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at's Entertainment - 성숙한 중산층의 자격
2023년 5월 25일 오르니스 델 까미노 - 까스트로헤리스 19.9 km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엔 오랜 세월 비바람으로 풍화된 고풍스런 벽돌 집들이 줄지어 있다. 고택 처마 밑에 둥지를 튼 새들이 지저귀는 싱그러운 소리가 운치를 더한다. 언제 들어도 활력을 북돋우니 반갑다. 바삐 나는 새들은 환송의 합창을 보내는데 떠나는 나그네의 발걸음이 한가롭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발을 떼기가 주저되나 보다.
미풍이 귓가를 연신 스쳐가니 발걸음이 가볍다. 경쾌하게 내걷다가 문득 보법을 바꿔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10kg이 넘는 배낭을 메고 스틱에 의지하다 보면 노르딕 워킹이 자연스럽다. 이 워킹은 허벅지와 정강이 같은 하체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허리를 꼿꼿이 펴서 복부에 힘을 주고 어깨를 앞뒤로 움직인다. 양손에 힘을 빼 폴을 흘리듯이 뒤로 보낸 뒤 땅을 강하게 밀어낸 탄력으로 나간다. 이 때 장딴지에 힘준 디딤발을 낮게 들어 앞으로 내딛는다. 그런데 새소리가 흥겨워 나도 모르게 디딤발을 평소보다 높게 올려 롤링하듯 걸었다. 의외로 종아리에 부하가 확실히 덜 걸려 훨씬 편했다. 걷는 리듬감은 배로 늘었다. 복근을 더 써야 해서 중심이 더욱 안정된다. 노르딕 보법의 새로운 발견이자 새들이 전해준 이별 선물이었다.
무협지에 등장하는 무림 고수들은 내공을 용천혈에 발산시킨 반발력으로 경공을 펼친다. 노르딕 워킹에서 폴을 지치는 것에 비견된다. 스틱 없이 걷는 워킹을 범부의 걸음에 비하자면 노르딕 워킹은 고수의 경신술이다. 가히 풀잎 위를 내달리는 초상비草上飛 수준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새들이 준 작은 깨달음 하나로 답설무흔踏雪無痕 내지 등평도수登萍渡水의 경지에 다다른 주인공의 기분을 한껏 음미했다. 마침 주위 풍광마저 감탄사를 자아내게 했다. 까미노가 그려낸 멋들어진 수채화에 심취해 셔터를 연신 눌렀다. 한참 뒤쳐져 있던, 어제 만났던 중국계 처자가 어느새 나를 따라잡더니 표표히 앞서 나간다. 절대고수가 펼치는 능공허도凌空虛道의 경신술이 한낱 필부匹婦의 소걸음에 잡힌 셈이다. 하늘을 찌르는 기예와 재능은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했던가! 그녀가 선보인 우보만리의 신공이야말로 공간을 축지한 절세의 경공이었다.
태양의 나라, 스페인의 메세타 초원에 풍력 발전기만 보인다. 저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마다 예외없이 풍력 발전기들이 늘어서 있다. 태양광 패널은 아무리 눈을 씻고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다. 스페인은 재생 에너지 중 풍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데이터가 비로소 절감되었다. 재생 에너지의 46%가 풍력이라고 하니 이제는 바람의 나라라 칭해야 맞겠다. 시간이 갈수록 풍력과 수소, 태양광 등 재생 에너지의 그리드 패리티가 낮아질 건 명약관화하다. 그럼에도 당장의 균등화 발전단가LOCE가 이들보다 낮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화석 연료에 의존하는 정책을 고집하는 우리네 앞날이 걱정스럽다. 2030년대에는 탈탄소와 에너지 비용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한다. 태양광 정책 자금이 헛되이 유용되도록 방치한 전 정부의 책임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를 핑계로 친환경 에너지 정책을 대폭 철회한 현 정부의 대책 없는 근시안 또한 재앙적인 정책 실패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심히 우려할 사안이다. 백년대계가 아닌 십년소책일망정 정권이 바뀌어도 정부 정책은 일관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정책 신뢰성이 제고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정권의 향배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부정하고 엎어버리기 일쑤다. 이념이 다른 정치인들이야 그렇다 쳐도 그 정책을 입안했던 주무부서가 자기 부정하는 카멜레온 행정에 이르면 지독한 절망감에 빠진다. 설명하기 힘든 부조리다.
화경과 현경에 이른 고수는 주저없이 갈댓잎 하나로 강을 건넌다지만 나 같은 필부匹夫는 수많은 강 중에 어느 강을 건널 지 망설이기 십상이다. Jimmy Cliff도 암담한 시절이 있었다. 기대했던 유럽 공연은 실패로 끝났다. 전기를 꾀할 방안이 떠오르지 않자 도버해협을 건너며 낙담했다. 'Many rivers to Cross(317위)'는 그의 막막한 심정을 담았다. 이 곡을 들은 지인이 그에게 영화 'The Harder they come(1972)'에 출연을 제의했다. 노래는 영화의 OST에 수록되어 인기를 끌었고 그는 그토록 바라던 세계적인 레게 가수로 발돋움했다. 수많은 강에서 길을 잃고 헤매면 남는 건 절박한 자존심뿐, 되는 일은 없고 사랑마저 떠나기 마련이다. 도처에 난관이 도사려 실마리를 찾기 힘든 난감한 상황. 절망의 나락에 빠져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 이런 경우 대개는 삶과 자아에 대해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부조리에 빠지기 십상이다. 지미의 절규가 내게 부조리로 다가선다.
부조리하면 다들 카뮈의 '이방인(1942년)'을 떠올린다. 종교를 부정한 근대인이 자유스러운 삶을 추구하다 죽음을 피하려고 다시 종교에 귀의하는 모순. 카뮈는 삶과 죽음으로 모순된 이 세상을 부조리로 간주했다. 그는 이성이 모두를 설명할 수 없다고 단정했다. 그래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주인공 뫼르소를 부조리에 좌절하여 목적 없이 부유하는 삶에 만족하는 인간으로 그렸다. 그가 칼날에 반사된 태양빛에 현기증을 느껴 살인하기 전까진. 어머니의 죽음에도 무덤덤하던 주인공을 해방시킨 결정적 사건은 태양 살인이다. 흉포한 범죄가 극심한 요즘도 태양빛이 눈을 찔러 살인했다고 하면 사이코패스로 오해 받을 것이다. 그만큼 기괴한 범죄에 대한 해석이 평론가마다 다르다. 그중 철학자 김진영의 견해가 이채롭다. 그는 아랍인을 살해한 장면에서 태양의 이동에 주목하라 평한다. 주인공이 움직이는 한 태양은 축복이고 자유를 주는 존재다. 그런데 부조리한 세상에서 벗어나게 해줄 바위 그늘로 가는 길을 아랍인이 가로막는다. 그로 인해 태양이 정지하고 칼날에 반사된 정지된 태양은 그저 죽음의 태양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아랍인을 쏴 죽인 뫼르소는 부조리에서 벗어날 그늘을 되찾는다. 하지만 살인죄를 저질러 또 다른 부조리한 세상인 감옥에 갇힌다. ‘이방인’의 2부는 감옥에서 그가 잊고 있던 '별이 반짝반짝 빛나는 밤 냄새, 소금 냄새, 흙냄새'와 어린 시절의 행복한 기억해낸다. 부조리를 의식한 깨어있는 인간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다. 태양 살인이 전한 죽음의 해방 미학이다.
내가 '미학'이란 학문을 처음 접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다. 얼마 전 소천한 故 김민기 씨의 노랫말이 너무 아름다워 이리저리 눈동냥했다. 내게 미학은 철학이나 문학보다 범접하기 어려운 분야다. 미와 미적 존재, 예술의 근원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게 난해했다. 미학자에 대한 편견도 한 몫 했다. 진중권처럼 제 잘난 듯 현학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에 거부감이 컸다. 김진영 작가를 접하고 나서 미학이 내포한 진정한 아름다움의 편린이나마 겨우 알게 되었다. 저자를 통해 미학의 대상인 모든 아름다움과 추함이 차안(此岸)이자 카오스라면, 미학은 피안(彼岸)과 코스모스라는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미학이 어려운 건 부분에 불과한 미학이 전체로서의 미와 추를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겠다. 대학교 2학년 여름에 지리산 뱀사골과 노고단을 거쳐 화엄사로 하산한 적이 있다. 노고단에 오르면 천왕봉이 저 멀리서 어렴풋이 고고한 자태를 드러낸다. 접근을 불허하는 듯한 천왕봉은 내가 감히 범접하지 못할 존재로 각인되었다. 선입견 탓에 37년간 천왕봉 일출은 꿈도 꾸지 않았다. 8년 전에야 오랜 소원을 이루었다. 마찬가지로 미학은 그간 내가 다가서지 못할 금단의 영역이었다. 백세 인생을 논하는 시대다. 반 백을 넘긴 지 오래나 아직 절반이 남은 인생이다. 미학의 천왕봉에 오르고 싶다. 그러려면 관련 서적을 읽어 조금씩 문강文剛을 이뤄야 한다. 도전하려는 의지와 자신을 믿는 자존감도 키워야 한다.
The Jam의 That’s entertainment(306위)는 자신의 삶을 자긍하는 영국 중산층과 노동 계층을 얘기한다. 그들은 자신의 일상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소소한 삶에서 자존감을 찾는다. 한국인이 인식하는 중산층 조건이 한때 화제였다. 2013년에는 부채 없이 30평 아파트와 중형차에 1억 원을 상회하는 금융자산을 소유하고 월소득이 인당 500만 원을 상회하며 연 1회 이상 해외여행을 다녀야 중산층이라 간주했다. 당시 이를 비판하는 여론이 제법 많았다. 다른 선진국들의 정의는 그러지 않다며 한국인의 속물근성을 비난했다.
언론사 논조도 이와 유사했다. 어느 신문기사를 인용해 본다. ‘미국의 중산층은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사회적 약자를 도우며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고, 정기적으로 구독하는 비평지가 있는 사람이다. 영국에서는 페어플레이를 할 것, 자신의 주장을 확실히 하며 신념을 가질 것, 나만의 독선을 지니지 말고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하는 이를 중산층으로 분류한다. 프랑스는 중산층을 외국어 하나 정도 구사하여 폭넓은 세계의 경험을 갖출 것, 한 가지 이상의 스포츠나 악기를 다룰 것, 남들과 다른 맛을 지닌 레시피로 손님 접대를 하고 사회봉사 단체에 참여할 것, 남의 아이를 내 아이처럼 꾸짖을 수 있을 것 등으로 규정한다.’ 의심스러우면 선진국의 중산층 기준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시라. 천편일률적인 내용들이 쏟아질 게다. 인터넷 게시물을 팩트 체크 없이 무차별적으로 퍼 나른 결과다.
그런데 이상하다. 중산층middle class은 말 그대로 경제적으로 중간에 위치한 계층을 의미한다. 비경제적 기준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OECD는 중산층을 한 나라의 가구를 소득순으로 정렬하여 중위소득의 75~200%에 속한 집단으로 정의한다. 2023년 우리나라 가구의 중위소득이 월 540만 원이다. OECD 기준으로는 월 405만 원~1,080만 원 사이의 소득계층이 이에 해당한다. 외국도 마찬가지다. 어디서나 중산층은 경제적인 수치에 따라 분류된다. 우리만 유별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우리가 정작 문제 삼아야 할 문제들이 따로 있다.
우선 2013년 한국인이 인식하는 중산층 기준에 해당하는 가구는 상위 10% 이내에 불과했다. 10분위 중 최상위 계층을 중산층이라 인식한 것이다. 대다수는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려야 했다. 왜 중산층들은 자신의 지위에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우리는 해방 이후 전 연령대에서 동세대와 무한 경쟁을 벌이며 살아왔다. 경제는 불균형 발전 모델을 근간으로 압축 성장했다. 그 결과 부의 편중이 심해지고 사회 안전망이 불충분했다. 정규직을 그만두거나 해고되면 대체로 최저임금 수준의 일자리에 취업한다. 자산이 없으면 중산층에 머물기가 불가능하다. 퇴로가 없는 저성장이 문제의 본질이다.
한편 근거 없는 주장에 대한 맹신이다. 한 때는 나도 과연 선진국 시민 의식은 다르다며 감탄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구미 선진국들만 비경제적 요인으로 중산층을 정의한다는 전제가 미심쩍었다. 인터넷이나 유튜브엔 무량한 정보들이 떠돈다. 대개 사실과 진실에 기반하지만 의도된 가짜 뉴스나 잘못된 정보들도 허다하다. 구글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국내 언론에서 언급한 정의를 찾지 못했다. 추정컨대 인터넷에 유포된 선진국의 중산층 정의는 공화국 민주시민으로서 마땅히 보편적으로 지녀야 할 덕목일 게 틀림없다. 아니면 중산층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시민의식이거나. 만일 그렇다면 우리도 중산층에게 성숙한 시민의식의 덕목과 잣대를 요구하면 그만이다.
더 이상 우리 사회가 배금주의에 빠졌거나 속물적이라 비하하지 말자. 한국은 경제 규모와 산업 인프라 측면에서 이미 선진국 반열에 다가섰다. 하드웨어나 양적 기준은 충분히 갖췄다. 선진국에 비해 부족한 건 소프트 웨어다. 특히 민주적 시민의식과 도덕률에서 그렇다. 서구 사회가 수백 년간 자유와 평등을 위해 피 흘리며 민주주의를 체화한 반면 우리의 민주공화정은 이제사 80년을 바라본다. 각자도생의 경쟁원리에 익숙한 우리 사회가 반면교사할 부분이겠다.
메세타에 흐르는 음악으로부터 연상된 부조리와 실존의 상념에 빠졌다가 온타나스Hontanas에 도착했다. 아침 결에 지나쳐온 산볼San Bol은 메세타의 오아시스다. 초원길에서 살짝 들어가 알베르게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는 곳. 베드는 달랑 열두 개. 고원의 밤하늘을 하얗게 수놓는 은하수 덕분에 예약 경쟁이 극심하다. 엊그제 전화를 넣었더니 만실이란 응답에 아쉬움만 삼켰다. 순례자의 묘비로 보이는 돌무덤이 다가왔다. 망자는 여기서 순례를 멈춰야 했다. 하지만 이곳을 지나는 모든 이들이 고인의 간절한 유지를 기꺼이 이어받아 산티아고에 전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 역시 그러할 것이고.
온타나스 초입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서울이라면 그늘 먼저 찾았을텐데 나그네 티를 내려는 건지 햇살이 쏟아지는 테이블을 자청했다. 아침 햇살이 그리 부담스럽지 않거니와 나도 몰래 쾌청한 하늘에 묵은 의념들을 말려 버릴 심산이었던 것 같다. 어디선가 나타난 길냥이 한 마리가 담벼락 위를 따라 쪼르르 곁으로 다가온다. 친해질 요량으로 손가락을 구부려 조심스레 코뽀뽀를 시도하니 냥이 특유의 밀당을 하며 도도히 지나친다. 온타나스는 조망이 아름답고 고요한 시골 마을이다. 여기서 멈춰 하루를 정리하는 것도 괜찮은 대안이나 미리 카스트로헤리스에 예약을 해둔 터라 어쩔 수 없이 행장을 꾸려 메마른 초원길에 다시 오른다.
성 안톤 수녀원Convento de San Antón 유적에 도착하기 전이었다. 트랙터한 대가 네댓 헥타르 정도 되는 넓은 밭에서 버려진 밀짚을 정리중이다. 이 정도 면적을 혼자 커버한다. 기계화가 아니면 어불성설이다. 몇 해 전 미국의 존 디어가 완전 자율주행 트랙터를 출시했다. 메세타처럼 광대한 평원에서 무척 유용할 것이다. AI와 로봇 기술의 발전은 생산성을 향상시켜 고용 감소를 불러오는 부작용이 있지만 이촌향도離村向都로 인한 인구 공동화가 심각한 외딴 마을의 일손 부족을 해결할 대안이라 생각했다. 성 안톤 수녀원 유적은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이 간데없다는 시조를 절로 읊게 한다. 기둥만 건재한 파르테논 신전 같아 고대 유적에 들어선 착각이 인다. 유장한 세월을 꿋꿋하게 버텨낸 수녀원 아치와 건물의 잔재를 경외했다.
드디어 카스트로헤리스가 보인다. 둥근 종지그릇을 엎어놓은 형상의 야산 아래 마을이 있다. 정상에는 중세 때 요새로 쓰였을 법한 성채가 들어섰고 마을 초입에 낡은 성당 종탑이 높이 세워져 있다. 메세타에 위치한 마을은 저마다 독특한 풍미를 지닌 것 같다. 중세 분위기가 물씬한 이 마을에 머무는 이유가 있다. 오찬 메뉴로 한인 여사장이 운영하는 알베르게의 라면과 김밥을 택했다. 동포라 해서 특별한 서비스를 기대하진 않았다. 단지 이역만리에서 피곤에 찌든 동포 나그네들을 따스한 미소로 맞이하는 상상을 했다. 알베르게 앞에 도착한 시각이 12시.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오픈 시간은 오후 1시. 땡볕에 기다릴 곳이 마땅치 않다. 오리온 알베르게에서 예약한 로사리아Albergue Rosalia까지 1.3km 거리. 라면 한 끼를 먹으려 왕복 삼십 분 동안 걷는 수고를 자처했다. 숙소에 도착해 개인 정비를 마친 다음 빨래를 했다. 순례 중 처음으로 건조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쨍한 햇볕에 바람이 적당히 분다. 햇살을 받아 자연 건조되어 뽀송뽀송하게 마른 세탁물을 기대하며 라면 먹으러 가는 길이 즐거웠다.
웬걸! 기대가 큰 만큼 실망이 큰 법이다. 이른 오후에 리셉션 홀이 한가하건만 주인장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보이질 않았다. 으레 찾아오는 한국인 순례객 중 하나라는 듯 무미건조하게 주문 받았다. 오히려 홀을 찾은 동네 주민에게 활짝 웃으며 반긴다. 한민족보다 이웃사촌이 가까웠다. 생면부지일지라도 알베르게를 운영하는 한인은 처음이라 반가운 마음에 인사 했건만 괜스레 무안했다. 유쾌한 기대는 사그라졌고 그렇게 먹는 라면 맛이 환상적일 리 없었다. 그래도 누나가 오랜만에 만족했다고 해 다행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으레히 맛있었다고 웃어주는 성의를 보이고 나왔다. 여주인장이 한인 손님들을 살갑게 대하지 않은 이유를 지금도 모르겠다.
여자 마음은 초록이 동색일끼? 아내가 기분 상한 이유를 당최 알 수 없는 때가 비일비재하다. 뭔가 분명히 불만스러운데 도대체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이럴 때마다 미안하다, 잘못했다 하며 기분을 맞추려 노력하지만 도리어 기름에 불 붓는 격이 경우가 허다하다. ‘뭐가 미안한데?’ 라거나 ‘오빠가 잘못한 게 뭔지 알아?’ 물으면 곤혹스럽다. 마음에 안 드는 까닭을 도통 모르겠는데 어찌 대답한단 말인가? 일언반구 못하고 눈치를 보는 내 모습이 아내의 화를 더 돋군다. 이런 불쌍한 남편들의 애처로운 심정을 노래한 곡이 있다. The Animals가 절절히 부른 'Don’t let me be misunderstood(315위)'이다. 세상의 모든 아내들이여! 이 노래를 들으면서 좋은 의도를 지닌 영혼의 소유자인 당신의 가여운 남편을 오해하지 마시길. 아내가 실망하지 않도록 나를 포함한 모든 남편들 또한 변해야겠지만.
로사리아 근처에 있는 ATM기에서 환전을 했다. 스페인 은행 ATM기 중에는 유심 충전이 가능한 기기가 있다. 사용 중인 유심카드가 만료되면 대리점이 아닌 ATM에서 충전할 계획이었다. 알베르게에서 한국인 부부와 저녁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얘기를 나누다가 유심 카드 기한이 끝나 재충전해야 하는데 어디서 하는지 모른다는 고충을 토로하신다. 유심이 먹통이 되면 이동 중에 왓츠앱이 끊기고 지도를 확인하거나 예약 전화가 불가능해 난감하기 짝이 없다. 내가 그 상황이라도 엄청 답답할 노릇이다. 잡화점에서 유심을 팔기도 해 복숭아를 구입한 가게에 가보자고 제안했다. 주인 할머니에게 구글 번역기로 물어봤는데 유심을 팔지 않는다고 한다.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ATM가 떠올랐다. 두 군데 ATM기에 가봤는데 유심충전이 되질 않는다. 인근 슈퍼마켓에 들어가 물었더니 충전 가능한 ATM기를 알려준다. 기기가 낯선 두 분을 대신해 충전을 도와드렸다.
두 분 모두 충전하고 나서야 안심 되었는지 환하게 웃으신다. 나도 제대로 되어 다행이라 여겨 마음 놓였다. 이번엔 충전 천사의 자격을 갖춘 것 같아 흡족했다. 누나는 충전하는 그 짧은 틈에 남편분의 핸드폰에 메모된 아내분의 애칭을 곁눈질 하곤 즐거워한다. 아내분 애칭은 스페인 젤라. 문득 내 휴대폰을 켰다. 그랜드 캐니언 밤하늘의 별무리를 향해 두 손을 활짝 든 아내의 뒷모습이 배경이다. 여행 중이던 아내로부터 이 사진을 라인으로 전송받았을 때 울컥했다. 한동안 감정에 억눌려 고생하다가 타지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아내가 애처로웠다. 홀로 여행을 떠나기 전, 회사 일에 지쳐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었다. 그랬던 아내가 은빛 가득한 은하수에서 잃었던 동심을 찾아 환하게 웃는 것 같다. 깜깜한 도화지 위에 별들이 총총한 카스트로헤리스 밤하늘 위로 그리운 얼굴이 아로새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