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니요스 델 까미노엔 마을을 가로지르는 협소한 도로 양쪽으로 벽돌 집들이 늘어서 있다.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아 풍화된 외벽이 마을의 역사를 가름케 해 준다. 이 마을에 운치를 한결 더해주는 건 사위에서 들리는 싱그러운 새들의 지저귐이다. 듣는 것만으로도 활력을 북돋아줘 언제나 반갑다. 오늘도 여명이 밝게 떠올랐다. 가벼운 바람이 귓가를 연신 스쳐가고 새들은 바삐 날며 순례자에게 환송의 합창을 해주는데 떠나는 나그네의 발걸음만 한가롭다. 평화로운 시골 마을을 벗아나기가 주저되었나 보다.
이런 기분이 들면 통상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경쾌하게 한 발씩 내딛다가 문득 보법에 변화를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 킬로그램이 넘는 배낭을 메고 스틱에 의지해 걷다 보면 자연스레 노르딕 워킹을 하게 된다. 이 워킹은 허벅지와 정강이 앞 뒤 근육과 같은 하체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허리를 꼿꼿이 세워 복부 전체에 힘을 주고 상체, 특히 어깨를 앞뒤로 움직여야 한다. 양손에 힘을 빼 폴을 흘리듯이 뒤로 보낸 뒤 땅을 강하게 밀어낸 탄력으로 앞으로 나간다. 동시에 뒷 발 장딴지에 힘을 가해 발을 낮게 들어 앞으로 내딛는다. 그런데 새소리에 장단을 맞추기 위해 나도 모르게 디딤발을 뗄 때 평소보다 높게 올려 롤링하듯 걸어 보았다. 그랬더니 종아리에 부하가 확실히 덜 걸려 훨씬 편해졌다. 반대급부로 걷는 리듬감은 배가 되었다. 복근을 더 써야 해서 중심이 더욱 안정된다. 노르딕 보법의 새로운 발견. 새들이 전해준 이별 선물이었다.
스틱 없이 걷는 것은 무협지의 범부의 걸음에 비할만하다. 그렇게 따지자면 노르딕 워킹은 일종의 경신술이다. 무림 고수들은 용천혈로 내공의 일부를 발산해 그 반발력으로 경공을 펼친다. 노르딕 워킹에서 폴을 밀어내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가히 풀잎 위를 밟으며 날듯이 내달리는 초상비(草上飛) 수준이다. 여기서 작은 깨달음 하나로 답설무흔(踏雪無痕) 내지 등평도수(登萍渡水)의 경지에 다다른 주인공의 기분을 한껏 음미했다. 마침 주위 풍광마저 감탄사를 자아내게 했다. 까미노가 그려낸 멋들어진 수채화를 감상하며 셔터를 연달아 누르길 반복했다. 어제 바에서 만난 중국계 처자를 한참 전에 제치고선 간격을 꽤 벌려 놨었다. 그런데 아침 절경에 심취해 잠시잠깐 방심한 사이 유유히 나를 따라잡은 연후에 이내 표표히 앞서 나간다. 절대고수가 펼치는 능공허도(凌空虛道)의 경신술이 한낱 필녀가 모는 소걸음에 잡힌 것이다. 하늘을 찌르는 기예와 재능은 1일 퍼센트의 영감과 구십구 퍼센트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했던가! 그녀가 우직스럽게 선보인 우보만리의 신공이야말로 시공간을 뒤틀어버린 진정한 절세의 경공이었다.
메세타 사방이 온통 수채화같은 풍경이다. 시선의 끝이 닿는 곳에 풍력 발전기들이 줄지어 있다.
태양의 나라인 스페인 메세타 초원에 풍력 발전기만 보인다. 밀밭이 들어서기 적당하지 않은 산등성이다 싶으면 여지없이 저 멀리 풍력 발전기들이 늘어서 있다. 태양광 패널은 좌우를 둘러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유럽에서 재생 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풍력에 의존한다는 데이터가 비로소 절실히 체감되었다. 스페인은 그중에서도 풍력 비중이 높다. 풍력이 재생 에너지의 사십육 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하니 이제는 바람의 나라라 칭해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시간이 지날수록 풍력과 수소, 태양광과 같은 재생 에너지의 그리드 패리티가 낮아질 건 불 보듯 자명하다. 그럼에도 당장의 균등화 발전단가(LOCE)가 이들보다 낮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화석 연료 위주의 정책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우리네 앞날이 걱정스럽다. 2030년대에는 친환경과 에너지 비용이 국가 경쟁력일 텐데. 태양광을 지원하는 정책 자금이 헛되이 유용되도록 방치한 전 정부의 책임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를 빌미로 친환경 에너지 정책을 대폭 철회한 현 정부의 대안 없는 근시안 역시 조만간 커다란 정책 실패의 하나가 될 가능성이 높다. 심히 우려할 사안이다. 백년대계가 아니라 십년소책일지언정 정권이 바뀌어도 정부 정책은 일관되어야 한다. 그래야 정책 신뢰성이 제고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손바닥 뒤집듯 부정하고 엎어버리기 일쑤다. 이념이 다른 정치인들이야 그렇다손쳐도 그 정책을 입안했던 주무부서가 스스로를 부정하는 카멜레온 행정에 이르면 절망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설명하기 힘든 부조리다.
화경과 현경에 이른 고수는 갈댓잎 하나를 타고 강을 건넌다지만(일위도강) 무공을 모르는 나 같은 필부는 건너야 할 수많은 강들 중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해 헤매기 마련이다. 앞에서 언급한 재생 에너지 정책도 이와 비슷하다. Jimmy Cliff 역시 이런 나날을 겪은 바 있다. 기대에 부푼 유럽에서의 활동이 그다지 빛을 발하지 못했다. 막막한 시기에 도버해협을 건너며 명성을 얻을 획기적인 방안을 찾지 못해 낙담하던 심정을 담은 곡이 'Many rivers to Cross(317위)'이다. 지인이 이 노래를 들은 후에 그에게 영화 'The Harder they come(1972)'에 출연을 제의했다. 이 곡은 며칠 전 소개했던 동명의 노래와 함께 영화의 OST에 수록되어 인기를 끌었다. 그가 세계적인 레게 가수로 부상하게 된 계기였다. 수많은 강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보면 남는 건 절박한 자존심뿐, 되는 일은 없고 사랑마저 떠나기 마련이다. 도처에 난관이 도사리고 있어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찾아야 할지 모를 난감한 상황. 절망의 나락에 빠져 낙담만 해야 하는 현실. 대개 이럴 때면 삶과 자아에 대해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부조리에 빠지기 십상이다. 지미의 절규가 내게는 부조리로 다가선다.
Jimmy Cliff - Many Rivers to Cross(1969년, 317위)
부조리를 언급하는 이들은 대체로 카뮈의 '이방인(1942년)'을 빼놓지 않는다. 종교를 부정한 근대의 인간이 자유스러운 삶을 추구하고 죽음을 피하고자 다시 종교에 귀의하는 모순. 카뮈는 이러한 삶과 죽음으로 모순된 이 세상을 부조리한 상태로 보았다. 그는 이성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단정했다. 그래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주인공 뫼르소를 부조리에 좌절하여 목적 없이 부유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하는 인간으로 그렸다. 그가 칼날에 반사된 태양빛에 현기증을 느껴 살인을 하기 전까진. 어머니 죽음마저도 무덤덤했던 주인공을 해방시킨 결정적 사건이 태양 살인이다. 흉포한 범죄가 심심치 않은 요즘 태양빛이 눈을 찔러 살인했다고 하면 사이코패스로 몰릴 일이다. 그만큼 기이한 태양 살인에 대한 해석은 평론가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그중 철학자 김진영은 시지프스의 신화를 예로 들며 칼날에 비친 태양빛이 눈을 가려 아랍인을 살해한 장면에서 태양의 이동에 주목하라 평했다. 주인공이 움직일 수 있는 한 태양은 축복이고 자유를 주는 존재다. 그런데 부조리한 세상을 피하게 해 줄 서늘한 바위 그늘로 가는 길을 아랍인이 막아선다. 그로 인해 태양이 정지하고 칼날에 반사된 정지된 태양은 그저 죽음의 태양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총으로 아랍인을 쏴 죽인 뫼르소는 부조리에서 벗어날 그늘을 되찾는다. 하지만 살인죄를 저질러 또 다른 부조리한 세상인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방인’의 2부는 감옥에서 그가 잊고 있던 '별이 반짝반짝 빛나는 밤 냄새, 소금 냄새, 흙냄새'와 어린 시절의 행복을 만나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부조리를 의식한 깨어있는 인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태양 살인이 준 죽음의 해방 미학이다.
내가 '미학'이란 학문을 처음 알게 된 건 고등학교 이 학년 때였다. 얼마 전 소천한 故 김민기 씨의 노래에 매료되었다. 이리 아름다운 가사가 있나 싶어 여기저기 알아보던 차였다. 그런 내게 미학은 철학이나 문학보다 범접하기 어려운 분야였다. 미와 미적 존재, 예술의 근원을 철학적 체계로 설명하는 게 왠지 난해해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진중권과 같이 잘난 체하는 미학자들의 현학적으로 미학을 설명하는 접근 방식에서 거부감이 더해졌다. 미학이 내포한 진정한 아름다움의 편린이나마 조족지혈로 알게 된 건 철학자 김진영 작가의 책을 읽은 후였다. 다행히 저자를 통해 미학의 대상인 모든 아름다움과 추함이 차안(此岸)이자 카오스라면, 미학은 피안(彼岸)과 코스모스라는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미학이 어려운 건 코스모스가 카오스의 부분 집합이듯 미학이란 부분이 전체로서의 미와 추를 온전히 설명하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교 이 학년 여름에 지리산 뱀사골과, 노고단을 거쳐 화엄사로 내려온 적이 있다. 노고단에 올라서면 결코 접근을 허락지 않을 듯한 천왕봉이 저 멀리서 어렴풋하게 자태를 드러낸다. 그때 천왕봉은 내가 감히 다가서지 못할 존재로 각인되었다. 이런 선입견으로 인해 삼십 년간 천왕봉 일출은 꿈도 꾸질 못했다. 팔 년 전에서야 오랜 소원을 이루었다. 마찬가지로 미학은 그간 내게 범접하기 힘든 천왕봉과 같은 금단의 영역이었다. 백세 인생을 논하는 시대이다. 반 백을 넘긴 지 꽤 되었지만 여전히 절반이나 남은 인생이다. 미학의 천왕봉에도 오르고 싶다. 그러려면 관련 서적으로 조금씩 몸을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도전하려는 의지와 자신을 믿는 자존감을 채워야 한다.
The Jam의 That’s entertainment(306위)는 자신의 삶을 자랑스러워하는 영국 중산층과 노동 계층을 얘기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는 일상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노동 계층의 소소한 삶에서 자존감을 찾는다. 한국인이 인식하는 중산층 조건이 한때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십일 년 전인 2013년 경에는 부채 없이 삼십 평 아파트와 2,000 cc 넘는 자동차에 일억 원을 상회하는 금융자산을 소유하고 소득이 인당 월 오백만 원을 상회하며 일 년에 한 번 이상 해외여행을 다닐 수 있어야 중산층이라 간주했다. 당시에 이처럼 경제적 조건만으로 중산층을 구분하는 우리와 달리 해외 선진국은 그러지 않는다며 한국인의 속물근성을 가차 없이 비판하는 여론이 제법 있었다.
언론사의 논조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어느 신문기사를 인용해 본다. ‘미국의 중산층은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사회적인 약자를 도와야 하며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고, 정기적으로 구독하는 비평지가 있는 사람이다. 영국에서는 페어플레이를 할 것, 자신의 주장을 확실히 하며 신념을 가질 것, 나만의 독선을 지니지 말고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하는 이를 중산층으로 분류한다. 프랑스의 중산층 기준은 외국어 하나 정도 구사하여 폭넓은 세계의 경험을 갖출 것, 한 가지 분야 이상의 스포츠나 악기를 다룰 것, 남들과 다른 맛을 지닌 레시피로 손님 접대를 하고 사회봉사 단체에 참여할 것, 남의 아이를 내 아이처럼 꾸짖을 수 있을 것 등이다.’ 의심스러우면 위에서 언급한 선진국의 중산층 기준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시라. 아마 천편일률적으로 동일한 내용의 글들이 쏟아질 것이다. 인터넷에 올라온 내용을 검증 없이 무차별적으로 퍼 나른 결과다.
The Jams - That's Entertainment(1980년, 306위)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중산층(middle class)은 단어 뜻 그대로 경제적으로 중간에 위치한 계층을 의미한다. 비경제적 기준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OECD가 정의한 중산층은 한 나라의 가구를 소득순으로 세운 다음에 중위소득의 75~200%까지의 소득을 가진 집단이다. 2023년 우리나라 가구의 중위소득은 월 540만 원이었다. OECD 기준으로는 월 405만 원~1,080만 원 소득계층이 중산층으로 간주된다. 외국도 다르지 않다. 어디까지나 중산층은 경제적인 수치에 따라 분류된다. 우리만 유별난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렇다면 상기한 이슈에서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하는 부분은 어떤 것들 일까?
우선 2013년에 삼십 평 아파트에 중형차 이상을 빚 없이 소유하고 금융자산이 일억 원 이상에 세후 인당 월 오백만 원 이상 벌 수 있는 가구는 사실상 상위 십 퍼센트 이내에 불과했다. 사실상 상위 십 퍼센트 남짓한 계층을 중산층의 조건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대다수 사람들이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왜 중산층의 지위를 누리는 다수의 사람들이 스스로에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우리는 해방 이후 좁은 국토에서 전 연령대에서 동년배들과 무한 경쟁을 벌이며 살아왔다. 경제는 불균형 발전 모델을 근간으로 압축 성장을 했다. 그 결과 부의 편중이 심해지고 사회 안전망이 불충분하여 정규직을 그만두거나 경쟁에서 밀린 이들은 중산층에 머물러 있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중산층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안한 나머지 더 높은 곳을 바라보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한편 근거 없는 주장에 대한 맹신을 꼽을 수 있다. 나 역시 한 때 과연 선진국 시민 의식은 다르다고 감탄한 바 있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구미 선진국에서 유독 비경제적인 요인으로만 중산층을 정의했다는 전제가 미심쩍었다. 인터넷이나 유튜브엔 무량한 정보들이 떠돈다. 대개 사실과 진실에 기반하지만 개중엔 의도적으로 작성된 페이크 기사나 잘못된 정보들이 허다하다. 구글을 샅샅이 뒤졌지만 해외 어디에서도 국내 언론이나 블로그에서 제시하는 정의를 얘기하지 않았다. 추정컨대 인터넷에 떠도는 선진국의 중산층 정의는 민주주의 공화국 시민으로서 마땅히 보편적으로 지녀야 할 덕목이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중산층으로서 최소한 갖추어야 할 시민의식이겠다. 그렇다면 우리도 중산층에게 요구될 성숙한 시민의식의 덕목과 잣대를 세우면 될 일이 아닌가?
이제 더 이상 우리 사회만 중산층에 대한 정의가 배금주의에 빠졌거나 속물적 기준이라 비하하지 말자. 한국은 경제 규모와 산업 인프라 측면에서 이미 선진국 반열에 다가섰다. 물론 선진국에 비해 부족한 면이 없지 않다. 그래도 선진 시민의 자긍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우리는 서구 사회가 수백 년간 자유와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 흘린 피의 대가로 체화된 성숙된 시민의 도덕률을 무장하지 못한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나만 잘살면 된다는 각자도생의 분위기가 팽배한 우리가 반면교사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메세타를 타고 흐르는 음악으로부터 연상된 부조리와 실존의 상념에 빠져 있다가 어느새 온타나스에 도착했다. 아침 결에 지나쳐온 산볼은 메세타의 오아시스다. 초원길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알베르게 하나만 외로이 서 있는 곳. 게다가 베드는 달랑 열두 개. 고원의 밤하늘에서 넘쳐흐르는 은하수를 볼 수 있어 예약 경쟁이 심한 곳. 엊그제 오아시스 산볼에 전화를 넣었더니 만실이란 응답에 아쉬움만 삼켰다. 순례자의 묘비로 보이는 돌무덤이 다가왔다. 망자는 여기서 순례를 멈춰야 했다. 하지만 이곳을 지나는 후인들이 고인의 간절한 의지를 기꺼이 이어받아 끊임없이 산티아고까지 무사히 전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 역시 그러할 것이고.
온타나스 초입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서울에서는 자연스레 그늘을 찾아 들어갔을 텐데 나그네 티를 내려한 건지 햇살이 쏟아지는 테이블을 자청해 잡았다. 사실 순례길 아침 햇살이 그리 부담되지 않거니와 무의식적으로 쾌청한 하늘에 묵은 의념들을 말려 버릴 심산이었는지 모르겠다. 어디선가 나타난 길냥이 한 마리가 담벼락 위를 따라 쪼르르 내 곁으로 다가온다. 천천히 다가가 친해질 요량으로 손가락을 구부려 얼굴 가까이 대보려 시도했건만 냥이 특유의 도도함을 뽐내며 무심히 지나친다. 오늘은 카스트로헤리스에 예약을 해놨다. 온타나스도 조망이 아름답고 고요한 시골 마을이다. 이곳에서 멈춰 하루를 정리하는 것도 괜찮은 대안이겠지만 어쩔 수 없이 행장을 다시 꾸렸다. 메마른 흙길에 다시 올랐다.
순례를 하다 운명을 다한 이들을 만날 때면 안타깝고 애잔했다. 고인의 의념을 산티아고에 전하고 싶다. 가까이 가는 걸 허락치 않은 온타나스 길냥이
성 안톤 수녀원 유적이 얼마 남지 않을 무렵이었다. 네댓 헥타르 가량 돼 보이는 커다란 밭을 트랙터 한 대가 수확 후 버려진 밀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이 정도 면적을 한 사람이 씨를 뿌리고 비료를 치며 수확을 한다. 기계화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재작년 미국의 농기계 회사인 존 디어가 출시한 완전 자율주행 트랙터가 메세타처럼 광대한 평원에서 사용하기 적합할 것 같다. AI와 로봇 기술의 발전이 생산성 향상에 따른 고용 감소라는 부작용을 불러일으키겠지만 이촌향도(離村向都)로 인한 인구 공동화가 심각한 외딴 마을의 일손 부족 문제를 해결할 대안이란 단상을 해봤다. 곧이어 도착한 성 안톤 수녀원 유적은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이 간데없다는 시조를 절로 읊게 만든다. 마치 기둥만 남은 파르테논 신전 같은 고대 유적에 들어선 착각이 일었다. 유장한 세월을 꿋꿋하게 버텨낸 수녀원 아치와 건물의 잔재를 경외했다.
신작로 같은 길을 따라가면 성 안톤 수녀원 유적에 이른다. 드넓은 밀밭은 트랙터 한 대로 정리중이다. 수녀원 외벽만 남은 유적에 작은 알베르게가 들어서 있다.
드디어 카스트로헤리스가 보인다. 타원형 종지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야산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정상에는 중세 때 요새로 쓰였을 법한 성채가 들어섰고 마을 초입에는 낡은 성당 종탑이 높이 세워져 있다. 메세타에 있는 마을은 저마다 독특한 풍미를 지닌 것 같다. 중세 분위기가 물씬한 이 마을에 머물고자 한 이유가 있다. 순례자 카페에서 곧잘 거론되는 한인이 운영하는 알베르게에서 라면과 김밥을 오찬으로 삼으려 했다. 동포라 해서 특별한 서비스를 기대하진 않았다. 단지 이역만리에서 곤한 걸음을 내딛는 동포들의 피로를 해소해 줄 따스한 미소를 상상했다. 알베르게 앞에 도착한 시각이 열두 시.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오픈 시간은 오후 한 시. 땡볕에 기다릴 곳이 마땅치 않다. 오리온 알베르게에서 예약한 로사리아까지 1.3km. 라면 한 끼를 먹으려 왕복 삼십 분 이상을 걸어야 하는 수고를 자처키로 했다. 숙소에 도착해 개인 정비를 마친 다음 빨래를 했다. 순례 중 처음으로 건조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쨍한 햇볕에 바람이 적당히 분다. 햇살을 받아 뽀송뽀송하게 자연 건조된 세탁물을 맞이할 생각에 기분이 업되어 라면 먹으러 가는 길이 즐겁기만 하다.
웬걸! 기대가 큰 만큼 실망이 큰 법이다. 이른 오후에 리셉션 홀이 한가하건만 우리를 맞는 주인장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보이질 않았다. 으레 찾아오는 한국인 순례객 중 하나라는 듯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주문을 받았다. 오히려 홀을 찾아온 동네 주민에게 활짝 웃으며 반긴다. 한민족보다는 이웃사촌이 가까웠다. 생면부지의 사이지만 알베르게를 운영하는 한인이 거의 드물어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했건만 괜스레 무안했다. 유쾌한 기대는 이내 사그라져 그렇게 먹는 라면 맛이 환상적일 리가 없었다. 그래도 누나가 모처럼 흡족하게 식사한 모양이라 다행이었다. 식사를 마친 다음 미련 없이 맛있게 먹었다며 웃어주고 나왔다. 여주인장이 한인 손님들을 살갑게 대하지 않은 이유를 지금도 모르겠다.
여자의 마음은 초록이 동색인 건가? 가끔 아내 기분이 상해 있을 때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뭔가 분명히 불만이 있는 표정이건만 당최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이럴 때면 미안하다, 잘못했다 하며 기분을 맞춰주려 하는데 도리어 기름에 불 붓는 격이 된 경우가 허다하다. ‘뭐가 미안한데?’ 라거나 ‘오빠가 잘못한 게 뭔지 알아?’ 물어보면 당황하기 일쑤다. 뭐 때문에 마음에 안 드는지 도통 모르는데 어떻게 대답을 한단 말인가? 일언반구 못하고 눈치만 보는 내 모습이 화를 더 돋게 한다. 이런 불쌍한 남편들의 애처로운 심정을 노래한 곡이 있다. The Animals가 절절히 부른 'Don’t let me be misunderstood(315위)'이다. 세상의 모든 아내들이여! 이 노래를 들으며 좋은 의도를 가진 영혼의 소유자인 그대들의 가여운 남편을 오해하지 마시길. 물론 아내가 실망하지 않도록 나를 포함한 모든 남편들 또한 변해야겠지만.
The Animals - Don't Let Me Be Misunderstood(1965년, 315위)
돌아오는 길에 마을을 둘러보다가 연배가 있으신 한국인 부부를 만나 반갑게 인사를 했다. 로사리아 근처에 있는 ATM기에서 환전을 했다. 스페인 은행 ATM기 중에는 유심을 충전하는 서비스가 제공되는 곳이 있다. 사용 중인 유심카드가 만료되면 ATM에서 충전할 계획이었다. 저녁 식사를 아까 뵌 한국인 부부와 같이 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유심 카드 기한이 끝나 다시 구매해야 하는데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모른다며 어려움을 토로하셨다. 유심이 먹통이 되면 이동 중에 왓츠앱이 끊기고 지도를 확인한다던가 예약 전화를 할 수 없어 난감하기 짝이 없다. 내가 그 상황에 몰릴 생각만 해도 답답할 노릇이다. 보통 잡화점에서 파는 경우가 있어 복숭아를 샀던 가게에 가보자고 제안했다. 가게를 보는 할머니에게 구글 번역기로 물어봤는데 유심을 팔지 않는다고 했다.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ATM가 떠올랐다. ATM기 두 군데를 찾았는데 유심충전이 되질 않는다. 슈퍼마켓에 들어가 물었더니 근처에 유심충전이 가능한 ATM기를 알려준다. 다행히 충전이 제대로 되었다.
두 분 모두 충전을 하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는지 환하게 웃으신다. 나도 제대로 되어 다행이란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이번엔 충전 천사의 자격을 갖춘 것 같아 흡족했다. 누나는 충전하는 그 짧은 틈에 남편분의 핸드폰에 메모된 아내분의 애칭을 보고 즐거워하신다. 스페인 젤라였다. 문득 내 휴대폰을 켰다. 그랜드 캐니언에서 라스베이거스로 돌아오는 밤하늘의 별무리를 향해 두 손을 활짝 든 아내의 뒷모습이 배경이다. 여행 중인 아내로부터 이 사진을 라인으로 받았을 때 억눌렸던 감정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는 아내 모습에 울컥했다. 홀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회사 일에 치여 스트레스가 극심해 늘 지친 표정이었다. 그랬던 아내가 은빛 가득히 빛나는 은하수에서 잃었던 동심을 찾아 환하게 웃었을 게다. 깜깜한 도화지 위에 별들이 총총한 카스트로헤리스 밤하늘 위로 그리운 얼굴이 아로새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