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하지 못했던 명곡들(상)
2023년 5월 23일 부르고스 연박
부르고스에서 하루 머무는 날이다. 순례 일정을 기획할 당시 혹시 모를 변수를 고려해 삼일의 버퍼를 마련했다. 부르고스와 레온에서 각 일박씩, 산티아고를 십 킬로미터 앞둔 라바코야에서 일박을 예정했다. 세 곳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 대도시에서 도심을 둘러보는 데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산티아고에 일찌감치 도착해 대성당 광장에서 마음껏 여운을 즐기고 싶었다. 몸살이나 부상 등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경우를 대비할 목적도 있었다. 연박 등으로 미리 빼놓은 사흘 외에 완주 이후 산티아고와 마드리드에 머물 나흘도 상황에 따라 가변할 요량이었다. 출국 사십삼 일 째는 어찌 되었건 귀국 편 비행기에 올라야 해서 나름의 버퍼를 충분히 설정해두었다.
부르고스 연박을 기획할 당시에는 빌바오에 소재한 구겐하임 미술관을 관람을 염두에 두었다. 그런데 어제 부르고스 대성당을 들르지 않아 차질이 생겼다. 구겐하임 미술관을 다녀와 산타 마리아 대성당까지 구경하려면 아침 일찍 서둘러야 한다. 어젯밤 잠들기 전 누나와 상의 끝에 미술관은 패스하기로 했다. 아쉽지만 오랜만에 맞을 늦잠에 욕심이 더 동했다. 다시금 시간 관리의 중요성을 체감했다. 어제 바지런을 좀 떨었으면 쇠락한 철강도시를 세계적인 관광지로 탈바꿈시키는 데 한몫을 한 아름다운 미술관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부지런함은 생명의 길이요 게으름은 죽음의 길이다. 부지런한 사람은 죽지 않지만 게으른 사람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법구경의 한 구절이다. 잠깐의 게으름이 세계적인 명소를 볼 기회의 싹을 무참히 지르밟아 버렸다.
미술관 방문이 생략되자 급할 게 없었다. 아홉 시를 넘긴 후에야 느지막이 기지개를 켰다. 일찌감치 눈이 떠졌지만 부처님 말씀을 아예 따르지 않기로 한 것처럼 침낭 속에서 한참을 미적대었다. 숙소에서 바나나와 빵을 브런치로 삼은 후 어슬렁거리며 대성당에 갔다. 산타 마리아 대성당은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기 위해 건축되었다. 웅장하게 지어진 건축물과 화려하기 그지없는 외관 장식이 압권이다. 고딕 구조로 설계된 내부는 성화와 세밀하게 부조된 조각상, 오색 빛깔로 치장된 스테인드 글라스들로 가득 차있다. 엄숙하게 꾸며진 성가대, 찬란한 금박을 두른 주 제단과 장식벽에 이어 왕의 권위와 위엄이 엿보이는 북쪽 익랑에 눈이 저절로 휘둥그레진다. 삼백 년 넘게 걸려 완성된 인고의 아름다움이 감탄사를 절로 부른다. 성모 마리아를 기리려 했으니 얼마나 치성을 다했겠냐마는 극치를 넘어선 화려함과 압도적인 위세에 오히려 거부감이 조금 일었다. 신실한 신앙에 앞서 남 부끄럽지 않을 호사스러운 봉헌에 앞장섰던 카스티야 왕과 부르고스 대주교의 욕망으로 만들어진 걸작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대성당을 꾸미는 수많은 오브제들 모두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중에서 기둥을 둘러싼 다섯 개의 조각 작품이 특히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다룬 부조물들이다. 이 작품에 어울릴 노래가 있다. 바로 Norman Greenbaum의 'Spirit in the sky(333위)'이다. 노만은 이 곡에서 영생과 구원을 언급했다. 유대인인 노만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노래했다. 기독교로 개종한 건 아니고 유대교보다 가스펠 시장이 더 큰 현실을 반영한 결과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힘겹게 메고 끝내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린 조각상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영화배우 겸 감독인 멜 깁슨이 제작·감독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년)'의 장면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고난을 잔혹하게 묘사해 논란을 일으켰었다. 이미 심하게 태형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예수님이 십자가를 힘겹게 짊어진 채 골고다 언덕을 향한다. 기진맥진해 겨우 버티는 예수님에게 조롱하며 무참히 채찍질을 하고는 잔인하게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에게 저들이 스스로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며 용서를 빈다. Jimmy Cliff는 'The harder they come(341위)'에서 누가복음 23장 34절을 인용했다. 그리고는 죽어 관 속에 묻힐지언정 살아서 꼭두각시나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무덤에서 자유인이 되겠다 일갈한다. 죽어서 간 하늘에서 맞이할 파이 보단 햇살이 비치는 동안 자기의 몫을 챙기겠다는 것이다. 'Spirit in the sky'와 'The harder they come'은 서로 다른 지향점을 노래했지만 예수님의 죽음을 소재로 했다는 공통점이 있어 산타 마리아 대성당을 관람하는 오전 일정에 사뭇 어울릴만했다.
대성당을 나와 산 미구엘 언덕 위에 있는 전망대를 찾았다. 탁 트인 시야에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화창한 햇살이 새들을 어루만지고 오수를 부르는 살랑이는 미풍이 시간을 재촉한다. 오전에 시립 알베르게 앞 스낵바에서 군것질을 했는데 이내 허기졌다. 오랜만에 뜨끈한 우동이 당겼다. 누나는 미소수프에 교자 몇 알로 만족했다. 배 속에 걸귀가 멍석 깔아 자리를 잡았나 보다. 국물 한 방울 남김없이 완그릇을 했는데도 포만감이 전혀 없다. 겨우 시장기만 달랜 것 같다. 잠시 쉬기로 해 숙소로 돌아가는데 살짝 어지러웠다. 내일부터 다시 걸어야 하는데 걱정되었다. 배고픔을 달래지 못해서 그런가 싶어 뭐든 배불리 먹자고 위안했다. 고기를 즐겨하지 않아 저녁으로 볼로네제 파스타를 양껏 먹고 숙소에서 바나나까지 먹었는데도 여전히 허전하다. 매일 이십 킬로미터 이상 걸어야 하는 만큼 가능한 한 육류를 충분히 섭취해 체력을 유지해야 한다. 코로나로 이곳 물가가 많이 올랐다지만 가성비가 괜찮은 고기 메뉴들이 흔하다. 그런데도 고기를 찾아 먹지 않는 식습관과 중증 면성애자 성향 탓에 동물성 단백질 공급에 신경을 덜 썼다. 걷기 위해서라도 육식 위주의 식단을 고려해야 하나 고민했다.
내게 간혹 찾아오는 지병이 있다. 원인 미상의 현기증이다. 처음에는 이석증으로 알았다. 유명하다는 전문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고 처방약을 복용했는데 크게 효과가 없었다. 신경과를 가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증상이 심해지면 눈을 감고 모로 누워도 빙글빙글 도는 회전성 어지러움증에 속이 메슥거려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 운이 좋아야 반나절, 보통은 온종일 누워 있어야 한다.일 년에 서너 번 정도 예고 없이 불규칙하게 발발하니 꽤나 불편하다. 그간의 경험으로 장시간 주의를 집중하거나 격한 운동이나 과로를 한 이후, 아니면 고강도 스트레스에 시달리면 징후가 나타날 확률이 높다. 순례를 준비하는 데 있어 가장 신경이 쓰였던 부분이다. 숙소나 마을에 머무는 중이라면 하루를 할애하여 컨디션을 조절할 수 있다. 만약 걸을 때 증상이 악화될 경우에는 정말 난감하다. 산을 넘는 와중이라면 최악의 상황일 것이다. 나헤라에 도착하던 날에도 미미하게 예후가 느껴졌으나 저녁을 서둘러 먹고 이른 잠을 청해 무사히 넘긴 적이 있다. 남들처럼 무릎이 아프거나 물집으로 고생하지 않는다. 현기증만 없다면 산티아고까지 그다지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 남은 기간 그러하길 바랄 뿐이다.
지면의 한계로 소개하지 못한 명곡들 (상)
Michael Jackson - Beat it(337위)
언제부터인가 까미노 주변 나무나 담벼락에 검정 스프레이로 'Michael Jackson'이라 휘갈긴 글씨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참 보이지 않다가 잊을만하면 다시 적혀 있는 게 마이클 잭슨을 추모하는 이가 적은 것 같다. 그의 유작 중 어떤 곡이 500대 명곡에 수록되었을까 궁금하던 차에 Beat it이 등장했다. 뮤직 비디오에 출연한 이들 중에는 실제 L.A. 를 주름잡는 갱단이 나온다. 서로 적대적이었던 크립스파와 블러드파를 화해시킬 목적으로 마이클 잭슨이 출연을 제안했다고 한다.
Joan Jett - I love rock 'n roll(484위)
원곡은 영국의 락밴드 애로우스가 만들었다. 남성이 이성을 유혹하는 줄거리였다. 여성 로커인 조앤이 영국 공연 중에 TV에서 애로우스가 불렀던 이 곡에 반해 리메이크를 결심했다. 밴드 멤버들이 반대를 했지만 굽히지 않았다. 원곡과 달리 여성이 먼저 남성을 유혹하는 내용으로 바꿔 불렀다. 중성적인 목소리와 전주 부분에서 강렬한 비트음을 연출한 기타 리프가 인상적이다.
Toots and the Maytals - Pressure drop(446위)
툿츠를 예명으로 썼던 프레드릭 히버트가 레게 장르를 전 세계에 알린 음악 영화 'The Harder They Come'에 수록했던 곡이다.
John Cougar Mellencamp - Pink houses(439위)
앞서 소개했던 대로 희망 없는 미국에 대한 저항을 노래했다. 더 이상 서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핑크 하우스가 없다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중산층이 무너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부의 양극화가 중산층 붕괴를 가속화시키는 가운데 중도 성향의 정치 세력이 설 자리가 사라져 간다. 이념의 양 극단 진영인 극우와 극좌가 정치의 주류로 부상한 결과, 양보와 타협을 미덕으로 하는 민주주의 원리가 점차 작동하기 어려워진다.
Dr. Dre - Nuthin’ but a ‘G’ thang(419위)
닥터 드레 솔로 데뷔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게스트로 출연한 래퍼 스눕 독과 같이 작곡했다. 스눕 독으로서는 메이저 데뷔 곡이기도 하다. 갱스터 랩의 전성기이자 서부 힙합의 상징적인 노래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백 홈'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다. 나는 문화를 받아들이는 면에서는 보수적인 것 같다. 랩과 레게가 그랬다. 한참 지나서야 음악 장르로서 인정을 했으니 말이다.
Don Henry - The Boys of summer(416위)
이글스의 리드 보컬인 돈 핸리가 솔로로 발표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에 떠난 여인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1985년 MTV 올해의 뮤직 비디오상을 수상했다. 옛 추억이 떠오를 때 들어봄직하다.
Elton John - Goodbye yellow brick road(380위)
부연할 필요 없는 명곡이다. 노란색 까미노 표식이 연상된다. 노란 벽돌길은 공상의 세계로 가는 길이자 삶의 해답을 얻는 길일 것이다.
The Bee Gees - How deep is your love(366위)
누군가 끝 모를 흑암의 바닥에서 고통받아 더 이상 희망 갖기를 포기하고 아무도 구원의 손길을 보내지 않을 때 그의 연인만이 한 줄기 빛을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 실패를 견디게 해 줄 구원자라는 점에서 사랑이 정말로 위대한가 보다.
Bob Dylan - Highway 61 revisited(364위)
밥 딜런의 은유가 가득한 노래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부조리를 얘기하는 것 같기도 하다. 61번 고속도로는 밥이 자란 미네소타 고향에서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스로 이어진 2300km의 도로이다. 루이지애나 흑인들은 61번 도로를 남부 외딴 지방에서 꿈 많은 북동부 도시로 탈출할 노란 벽돌길로 삼았을 것이다. 밥에게는 재즈의 고향으로 가는 길이자 세상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기회의 길이었을 것이다.
Creedence Clearwater Revival - Bad moon rising(355위)
인류에게 닥칠지 모를 종말론을 노래했다. 보통 종말론이 세기말에 극성을 부리는 데 이 노래는 미국이 구가했던 전후 황금기의 끝자락에 발표되었다. 1970년대의 암울한 스태그플레이션을 예고했던 것일까? 경제 불황을 예고했다기보다는 1969년 아폴로 11호가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사건을 떠올린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달 착륙이 인류가 건드려선 안될 판도라 상자라 여긴 걸지 모르겠다. 이런 해석들과 달리 C.C.R. 의 리드 보컬인 존은 허리케인이 마을을 휩쓰는 영화의 한 장면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소개했다. C.C.R. 은 큰 매형이 좋아하는 락 밴드 중 하나다. 매형은 락 마니아다. 하드 락과 메탈까지 섭렵해 이 장르로만 천 여장 CD를 소장 중이다. 매형께 CD 목록을 작성해 드리고 전 곡을 리핑해둘 겸 빌어왔는데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더 이상 게으름 피우지 말고 귀국 후에는 틈틈이 작업을 시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