 평형에 도달하여 에너지가 균등하게 분포되면 더 이상 거시적으로는 에너지 이동이나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엔트로피를 무질서, 평형 상태로 정의한다면 엔탈피는 시스템에 내재한 연결 에너지를 의미한다. 이 둘은 상호 반비례한다. 엔트로피가 낮아지면 엔탈피는 높아지고 반대로 엔트로피가 높아지면 엔탈피는 낮아지기 마련이다.


  신병 훈련소를 예로 들겠다. 유격 조교의 통제하에 훈련병들이 한창 유격 훈련 중이다. 훈련병들은 조교가 뿌려대는 매의 눈초리를 의식해 군기가 잔뜩 들었다가 휴식 시간이 되면 눈치껏 각자 편한 자세로 쉬기 십상이다. 훈련 중에는 엔트로피가 낮아지고 쉬는 시간에 엔트로피가 높아진다. 훈련병들의 각 잡힌 자세와 질서 정연한 대오를 이루게 하는 연결 에너지와 자유롭게 쉬게 하는 엔트로피가 서로 반비례한다. 이제 인류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공간인 우주를 빗대어 보자. 우주의 엔트로피가 최대치에 도달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는 사라진다. 우주가 죽는 것이다. 왜 그럴까? 우주를 이루는 모든 물질들의 연결 에너지가 백 퍼센트 엔트로피로 전환되어 열적 평형에 도달하면 별의 생성과 소멸, 에너지의 이동과 같은 물리적 활동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엔트로피가 최고조에 달한 이후에 우주를 팽창시키는 암흑 에너지마저 소진되는 것까지 가정할 경우 우주는 드디어 팽창을 멈추고 다시 수축해 하나의 점으로 모이는 빅 크런치 상태가 되거나 별이 꺼지고 에너지 흐름이 끊기는 열적 죽음의 상태를 맞게 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우주는 불가항력적인 종말을 맞게 된다.


  이처럼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명제는 달리 말해 모든 물질과 만물이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는 문장으로 환치할 수 있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인체를 물리적 실체인 하나의 ‘계’로 국한해 보자. 사람은 세포들의 구성체이다. 세포들은 생체 고분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생명체가 엔트로피의 최고조 상태에 도달하게 되면 인체를 구성하는 모든 유기 생체고분자 간의 연결 에너지가 제로가 된다. 그 결과 대사와 복제 활동이 멈춘다. 대사와 복제가 불가능하면 더 이상 생명체가 아니다. 생물의 정의가 대사와 복제가 가능한 독립 개체이기 때문이다. 곧 생명이 죽음을 맞는 순간이다. 인문학에서는 죽음을 빗대어 종종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과학의 세계에서 인간의 죽음은 하나의 개체가 자신의 ‘계’를 유지하지 못해 상위의 생태계로 흡수되는 현상이다. 우리가 음식을 섭취하여 이를 소화해 에너지를 얻듯이 우리 몸을 이루던 유기 고분자가 점차 분해돼 생태계의 자양분으로 흡수되는 생명의 순환 원리에 다름 아니다. 다른 종에 비해 인간의 죽음이라 해서 더 애틋하거나 유의미하지 않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한편 생명 현상은 본질적으로 열역학 2법칙인 엔트로피 증가에 대항하는 행위이다. 대사 기능을 통해 외부로부터 에너지원을 흡수하여 연결 에너지를 높이며 자기 복제를 해 엔트로피를 인위적으로 낮추는 행위인 것이다. 살기 위해 먹는다는 말속에는 과학의 영역에서 볼 때 엔트로피를 낮추려는 인간의 무의식적인, 그러나 어찌 보면 매우 작위적인 의지가 담겨 있다.


  엔트로피의 법칙은 부부, 가족, 친구, 직장, 사회와 같은 인간이 속해 있는 여러 사회적 관계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부부관계를 이어 줄 연결 에너지가 소멸되는 것이 이혼이다. 친구와는 헤어지게 되고 직장에서 퇴직하거나 해고된다. 사회가 해체되고 국가는 멸망한다. 모두 제각기 집단의 구성 요소들을 연결하는 엔탈피가 제로에 수렴하고 엔트로피가 최대로 증가한 결과다. 인간이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노력을 등한시할 경우 그 결착은 결국 관계의 해체와 해소로 귀결될 것이 자명하다. 지나친 부의 집중화를 가능한 한 완화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안전망을 구축하려면 상당한 사회적 비용을 수반해야 한다. 엔트로피에 담긴 과학적 원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쟁 원리가 지배하는 시장에 전적으로 맡기거나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이를 결코 외면해선 안 되는 인문학적 교훈을 던져준다.


  현재 과학적 상식으로 자연에서 가장 무질서한 에너지는 열 에너지다. 열은 접촉한 공간을 통해 어떠한 방향성이 없이 랜덤 하게 방출, 복사된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온도다. 열을 접하면 언제나 온도는 오른다. 온도의 방향성은 일정하다. 어쨌거나 무질서가 가장 높아 거의 모든 에너지는 열 에너지로 변환된다. 자연이 아닌 인간 사회의 무질서도가 가장 높은 평형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은 어떤 함의를 가질까?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들 사이에 최고조에 달한 갈등이 마침내 폭발한 나머지 갈등을 촉발했던 원인이 해소되는 것이라 하겠다. 사회의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었을 때 부작용이 있다면 첨예한 갈등이 때로는 비이성적인 광기를 유발한다는 점이다. 소요와 폭동이나 전쟁과 같은 폭력을 동반하는 갈등은 말할 것도 없다. 낡고 모순 가득한 구체제를 뒤엎어 진보를 이루려는 혁명이 간혹 광기에 사로잡혀 그 거룩한 대의마저 잃어버리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내가 한 발자국 내딛는데 소모한 엔탈피와 나로 인해 죽어간 조그만 달팽이에서 증가했을 엔트로피 중 어느 것이 더 클까? 나와 달팽이만 존재하는 계에서는 열역학 2법칙에 따라 달팽이의 죽음으로 발생한 엔트로피가 더 클 것이다. 지구 생태계 관점으로는 물리학자가 엔트로피의 증감을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존이란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설령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쳐도 나로 인해 달팽이가 죽은 것이 본질적으로 더 자연스러운 평형 상태라 단언할 수 없다. 이런 논리라면 자연법칙상 누구든 희생시킬 수 있고 심지어는 우생학적으로 열등한 민족을 지배하고 학살하는 것이 역사 발전이라는 나치의 궤변이 가능하니 말이다. 더욱이 이미 생명 원리 자체가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현상이다. 사회가 발전하고 지구가 살기 좋아지기 위해서라면 자연법칙에 거룩히 항거함으로써 엔트로피를 낮춤과 동시에 필요한 연결 에너지를 증가시킬 대안과 동력을 새롭게 확보해야 한다.

 

  열역학 2 법칙인 엔트로피에 담긴 철학적 의미는 불교 사상과 유사한 점이 많은 것 같다.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질서가 무질서를 향해 끊임없이 변한다는 뜻이다. 불교의 무상 사상은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으며, 시간이 지나면 변하고 사라진다는 원리이다. 다시 말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결국은 변화해 소멸하기 마련이니 세상의 모든 현상은 일시적이며, 고정된 상태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교가 추구하는 열반은 궁극의 해탈로부터 더 이상 고통이나 변화를 겪지 않음으로써 물리적인 속세에서 초월한 상태이다. 열반을 하려면 우주의 본질인 무상과 무아를 깊이 깨달아야 한다. 고통의 원인을 이해해야만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무질서를 향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자연계의 본질적 흐름이자 절대 법칙을 인식하는 자체가 불교에서 말하는 현상의 본질을 깨닫는 과정과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모든 생명체는 윤회한다고 믿는다. 생전에 저질렀을 자신의 카르마로 인해 누군가 달팽이라는  축생으로 태어났다. 비록 미물로 태어났더라도 본능적인 선업과 자비를 쌓는다면 다음 생에는 인도(人道)의 세상으로 되돌아왔을 텐데 나로 인해 그 기회를 헛되이 잃어버렸다. 아니 달팽이가 살아 있는 동안 내가 달팽이에게 자비를 베풀거나 이를 보호해 줌으로써 대신 축생의 업을 조금이라도 정화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혹은 불법의 힘을 빌어 축생을 위해 기도하거나 선업을 쌓아 그를 인도로 안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기는커녕 소중한 생명을 무심코 거두었다.


  잘못 내지른 발걸음에 우울해진 마음을 Stevie Wonder가 추슬러줬다. 다시 시도할 수 있게 해 주어 감사하다는 구절에서 그루미 한 기분이 풀렸다.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하는 'Higher ground(261위)'는 공교롭게도 그가 교통사고 나기 나흘 전에 발표했던 곡이다. 스티비 원더는 공연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앞선 트럭에 실린 통나무가 차량을 덮쳐 중태에 빠졌다. 나흘간 사경을 헤매던 그에게 매니저가 이 노래를 들려주자 의식을 회복했다는 믿기 어려운 속사정이  있었다. 스티비 원더가 높은 곳에 도달하겠다는 불굴의 의지를 다진 것처럼 나도 심기일전해 달팽이의 명복을 빌었다. 누구였는지 간에 부디 죄를 씻어 다시 환생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달팽이가 남긴 몫까지 기꺼이 내 어깨에 얹어 살아가겠노라고.


Stevie Wonder - Higher Ground(1973년, 261위)


  어제 더위가 예사롭지 않아 처음으로 반팔을 꺼내 입었다. 여섯 시 반에 출발한 이른 아침엔 다소 쌀쌀했지만 팔토시를 한 덕분에 걸을 만했다. 오늘도 태양이 강렬히 내리쬐나 바람이 솔찮게 불고 얇은 반팔이라 확실히 기력이 덜 소모되었다. 무엇보다 무성한 그늘도 체력을 세이브하는데  일조했다. 그늘의 고마움을 새삼 느꼈다. 태양 살인을 한 뫼르소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이심전심으로 알 수 있었다. 엔탈피와 엔트로피와 달리 빛과 어둠은 서로 공존하는 정(正)의 관계인가 보다. 태양빛이 강해질수록 그늘이 짙어지니 말이다. 반팔과 바람과 그늘의 삼위일체 속에 배낭 가득한 행장이 동키를 보낸 어제보다 가볍게 느껴진다. 발걸음이 산뜻한 까닭이다.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난 영국 할머니. 한 시간 후 바에서 다시 만났다. 영국인답게 밀크티를 직접 내려 마시더라. 호빗 땅굴 같은 저장소가 무척 아담했다.


  오늘이 남다른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절반을 지나는 날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사아군 베네딕도 수녀원의 순례자 성모 성지 박물관에서 반주증을 발급받았다. 절반을 완주했다는 공식 인증서는 아니다. 성지 박물관을 방문했다는 증서의 문구 중에 산티아고 순례길의 중심(절반)인 레온의 땅 사아군을 통과했다는 글귀가 있어 흔히 반주증이라 일컫는다. 비록 정식 인증은 아니지만 내심 흐뭇했다. 삼십 며칠이 언제 가나 했는데 하루하루 지나 어느새 절반 넘게 걸었다. 성당이 보이는 카페 마당에 앉아 우보만리처럼 덕업을 쌓고 우공이산 하듯 읽은 책으로 산을 쌓았으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상상을 했다.     


  여느 길손처럼 평범할 우리 남매의 고행을 감동적이라 하기에는 부족함이 너무 많다. 하지만 오늘도 까미노에서 마주한 특별한 나그네들의 고된 걸음에서 감동을 받았다. 다리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힘겨워도 결연하게 한 발자국씩 내미는 분, 팔순을 훌쩍 넘겼을 고령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배낭을 메고 더딘 한 걸음이라도 쉼 없이 앞으로 내딛는 모습은 언제나 아름답다. 부엔 까미노를 전하며  힘내어 무사히 완주해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 서시라 티 나지 않게 응원했다. 모두가 각자의 원을 자신의 그릇에 맞게 담아 한 방울이라도 흘릴세라 조심스레 한 걸음씩 나가는 까미노. 이 또한 순례길의 또 다른 모습이자 그토록 순례에 나서기를 원했던 순례자들이 맛보기를 바라마지 않던 고행의 참모습인지 모르겠다.  


오늘도 길을 나선 지 두 시간 만에 던전입구를 통과했다. 그늘로 무장을 하고 갑옷을 업그레이드하여 어제보다 발걸음이 편했다. 사아군 순례자 성모 성지 박물관에서 반주증을 받았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인데 전생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깊은 업을 쌓았나 보다. 수원 사는 K 교장선생님 부자와 사흘째 같은 숙소에 머물게 되었다. 오후 한 시 넘어 도착해 개인 정비를 한 다음 리셉션 겸 식당에서 쉬는 도중에 막 입구로 들어오는 부자를 만났다. 만난 지 며칠 되었다고 반가운 마음에 절로 미소 지으며 인사를 했다. 저녁을 같이 하자 제안했더니 반색하신다. 친한 후배 세례명이 레오였던 터라 레오가 세례명이라는 K군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게다가 어느 정도 낯까지 익어 그간 자제하던 말문을 텄다. K는 지방 민영 방송국 아나운서였는데 이 년간의 계약기간이 끝나 퇴직했다고 한다.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순례를 동행하자는 아버지의 제안에 별 고민 없이 따라왔단다. 케이블 TV와 OTT와 경쟁이 격해져 지방 민영 방송국의 재정 형편이 간단치 않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아무리 돈 드는 제작 편성을 최대한 자제하고 판관비 절감에 혈안이라 해도 아나운서 같은 전문직마저 비정규직으로 채워야 하는 녹록지 못한 현실이 못내 아쉬웠다. 섣부른 위로는 실례일 거 같아 까미노에 선 이들이 새길 만한 윈스턴 처칠의 명언을 빌어 격려했다.


  '성공은 끝이 아니며, 실패는 치명적이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계속할 용기이다(Success is not final, failure is not fatal: It is the courage to continue that counts).'


  구직을 앞둔 만큼 순례 와중에도 심적으로 여유가 없을지 몰라 괜찮냐 물었더니 아빠 따라오기를 백번 잘했다며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순례를 즐기는 중이라 했다.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그리 길지 않은 인생을 되돌아봐도 집중적으로 노력하고 스스로를 조여야 할 때는 반드시 있었다. 그러나 재충전할 시기도 이에 못지않게 필요한 법이다. 너무 과하지만 않으면 된다. K군에게 지금은 조일(tighten up) 때가 아니라 여유를 부릴(loosen up) 시기라 여겨졌다. Archie Bell & Drells이 노래한 'Tighten up(265위)'한국에 돌아가서 해도 충분하다 일러줬다. 대신 일단 자신을 조이기 시작하면 지옥에 이르게 하는 유혹에 빠지지 말라 조언했다. 악마의 유혹은 언제나 달콤한 법이라 내가 그랬던 것처럼 유혹의 늪에 일단 빠지면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기 때문이다.  


  호주를 대표하는 록 밴드 AC/DC의 리더 본 스캇은 호주 캐닝 하이웨이 근처 술집의 단골이었다.  술집 인근에 위험지역 표지판이나 신호등이 없어 교통사고가 빈발했다. 그래서 단골들은 이 술집을 지옥으로 가는 고속도로라 칭했다고 한다. 술 한잔 마시려는 유혹에 빠져 자칫 지옥에 이른다는 의미인 게다. 나 또한 젊은 시절 얼마나 많은 유혹에 빠져 허송세월 했던가. 아니! 지금껏 지옥으로 가는 시간열차에서 탈출하지 못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K군보다 나 자신에게 먼저 조언을 해야 할 일이다. 사무엘 존슨은 습관의 사슬은 너무 약해서 느낄 수 없지만, 너무 강해지면 끊기 어렵다고 했다. 유혹도 습관처럼 일단 현혹되면 끊어 내기가 쉽지 않다. 주 기도문처럼 아예 시험에 들 생각을 말아야 한다. 최소한 의지박약한 나라면 말이다.


AC/DC - Highway to Hell(1979년, 254위)

 

   K군 왼쪽 발꿈치에 물집이 잡힐 듯하여 하루를 연박해야겠다는 교장 선생님 말에 샤모이 버터크림 몇 팩을 쥐어줬다. 순례를 떠나기 전 라이딩을 같이 하는 후배 S 원장이 피부 마찰에 특효라며 물집 방지용으로 한 박스를 선물했다. 귀한 선물이라 아까워 봉인한 채 누나와 바셀린 크림으로 버티던 중이었다. 아직 개시도 안 했지만 K군에게 더 필요할 듯해 물집방지 밴드와 알코올솜, 방수 밴드 등 위생도구 몇 개와 함께 챙겨줬다. 연박하더라도 증상이 생겼으니 바로 조치하는 게 낫다며 식사를 마친 후 물집 주변에 크림 하나를 개봉해서 발라주고 물집방지 밴드를 덧대 주었다. 아침에 누군가 떨어뜨린 폴로 랄프로렌 밤색 모자를 주인 눈에 띄도록 배낭 앞에 매달고 다닌 게 선업의 가벼운  브런치였다면 K군에게 해준 응급조치는 감히 덕행의 만찬이라 칭할만하다. 어쩌면 이 모두가 아침 일찍 저지른 내 업을 씻고 불시에 봉변당한 달팽이를 대신해 자비를 베풀라는 준엄한 천명의 소산이었는지 모른다.


  오후에 하릴없어 자료를 들춰보려 리셉션 책상에 앉으려던 찰나였다. 책상을 교탁 삼아 'ㄷ' 자로 놓인 소파에 먼저 와 있던 투숙객들 중 어느 여자 손님이 수업받을 준비가 다 되었다고 농담을 건넨다. 내가 선생님 같다면서. 오케이 그러면 이제부터 잘 들어라고 답했다. 일순간 나를 포함해 함께 앉아 있던 순례자들 모두가 빵 터졌다. 절반에 이른 순 중 내가 내지른 가장 쾌활한 웃음이었다. 순례자 사이로 내가 완전히 녹아들고 있음을 절감했다. 절반이 곧 시작이니 나의 진정한 순례는 이제 비로소 시작되었다.


수원에서 오신 K 교장선생님 부자를 만나 잠시 같이 쉬었다. 새 걸 껴왔는데도 400km 넘게 걸어 다 헤진 고무발. 식품점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순례자들. 다들 빵 터진 리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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