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어머니께서 치통으로 고생하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웬만해선 어디가 불편하거나 아프단 말씀을 안 하시는 편이시라 걱정되었다. 정기 진료를 받는 대학 병원의 주치의는 학회 일정상 일주일 뒤에나 예약이 가능했다. 상태가 심상치 않아 진료를 미루는 게 마음에 걸렸다. 고민 끝에 지인에게 부탁했다.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무엇보다 환자와의 라포를 중시하는 철학을 가진 믿음직한 의사다. 지근거리 환자를 진료하는 부담을 줄까 조심스러웠다. 고맙게도 화끈한 경상도 사내답게 흔쾌히 오시라 했다. 어제 막내 누나가 염증 치료를 마치고 귀가했다는 소식을 남겼다. 답례 인사를 할 겸 프로미스타에 도착해 후배와 잠깐 통화하며 소견을 들었다. 순례 중이라 얼굴을 맞대어 인사하지 못해 아쉬웠다. 통화를 마치고 나서 지인을 알게 된 소중한 인연에 감사드렸다.
아침에 치통이 많이 완화되었다는 소식에 한 시름 놨다. 걱정거리가 사라져 부담 없이 걸을 수 있었다. S 원장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기쁘게 하루를 시작했다. 연 이틀 같은 룸에 묵었던 중년의 아르헨티나 남성 둘이 눈인사를 남긴 채 먼저 출발했다. 간단히 요기를 한 다음 여섯 시 사십이 분에 숙소를 나왔다. 숙소 앞에서 웬디를 만났다. 누나가 기념사진을 찍은 다음 또다시 보자는 인사를 나눴다. 마을을 막 벗어날 무렵 대지 위로 붉은빛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봤다. 마을 한편 위로 해가 솟아나기 직전이었다. 여섯 시 오십사 분 마침내 뻘건 태양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간 일기가 따라주지 않거나 출발이 늦어 일출을 볼 수 없었는데 드디어 떠오르는 해를 마주했다. 신자가 아님에도 감격스러운 마음에 기도드렸다. 떠오른 태양을 등지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이슬을 머금은 촉촉한 대지 위를 사뿐히 걸으며 삼십 분 즈음 지나 포블라시온 데 캄포스 마을에 들어섰다.
숙소 앞에 있는 성당, 일찍 서두른 보람이 있었다. 웬디와 헤어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 맞이한 까미노 일출. 해를 등에 지고 산티아고가 있는 서쪽을 향해 걷는 순례자 행렬.
마을을 벗어날 즈음에 작은 다리를 왼편에 두고 노란 화살표를 따라 직진했다. 십여 분 가량 길을 걸었다. 이상했다. 분명 앞서 있던 순례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더군다나 소가 싸지른 배설물이 밭을 이룰 정도로 길 위에 가득해 발 디딜 곳이 마땅치 않았다. 당초 마을 끝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난 짧은 코스로 가려했는데 아무래도 우회 길로 잘못 들어선 것 같았다. 다리를 지나칠 때 왠지 미심쩍은 걸 무시한 게 화근이었다. 까미노에서 왔던 길을 도로 거슬러 가는 결정을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기력과 시간을 허비한 데서 오는 심적인 대미지가 제법 크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리 늦지 않게 알아차려 다행이라 위안하며 되돌아갔다. 실수를 선뜻 자인한 행동에 보상받은 걸까? 도로 턱 길섶 옆에 검은 고양이가 눈을 마주친다. 널 보려고 이 길에 들어섰구나 하는 반가운 심정으로 가까이 다가서는데 잔뜩 경계하는 모습이 이상했다. 누나가 새끼들이 수풀 안에 있다고 일러줬다. 아깽이들이 부디 무탈하게 건강히 자라기를 바랐다. 아까 지나친 다리로 원점 회귀했다. 다시금 둘러보니 왼편으로 구부러진 화살표가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인생도 이정표를 놓쳐 이처럼 굴곡지거나 험한 길에 들어선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힘에 부쳤을망정 주위의 도움으로 나락에서 벗어나 비교적 어렵지 않은 여정을 이어올 수 있었다.
새벽녘에 어김없이 꿈을 꿨다. 이번에는 학과 동기들이 나왔다. 앞서 얘기했던 두 차례 꿈과 달리 상세한 내용이 기억나질 않는다. 가슴이 조려 오지 않은 걸로 봐서는 졸업 못하는 악몽은 아니었던 듯싶다. 동아리 동기와 후배들이 막판에 잠깐 나왔다는 정도만 떠오른다. 또렷이 생각나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다. 과학적인 설명은 간단하다. 꿈은 단기 기억의 영역이다. 성격상 깨자마자 뇌가 이를 기록하지 않으면 잊기 쉽다. 깊은 수면 중에 꿔도 기억해 내기 어렵다. 그런데 아마도 내심 다른 답을 원했던 것 같다. 입학 후 이 학년 일 학기까지 동기들과 어느 정도 교분을 나눴다. 비록 학회 활동에 소극적이었고 따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았지만 동질감을 갖기에 충분했다. 내가 야학과 동아리에 열심히라는 걸 다들 이해해 줬다. 이 학기에 자체 휴학을 하면서 점차 교류가 끊어졌다. 이 학년을 마친 대부분의 친구들이 군입대를 했다. 홍일점인 여자 동기와 예비역 형들은 여전히 학업을 이어간 반면 내가 일 년 휴학했다. 결과적으로 이 학년 이 학기부터 졸업 때까지 과동기들과 함께 할 공간이 없었다. 트리플 A 혈액형에 MBTI 분류상 성골 ’I’의 성격이어서 친구들에게 먼저 연락하는 스타일도 못되었다. 교감을 나눌 자리가 마땅치 않아 점차 친구들과 소원해졌다.
안 보이면 마음도 멀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동기들은 이런 나를 밀어내지 않고 되려 기꺼이 안아주었다. 교내에서 마주칠 때면 되려 야학은 잘 되냐며 격려해 주었다. 동기 중 몇 명과는 좀 더 친분이 있었다. 그중에 예비역 J 형이 있었다. 내 방황이 절정에 다다를 무렵이자 J 형이 고시반에 들어간 이후로 기억된다. J 형이 모처럼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연락했다. 약속 장소에 나갔더니 고시반에서 만난 여자친구-이제는 형수님이신-와 같이 나오셨다. 초면의 누님이 동석해 조심스러웠지만 이런저런 안부 끝에 대화의 꽃을 피웠다. 취기가 제법 오를 즈음에 고시반에 들어와 CPA 준비를 하지 않겠냐고 제안하셨다. 입학 전 전공을 선택할 때 공인회계사 시험을 고려했었으나 진학한 다음에는 내 일이라 여기지 않았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별 관심이 없다며 에둘러 거절했다. 술자리가 계속 이어졌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택시 안이었다. 필름이 끊겼던 것이다. 순간 당황스러워 옷매무새를 살폈다. 바지 끝단 주변과 랜드로버 신발에 토한 흔적이 있었다. 형수님이 계셨는데 크게 실례를 해 난감했다. 주점에서 막걸리를 더 시킨 이후로 통 기억이 없거니와 취중이라 경황도 없어 다음 날 아침을 훌쩍 넘기서야 죄송하다는 전화를 드렸다. 별일 없었으니 괘념치 말라는 말에 안심을 했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시일이 꽤 지난 후 고시반에 있던 동기에게 그날의 진실을 들었다. 듣기만 해도 기겁할 일이었다. 한참 술을 마신 다음 J형의 권유로 양형관 휴게실로 자리를 옮겼다. 아마 고시반 분위기가 어떤지, 형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여 줄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거나하게 취한 내가 대판 사고를 쳤다. 힘든 세상, 불안한 시국에 나 몰라라 고시만 준비해서야 쓰겠느냐며 고래고래 소리 질러 대거리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 했던가! 나 스스로 제대로 살지 못하는 죄책감을 엄한 고시생에게 뒤집어 씌운 것과 진배없다. 휴게실에서 잠시 쉬던 고시생들로서는 어이없을 일이었다. 한 주먹거리도 안될 비쩍 마른 놈이 비틀비틀 시비를 거는 게 얼마나 같잖았을는지. 무엇보다 J 형에게는 예상치 못한 봉변이었을 것이다. 나를 제대로 손보겠다는 고시반 조교를 애써 뜯어말리고 이성의 끈이 진작 끊겨 객기 부리는 나를 겨우 달래 택시 태우느라 얼마나 고생했으랴! 그런데 그 이후로 아무 일 아니었다는 듯 그날의 추문은 일언반구 없이 늘 웃음으로 대해 주었다.
‘고시반 난동사건’은 젊은 혈기였다 치자. J 형에게 평생토록 면목없어 죄송해야 할 일이 잔뜩 똬리를 틀고 있었다. 학부 마지막 학기 때였다. 이 학년 전공필수 과목 하나를 신청했다. 이 학년 이 학기에 전 과목 수강신청을 하지 않아 졸업하기 전에 반드시 들어야 했던 수업이다. 그런데 무슨 배짱이었는지 세상 등진 것처럼 결강을 밥 먹듯이 했다. 공부에 담쌓았던 터라 시험을 제대로 보기 어려웠다. 마침 J 형이 담당 교수님의 연구실 조교였다. J 형에게 사정을 얘기했다. 정도에 어긋난 부탁이라 J 형도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 별 내색 없이 학점이 나오도록 도와주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최종적으로 F 학점으로 처리하실 거란 연락이 왔다. 교수님을 찾아뵈었다. 출석 미달이라 시험과 상관없이 어쩔 수 없다는 설명과 함께 나의 나태함과 불성실을 일갈하셨다. 졸업할 자격이 없으니 학교를 더 다니라 하셨다.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라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하지만 당연히 졸업하는 줄로 알고 계실 어머니 모습에 나가라는 말씀에도 한사코 버티며 책상 옆에 앉아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숨을 쉬며 어찌하면 되겠냐는 교수님 말씀이 떨어지기 무섭게 팔백여 쪽 분량의 고급회계를 일주일 안에 리포트 두 권으로 요약해 오마 약조했다. 간신히 얻은 기회였다. 반성의 의미로 성심껏 정리해 F학점을 면했다. 지금까지 출석일수 부족으로 졸업하지 못하는 꿈을 종종 꾸는 이유이자 평생토록 J 형에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할 부끄러운 과거이다.
고마운 마음을 전해야 하는 이들은 동기들과 J 형뿐이 아니다. 대학원에 진학할 때 친형한테 모자란 입학금을 손 벌렸다. 나로 인해 형이 다니던 대학원을 중도에 포기했다. 대학원에 들어가서는 지도교수님께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교수님이 아니었다면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중간에 휴학을 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대학원 재학시절 내내 선배와 친구 집을 전전하며 신세를 졌다. 취업해서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상사와 직장 선배, 동료들이 여러 모로 부족했을 나를 좋게 봐주며 이끌어 주었다. 고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동문선배이자 두 군데 직장을 같이 다녔던 또 다른 J 형은 어이없는 불찰에 크게 낙담한 나를 데리고 1박 2일 위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채석강이 보이는 격포 해수욕장 모래사장에서 밤하늘에 불꽃을 쏴주며 고민을 달래주던 일 역시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추억이다. 때론 후배와 팀원들 덕을 보기도 했다.
하찮은 내 인생 주위로 분에 넘치는 인생의 조력자들이 너무나 많이 함께 해주었다. 길을 잃거나 주저앉으려 할 때마다 힘을 내라 격려 해준 고맙고 소중한 인연들이다. 'You are my suhshine of my life(281)'처럼 내 주위에서 음으로 양으로 도와준 모든 지인들이야말로 진정 내 인생의 은총이 가득한 햇살이었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지 모른다. 그간의 길을 걷지 않았다면 어떤 행로를 걸었을까? 상상이 가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나 홀로 이 길을 걸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 모든 인연들과 함께 했던 길이다. 김 남주 시인의 시 한 구절처럼 가로질러 들판 산을 만날 때면 어기여차 넘어 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 주었을 길이다. 재능과 노력에 비해 과분한 인생을 살게 해 준 내 소중한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지인들은 무슨 마음으로 나에게 손길을 내주었을까? 인(仁)은 두 사람을 상징한다. 홀로 살아가는 세상이 아닌 타인을 인식하고 서로 연관된 삶을 의미한다는 뜻일 것이다. 서로에게 의지하며 존중하는 삶.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덕성이자 하늘의 본성이 인간의 마음속에 선천적으로 깃들어진 어진 마음이다. 맹자는 사덕사단설에서 인간 본성의 네 가지 덕성 중 인과 측은지심의 관계를 설파했다. 측은지심이란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깊이 슬퍼하는 마음이다. 곤궁에 처한 이들 돕고자 저절로 샘솟는 마음이 곧 어진 마음이자 자연스러운 인간의 덕목이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했던 내게 아무런 대가 없이 흔쾌히 손을 내밀었던 지인들에게서 인의 향내가 그득히 풍겼을 게 분명하다. 까미노의 천사들 역시 측은지심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인의 실천자이다. 이런 세상이라면 살만하다. 그러나 각박한 인심이 점점 천심을 대신하는 시대에 접어드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감탄고토가 인지상정이 돼버렸다.
Elvis Costello and the Attractions은 '(What’s so funny ‘bout) Peace, love and understanding?(284위)'에서 인이 사라지고 측은지심을 실천하는 이들을 비웃는 세태에 발을 굴렀다. 물신주의가 팽배해지면 자기에게 득이 되지 않을 일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으려는 가치관이 우세해진다.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인 이기주의가 지나칠 경우 온정을 베풀려는 사람들을 고리타분하거나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이들로 치부하기 십상이다. 표리부동하다고 조롱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평화와 사랑, 이해심 같이 공동체를 위하는 이타적인 가치관이 어색해지는 현실이 다소 서글프다.
Elvis Costello & the Attractions - (What’s So Funny ‘Bout) Peace Love and Understanding(1978년, 284위)
잠시 헤맨 길을 제대로 찾았다. 이제부터는 탄탄대로다. 이차선 도로를 왼쪽에 끼고 쭈욱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도처에 지뢰가 깔려 있다. 목장 근처나 마을로 들어서는 진입로를 지날 때면 어김없이 소나 말의 배설물이 곳곳에 널려 있어 주의해야 했다. 똥이야 밟더라도 흙에 문대어 닦아내면 그만이다. 문제는 달팽이이다. 새벽이슬을 맞아 촉촉해진 대지위에 무더기로 산책을 나왔는지 시선이 닿는 곳마다 달팽이들이 기어간다. 무거운 짐을 버거워하는 순례자처럼 제 몸뚱이보다 더 큰 집을 짊어 멘 채 풀숲을 향해 아주 천천히 돌아가는 모습이 짠하다. 힘에 겨운지 가끔은 가만히 앉아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집이 없어 몸이 가벼울 민달팽이도 느리긴 마찬가지다. 태평성대를 만난냥 어찌나 그리 여유를 부리는 건지. 바쁜 걸음이지만 행여 달팽이를 밟을까 신경을 곤두세웠다. 간혹 누군가 밟고 지나간 흔적을 볼 때마다 무심코 앞만 보며 목적지로 향했을 앞서 간 순례자들이 원망스러웠다. 무엇이 되었든 생명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른 생명을 희생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고기이든, 곡물이나 야채든 간에. 지금도 오지에서 자연과 동화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냥한 동물의 생을 거둘 때 먹이가 되어준 희생에 고마워하며 그들의 넋을 위로한다. 아침 마실을 나왔다가 봉변을 당한 달팽이들의 명운을 빌며 길을 나아갔다.
길을 잘못 든 덕분에 길냥이 모자를 만날 수 있었다. 아깽이가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원했다. 메세타에서 처음으로 도로를 따라 걸었다. 아름드리 자리잡은 나무가 지루함을 달래준다.
초원이 끝없이 펼쳐진 메세타는 알게 모르게 스페인 주민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아까 길을 잃었던 마을명이 캄포스로 끝났는데 이후 만난 마을명도 캄포스로 끝난다. 레벤가 데 캄포스, 비야르멘토로 데 캄포스. 초원의 레벤가, 초원의 비야르멘토로란 의미겠다. 도화지 한가득 풀밭을 그리고선 서너 개 작은 점을 칠한 다음 그 점들을 잇는 얇은 실선을 그으면 하루 걸을 분량의 지도에 다름 아니다. 어지간한 길치라 해도 길 잃을 일 없는 메세타에서 오늘 까막눈이 돼 보았다. 잠깐 쉬러 들어간 바에서 동양계 젊은 여성을 만났다. 누나가 한국에서 온 줄 착각해 우리말로 인사했는데 대만에서 왔단다. 외모만으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될 교훈을 얻었다-이 친구는 이후에 땡볕 아래에서 다시 조우했다-.
유 월을 앞둬서인지 아직 정오까지 시간이 꽤 남았음에도 뙤약볕이 무척 강해 처음으로 더위를 느꼈다. 선선하게 걸으려면 좀 더 일찍 출발해야겠다 여겼다.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에 들어섰다. 마을 중심가 사거리 부근 하늘 위로 새들이 한바탕 춤사위를 춘다. 개선장군처럼 보무도 당당하게 마을에 들어서는 순례자를 환영하려는 듯 사방팔방 날아다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어제 듣지 못했던 꾀꼬리 같은 새소리는 별책 부록의 보너스였다.
10시가 넘어서면서부터 처음으로 더위를 탔다. 뙤약볕을 피할 나무 그늘이 없어 더 그랬던 것 같다. 19km의 짧은 코스 덕분에 11시 반에 도착하는 기염을 토했다.
오늘 머물 곳은 수녀원에서 기부제로 운영하는 숙소이다. 열한 시 반 전에 도착했는데도 먼저 온 객들이 그늘 밑에서 체크인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세 번째로 체크인을 했다. 곱고 인자한 노수녀님이 수속을 밟아 주었다. 특이하게도 대륙명에서 객실 이름을 따왔다. 한 팀씩 순서에 따라 대륙별로 배정하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아프리카 방을 배정받았다. 널찍한 아프리카 방에는 아홉 개의 단층 베드가 마련되어 있다. 여유 공간이 많아 무척이나 안락했고 샤워실이나 세탁실 등 시설 또한 흠잡을 곳 없이 정갈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수녀원에서 정성을 다해 운영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잠시 쉬는 사이에 아르헨티나 부부가 방에 들어와 맞은편 베드에 자리했다. 세탁실이 잠긴 줄 알고 한참 손 빨래하여 팔뚝이 불거질 정도로 물기를 짜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 아래 널었다. 나름 고생스레 빨래를 마쳤는데 옆 문이 열려 있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노동으로 세탁비를 건졌다며 누나와 서로 위안 삼았다. 사이좋은 남매의 정신승리였다.
비만 오지 않는다면 스페인은 빨래하기 좋은 나라다. 강한 햇살에 자연 살균되어 뽀송뽀송하게 마르니 꿉꿉하거나 군내 나지 않아 좋다. 체크인할 때 추천받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배 두드리며 나오다가 숙소가 오픈되기를 함께 기다렸던 한국인 부자와 마주쳤다. 가성비가 괜찮다 일러줬다. 한낮의 화창했던 하늘이 잔뜩 신경질이 난 것처럼 어두컴컴해졌다. 어느새 바람이 거세지고 먹구름이 몰려온다. 한바탕 소나기를 퍼부을 기세다. 알베르게에 도착하기 무섭게 세찬 빗줄기가 몰아쳤다. 우리야 진즉에 빨래를 걷어놨는데 두 부자의 빨래가 대책 없이 빗속에 널려 있었다. 그냥 놔두면 쫄딱 없이 비에 젖을 게 분명했다. 잠시 비를 맞더라도 옮겨주자며 누나와 눈빛을 교환했다. 주섬주섬 빨래를 챙겨 처마 안쪽으로 들여놓았다. 우리 마음속에 측은지심이 약간이나마 살아 있음을 느껴 다행이었다.
정성스레 운영되는 에스피리투 산토 알베르, 오늘의 노고를 보상받으려 제대로 일광욕하는 옷가지들, 예쁘고 아담한 마을 카리온 데 로스 콘테스
흔히 돈에 연연하는 이들을 속물이라 칭한다. 돈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하는 자체가 겸연쩍기도 하다. 그런데 '돈' 문제를 철학적으로 고찰한 학자가 있었다. 독일의 게오르크 지멜이다. 그는 '돈의 철학(2013년)'에서 화폐가 개인의 자유를 가져오게 하는 순기능과 인간 소외의 역기능을 제대로 설명했다. 사람들이 돈을 소유하기 전에는 돈을 벌어 부를 키우는 것에 집작 하지만 돈을 어느 정도 소유하게 되면 삶의 양식과 사회적 관계에 집착하는 현상에 주목했다. 한국 사회의 미래가 불투명하다 여기는 젊은 세대들이 파이어(FIRE)족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다. 비단 MZ세대뿐이 아니다. 다수의 시민들 또한 가능하다면 경제적 자립을 토대로 조기은퇴(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해 자유로이 살기를 희망한다. 경제적 자유가 너무 간절한 나머지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필수불가결한 공공비용을 지불하는 것에 인색하거나 화폐의 교환 기능이 가져올 분업으로 인한 노동 소외에 무관심하다.
자유와 소외. ‘돈’의 두 얼굴이자 빛과 그늘이다. 돈에 대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 노래들이 있다. Barrett Strong은 'Money (that’s what I want, 288위)'에서 삶의 최고는 자유지만 그걸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며 돈이 최고라 말한다. 단, 돈으로 모든 걸 가질 수 없다는 전제를 깔아 놓긴 했다. 이 노래 바로 다음 순위에 The Beatles의 'Can’t buy me love(289위)'가 있다. 비틀스 팬이 아니라도 들어봤을 곡이다. 돈으로 사랑을 살 수 없으니 그렇게 필요한 게 아니라 말한다. 이 곡이 나오기 두 해 전에 비틀스가 바렛 스트롱의 'Money'를 리메이크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내게는 리메이크보다 원곡이 더 낫게 들린다.
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복잡다단한 이야기가 다 싫다는 분을 위해 준비한 노래가 있다. 막내 누나가 좋아했던 곡이라 어릴 때 많이 들었다. 펑크 록의 경쾌한 리듬이 압권이다. 'Heart of glass(1979년)'에 이어 Blondie를 세계적인 밴드로 등극하게 해 준 노래이자 그룹 최고의 히트곡, 바로 'Call me(283위)'이다. 때로는 머리를 비운 채 흥쾌한 리듬에 몸을 맡기는 것도 삶의 일미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