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28일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프라리오스 26.3 km
와우! 17.2 km라니. 출발지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에서 첫 번째 마을인 칼사디야 데 라 쿠에사 마을까지 거리다. 프랑스 루트에서 마을 사이의 간격이 가장 먼 구간이다. 무려 오늘 걸을 분량의 삼분의 2에 해당한다. 중간에 마을이 없으니 잠시 쉬거나 보급할 곳이 마땅치 않다. 출발 후 칠 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서 영업한다는 푸드 트럭이 그나마 기력을 보충해 줄 유일한 안식처다. 그간 네댓 킬로미터마다 지나치던 마을이 없다는 사실에 평지임에도 제법 부담을 느꼈다. 게다가 그제 앞서간 체력 좋은 김 선배가 꽤나 힘들었다 일러온 터였다. 직사광선을 피할 변변한 그늘이 없어도 좋다며 각오를 다졌다. 길 옆에 잠시 다리 주무를 벤치가 있기만 바랐다. 맨바닥에 퍼질러 앉지 않으면 다행이라 여기면서.
어제부터 한낮 뙤약볕이 짐스럽게 느껴져 좀 더 일찍 나설까 하다 비가 온다는 예보에 어제 잠들기 전 평소처럼 출발하기로 했다. 비가 오면 진창길로 변한다는 메세타에서 부담을 줄이고자 배낭 하나는 동키 예약을 해뒀다. 저녁부터 내리던 비가 새벽에 그쳤다. 제대로 비 피할 곳 없어 신경이 쓰이던 차에 되려 잘 됐다 싶었다. 이런 예측 오류는 언제나 환영이다. 그러고 보니 근자에 있었던 예보 모두 늦은 밤이나 새벽까지만 유효했다. 우리가 걷는 동안에는 기상 여건이 괜찮았다. 낮에 비가 내리지 않는 게 건기에 접어드는 이 지역의 특성이라 막연히 짐작했다.
구름이 물러나기 전이라 일출을 볼 수 없었지만 동이 터 서서히 밝아오는 고즈넉한 분위기를 맛볼 수 있어 이또한 좋았다. 마을을 나오면 도로를 따라 까미노가 이어진다.
아무리 평지라 해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십칠 킬로미터를 내리 걷는 부담이 전혀 없을 순 없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또 그리 부담될 거리도 아니다. 어차피 걸을 길, 테라디요스까지 26.3 km이다. 천천히 걸어도 여섯 시간가량이면 충분하다. 중간중간 쉬어 가도 넉넉잡아 여덟 시간이다. 험준한 산을 여덟 시간 종주하는 것에 비하면 동네 마실 가는 난이도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논스톱 거리가 주는 착시와 부담을 잊기로 했다. 막상 걸어 보니 정말로 거리가 문제 되지 않았다. 정작 떠돌이 나그네의 발목을 잡은 게 따로 있었다. 바로 태양의 나라를 온통 불태우려는 듯 점차 본색을 드러내는 강렬한 햇살이었다. 일출 직후 기온은 19도. 쌀쌀한 날씨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더워지기 시작했다. 구름이 걷히자 정오가 아직 멀었는데도 뙤약볕이 상당히 매섭다. 메세타 구간에서 5월 말 섭씨 20도 내외의 비교적 낮은 기온에 태양이 이다지도 뜨거운 이유가 뭘까? 걸으며 챗 지피티에 물어봤다. 우선 태양의 고도와 각도를 들 수 있다. 스페인 북부지역은 5월 말부터 태양 고도가 높아지는 시기에 접어든다. 머리 위에서 직사광선이 수직에 가까운 고도로 비친 결과 피부에 닿는 강도가 매우 강하게 느껴진다. 건조한 공기와 맑은 하늘 역시 톡톡히 한몫한다. 구름이 없고 습도가 낮아 구름과 공기 중 수분이 태양광을 차단하거나 산란시키지 못해 태양열이 피부에 직접 전달되는 탓이다. 심한 경우 선크림을 발라도 피부에 화상을 입는다. 지나치는 순례자들이 가끔씩 마스크맨이라 불러도 스포츠 버프를 포기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2411번 지방도로를 오른쪽에 끼고 한 시간 정도 걸었다. 사이좋게 손을 맞잡고 바짝 붙어 다정히 걷는 부부가 눈에 띄었다. 보기 좋을뿐더러 서울에 있는 아내 생각에 상당히 부러웠다. 우리도 사오 년 전까지 저랬었다. 유달리 말수가 적고 다정다감한 스타일이 아니지만 외출할 때면 매번 아내 손을 잡고 거닐던 일들이 새록새록 되새겨졌다. 한 해 두 해 아내와 함께 한 추억을 더듬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결혼 전 미사리 공원 잔디밭에서 노닐던 기억에 이르렀다. The Dixie Cups의 'Chapel of Love(279위)' 가사처럼 햇살이 맑고 새순에 녹음이 짙어지는 5월 어느 봄날이었다. 아내가 손수 싼 김밥을 한 점씩 집어 먹으며 피크닉 매트에 누워 새들의 노래를 감상했다.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을 나란히 보며 행복해하던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지나쳐갔다. 싱그러운 노래 속 연인들이 사랑의 예배당에서 아름다운 사랑을 맹세했다면 우리는 사랑의 잔디밭에서 둘만의 감미로운 미래를 그렸다. 아내는 유럽 도심을 샅샅이 둘러보는 걸 즐긴다. 아침에 호텔을 나서면 저녁이 다 되도록 시가지를 종횡하며 성당이나 미술관 등 가볼 만한 포인트들을 두루 살펴본다. 그런데 순례길같이 자연에서 고행하듯 자신의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트레킹은 한사코 마다한다. 예전에 아내에게 언젠가 같이 순례를 떠나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다. 아내는 열악한 숙소 컨디션과 고된 일정을 빌미로 거부하며 타협안을 제시했다. 내가 순례하는 동안 홀로 스페인과 동유럽 여행을 할 테니 산티아고 입성한 후에 합류하라는 요구였다. 나름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라 여겼는데 재작년 입양한 반려묘 하쿠 타타를 돌봐야 하는 탓에 당분간 부부가 함께 장기간 외유를 할 형편이 못 되었다.
The Dixie Cups - ‘Chapel of Love(1964년, 279위)’
아바디아 데 베네비베레 수도원 유적을 얼마 지나지 않을 무렵 찻길을 벗어나 아퀴타니아 가도로 들어섰다. 기원전 2세기 경에 만들어진 이 로마 도로가 순례자들을 메세타 던전으로 인도하는 포탈이었나 보다. 찻길과 멀어지자 이내 까미노 본연의 분위기가 확 되살아났다. '떠돌이 나그네여! 정녕 그대는 별이 빛나는 들판에서 야고보를 영접할 자격을 갖췄는가? 어디, 황량하고 거친 고난 가득한 던전을 우선 통과해 보게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암흑 군주 사우론을 수호하는 강력한 악령 나즈굴이 내 귀에 나지막이 속삭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즈굴의 도발을 뿌리치기 위해 백색 간달프의 지팡이 마냥 손에 쥔 스틱을 머리 위로 올려 앞으로 한껏 내질렀다. 스틱에서 뿜어 나온 한 가닥 빛줄기에 힘을 잃은 나즈굴과 함께 구름이 맥없이 점차 물러나자 움츠렸던 광명이 본디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정하게 손을 잡고 어깨를 맞대어 걷는 부부, 던전에 들어서 스틱을 휘둘러 나즈굴과 함께 구름을 쫓아내니 숨었던 햇살이 내려쬐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두가 던전에서 반지 악령을 물리칠 순 없다. 지옥 같은 미혹에서 간신히 탈출했다손 쳐도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안타까운 이들이 있다. 전쟁의 참상을 겪은 병사들 중 유달리베트남에 파병된 군인들이 그러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 상당수가 귀국 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고통받았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의 베테랑들을 영웅 대접했던 것과 달리 베트남에 파병됐던 미군들은 사회로부터 무관심과 냉대에 시달려야 했다. 반전 여론이 팽배했던 명분 없는 전쟁에서 설상가상으로 패하기까지 했으니 영웅 대접을 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냉랭한 민심에 심신이 지쳐 무기력해진 퇴역군인들을 Bruce Springsteen이 씩씩하게 위로했다. 바로 'Born in the USA(275위)'로 말이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친구들과 모든 참전 용사들에게 헌정하려혼신을 다해 불렀다. 그는 공산주의가 인도차이나 반도로 확산되는 걸 막는다는 미명 하에 베트남 정세에 부당하게 개입했던 미 정부와 참전 용사를 푸대접한 당시 사회상을 에둘러 비판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레이건의 팍스 아메리카나 정책을 적극 반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부르스 스프링스틴의 의도와 달리 레이건 대통령은 이 곡이 미국의 자부심을 상징한다며 자신의 선거 캠페인 테마로 택했다. 덕분에 자연스레 미국인들 역시 이 노래를 애국적인 의미로 받아들였다. 'Born in the USA~'로 반복되는 후렴구가 힘찬 멜로디를 바탕으로 에너지 가득한 록 사운드와 버무려져 강렬하게 다가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사는 오래전에 미국을 떠나 베트남에 갔던 아빠의 덧없는 심정을 노래한다. 미국 찬양주의라는 오해에 마뜩지 않았던 브루스는 애국적인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어쿠스틱 버전을 따로 발표했다.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이 버전을 듣는 맛도 제법이다. 한 번쯤 청음 하기를 추천한다.
Bruce Springsteen - Born in the U.S.A.(1984년, 275위)
나즈굴에게 희생된 자들은 참전용사뿐만이 아니다. 갈등의 미로 속에서 이리저리 쫓겨 헤매다 무방비 상태로 안타까운 넋이 된 이들도 있다. 바로 전쟁과 분쟁의 희생자들이다. 미국에 베트남전과 이라크전이 흑역사라 한다면 영국에겐 아일랜드 분쟁이 지우고 싶을 역사일 것이다. 아일랜드 시민들은 두 차례 피의 일요일을 겪어야 했다. 192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과 자치를 요구하는 일단의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이 영국 요원을 암살했다. 같은 해 11월 21일 아일랜드 더블린의 경기장에서 영국군이 아일랜드식 축구 경기를 관람하던 관중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열네 명이 숨지고 육십여 명이 부상당했다. 이에 IRA가 영국군 정찰대를 열여덟 명 살해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보복하는 양상이 거듭되어 전쟁에 준하는 사태로 커졌다. 칠 개월간 양국에서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천 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첫 번째 피의 일요일이었다.
1972년 1월 30일 북아일랜드 런던데리에서 아일랜드계에 대한 차별을 항의하며 자치를 요구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평화적 시위가 폭력사태로 번질 것을 염려한 영국군이 진압에 나섰다. 일부 격앙된 시위대가 영국군을 공격하자 영국군이 과잉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공수연대 일 대대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열네 명이 사망하고 열다섯 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집단 발포로 애꿎은 민간인이 희생된 것도 문제지만 영국 정부의 태도가 더 화근이었다. 정부는 진상 조사 후 시위대에 무장 테러범이 섞여 있었으며 이들 집에서 실제로 무기와 폭발물을 찾았음을 발표했다. 법원은 발포자들을 전원 무죄로 판결했다. 당시 진압군 지휘관은 엘리자베스 2세에게 훈장을 받았다. 정부와 사법부가 한통속이 되어 사건을 은폐 조작한 결과였다. 1998년에 토니 블레어 총리의 명령으로 진상을 가리기 위한 재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십이 년 후인 2010년, 마침내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피의 일요일이 비무장 시위대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었음을 인정했다. 진실을 부인하던 영국정부가 마침내 공식 사과했다. 누군가 진실을 어둠 속으로 끌어내려 감추려 해도 세상이 잊지 않는 한 역사가 반드시 거짓을 드러 낸다는 교훈을 반면교사해야 할 것이다.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록밴드 U2가 1983년 자신의 세 번째 앨범에 이 날을 기리기 위한 노래를 수록했다. 'Sunday bloody sunday(268위)'였다. U2는 콘서트에서 이 노래는 저항가요라 아니라고 언급했다. 이들은 노래에서 참혹한 피의 일요일을 언급하면서도 갈등의 정치를 잊고 총질을 멈춰 서로 대화를 이어가 아일랜드 분쟁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
어느새 푸드 트럭에 도착했다. 출발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더 걸을만했지만 마땅히 쉴 공간을 어디서 찾을지 몰라 일단 멈추기로 했다. 출발 전에 알베르게 응접실에서 시장기를 달랬지만 토르티야로 아침을 보충했다. 옆 테이블에 한국인 부부가 배낭을 풀었다. 아까 각자 떨어져 혼자 걷는 걸 누나가 봤다는데 알고 보니 함께 온 부부였다. 잠시 얘기를 나눴다. 이 분들은 일행이 더 있단다. 친구 부부와 아들과 함께 걷는 모자를 포함해 이렇게 세 커플, 여섯 명이 동행 중이라 했다. 일행보다 먼저 도착해 자리 잡은 남편 분은 작년에 산티아고 순례를 온 경험이 있어 자연스레 순례단장 역할을 하는 듯했다. 부엔 까미노 인사를 하며 무사히 완주하기를 응원했다.
한 시간 반 가량 더 걸었을까? 길 오른쪽에 그늘집이 나왔다. 순례자들을 위해 마련된 휴게소였다. 겨우 아홉 시 오십사 분인데도 해가 뜨겁다. 쉴 곳이 마땅치 않았는데 뜻밖의 오아시스를 만나 이루 말할 수 없이 반가웠다. 척박하게 메마른 사막 같은 삶을 살다 보면 부르터 갈라진 입술을 적셔줄 단비가 그리워지기 마련이다. 푸른 수풀에 둘러싸인 오아시스에서 아무 걱정 없이 물장구치며 해갈하는 자신을 상생해 보라. 포커판에서 상대방을 죽이기 위해 웃는 얼굴로 레이싱하는 블러핑이 난무하거나 굉음을 내며 폭주하는 스포츠카가 즐비한 무한 경쟁의 지옥에서 벗어난 환희를 만끽할 것이다. The Staple Singers는 'I’ll take you there(276위)'에서 근심걱정 없이 자비가 가득한 오아시스 같은 그곳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노래했다. 그늘막에 들어가 열기를 식혔다. 누나는 이왕 쉬는 거 양말을 벗어 땀에 찬 발을 말렸다. 그러더니 나무 아래 돌로 된 벤치에 드러누웠다. 이곳은 햇살이 강렬해도 습하지 않아 나무 그림자 아래는 시원하다. 차가운 의자에 누워 제대로 피로를 푸시는 것 같았다. 까미노에서 만난 오아시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인생에서 마주친 오아시스가 그리 해줬던 것처럼 사회적 약자들을 사회 안전망이 촘촘히 마련된 낙원으로 인도해 이들에게 안식을 제공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까 푸드 트럭에 뵀던 부부 순례자께서 누나가 쉬는 곳으로 다가와 잠시 환담을 나눈 다음 먼저 오아시스를 떠났다. 까미노는 이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함께 어울리며 걷는 길이다.
17.2km 논스톱 구간에서 유일하게 성업중인 푸드 트럭, 한참을 걸어가니 뜻밖의 오아시스를 만날 수 있었다. 뙤약볕에 제대로 쉬지 못했던 터라 그늘이 더욱 고마웠다.
드디어 칼사디야 데 라 쿠에사에 도착했다. 바가 있는 유일한 마을이다. 마을에 들어서기 전에 우리를 환영하는 듯이 마실 나와 산책하는 길냥이들을 만났다. 짙은 고동색의 얼룩이와 검정고양이 네로다. 마을 초입의 바를 또 있겠지 하며 지나쳤다. 웬걸! 작은 마을이라 곧 벗어날 것 같은데 바가 보이질 않는다. 되돌아가기 뭐해서 햇볕만 피하자는 마음으로 담벼락 밑을 찾아 들어갔다. 흰색 바탕의 고등어 한 마리가 노란 화살표 옆에 앉아 한가롭게 앉아 있다 슬금슬금 다가왔다. 뭔가 얻어먹으려는 심산 같은데 아이들에게 줄 마땅한 간식거리가 없다. 한두 살 되었을까? 사람 손을 탄 귀여운 녀석이었다. 하쿠 생각도 나고 챙겨줄 게 없어 미안한 마음에 잠시 쓰다듬어 주었다. 산타마리아 데 라스 티엔다스 근방에서 다시 도로를 만났다. 이번에도 찻길을 오른쪽에 두고 걸었다. 자그만 언덕 위차도 건너편에 쉴 곳이 보였다. 적당한 나무 그늘은 이미 선객들이 차지했다. 이탈리아에서 온 순례자들인데 MTB로 순례 중이라 했다. 이 분들은 포장도로와 비포장 길로만 다닌다고 했다. 대부분 자전거로 순례하는 이들은 산길을 우회해 나간다.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만났던 천사분도 우회도로를 이용한다고 했었다. 그러나 고수 라이더들은 도보 순례자들이나 다닐 수 있는 좁고 험한 산길까지 풀샥 MTB로 프랑스 루트를 완주한다. 나도 평소 자전거를 즐기는 편이다. 하지만 주로 로드 바이크나 하드테일 MTB로 자전거 전용도로나 기껏해야 한산한 공도를 달리거나 임도를 업힐 하는 수준이다. 전문 산악용 MTB로 사람들만 다니는 코스를 순례하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아 부러웠다. 라이더들도 사고 없이 산티아고에 들어가길 축원했다. 열두 시가 넘어 뱃속이 허전했다. 복숭아와 감자칩을 행동식으로 먹었다. 당분과 염분을 보충하고서 다시 길을 나섰다. 이제 사 킬로가 채 남지 않았을 거리다.
언덕을 내려와 걸은 지 십 분도 되지 않아 다시 길이 갈라졌다. 좁다란 길로 접어드는 내리막길에 조약돌로 수놓아진 한글이 보였다. '사량해 여보 힘내'. 이 문구를 적은 이는 배우자와 함께 걸었을 것이다. 17.2km의 논스톱 길에 지친 배우자를 격려하기 위해 애썼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아마도 배우자는 기진맥진한 걸음을 멈춰 물끄러미 기다리다가 사랑이 한가득 담긴 메시지에 얼마나 감격했을까? 아침에 손 잡고 사이좋게 걷던 부부가 다시 떠올랐다. 그들도 서로 격려하며 산티아고를 향해 천천히 나갔을 것이다. 남남으로 태어나 인생의 한 길을 같이 걷는 무촌지간의 인연은 어찌 보면 까미노에서 흔히 만나는 인연들과 꽤 비슷하다 여겨졌다. 차이점이 있다면 부부는 평생을 회로하며 인생을 동행하지만 순례자들은 목적지가 같아도 잠시 스쳐가는 인연일 뿐이라는 것.
자전거로 순례하는 라이더들이 부럽기도 했다. 길가에 힘내라는 사랑의 문구를 써놓은 어느 한국인 순례자, 다소 지치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으면 하루 분량의 순례를 마칠 수 있다.
레디고스를 앞에 두고 누나 컨디션이 더위에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오전보다 페이스가 떨어졌다. 가벼운 봇짐에도 등허리가 발리고 발목과 정강이 주변이 뻐근하다 했다. 나도 내리쬐는 강한 볕을 제대로 피하지 못해서인지 약간 체력이 달리는 기분이었다. 숙소가 얼마 남지 않아 다행이었다. 짙은 향내를 뿜는 노란 꽃나무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숙소로 향했다. 한 걸음에 한 걸음을 더하다 보니 어느새 고생스럽지 않게 야케스 데 모라이에 도착했다. 오늘 예약한 숙소였다. 체크인 한 다음 2인실에 배낭을 풀었더니 살짝 어지러웠다. 남들 눈치 볼 일 없는 전용실이라 에라 모르겠다며 마음 편히 누워 기력을 되찾으려 낮잠을 청했다. 저녁을 먹으러 내려갔는데 빈 테이블이 없다. 어찌할까 고민하던 차에 어제 알베르게에서 만난 한국인 부자가 손을 들어 합석을 권했다. 한국인 순례객과 연이틀 같이 묵은 건 김 선배 이후 처음이다. 자리에 앉으니 우리가 빨래를 걷어주었다는 걸 어찌 알았는지 먼저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왔다. 예상밖의 인사에 별 일 아니었다며 손사래를 쳤다. 아버지 되시는 분은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재직하다 몇 해 전 은퇴하셨다고 소개했다. 한눈에 봐도 점잖은 인상에 조근조근 차분한 어투가 교직에 어울렸다. 누나도 초등학교 교사를 하셨던 터라 무척 반가워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오랜만에 한국 얘기로 꽃을 피웠다. 교장 선생님에게 연세가 있으시니 예약이 가능하면 가끔이라도 2인 전용실을 이용하라 추천했다. 가격 차이가 꽤 큰 줄로 알아 그간 2인실을 고려치 않았는데 앞으로 이용해 보마 하셨다. 아무런 주저함 없이 서로에게 필요한 정보를 주고받는 것 역시 까미노에서 흔하디 흔한 풍경이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알베르게 앞마당을 거닐었다. 하얀색 수염이 멋들어진 냥이가 잔디밭을 어슬렁 거렸다. 알베르게에서 키우는 고양이 같았다. 오늘은 고양이를 무척 많이 만났다. 하쿠와 타타, 하타가 우리에게 와준 지 2년째 되는 날이라 그래서였을까? 문득 핸드폰에서 하타 사진을 열어 하염없이 바라봤다. 낯선 우리 집으로 처음 온 날, 호기심 가득 차 동그래진 눈동자로 코를 킁킁거리며 조심스럽게 내 무릎 위로 올라오던 모습이 생생하다. 두 손바닥에 쏙 들어가던 아깽이들이 건강하게 자라주었다. 아빠를 보고 싶어 하는 하쿠와 타타는 별 일 없이 잘 지내고 있을는지.
오늘따라 냥이들이 많이 보였다. 다들 순례자들이 익숙한 듯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는다. 간식을 챙겨주지 못해 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