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운설 Jul 24. 2024

[11일 차] 정규직 전환을 꿈꾸는 기간제 천사

All You Need Is Love - 최초의 풍요로운 사회

2023년 5월 21일 벨도라도 - 아타푸에르카 30.0km


  오 월 하순에 들어섰다. 우기 끝자락에 접어들어 어느 날엔 온종일 비가 내리지 않다. 오늘이 그렇다. 바람이 목동 되어 양떼구름을 듬성듬성 몰고 간다. 지나간 구름 사이로 햇살이 가득하다. 오랜만에 키다리 아저씨 그림자를 만났다. 때마침 며칠간 이어진 가슴속 폭우와 돌풍이 고요히 가라앉았다. 특히 심란하기만 했던 어제의 그늘에서 벗어나 가벼운 흥분이 고조된다. 목재로 지어진 다리를 지나는 감촉이 흙길을 걷는 맛과 또 달라 절로 웃음 짓게 한다. 밀밭 사이로 이어진 까미노를 걷는 묘미까지 곁들여지자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제 실수를 만회하려 진득하게 프레임을 잡았다. 흡족할 만한 사진을 몇 장 건졌다. 서둘러 휴대폰 목줄을 대충 둘둘 말아 주머니에 넣었다. 저만치 앞서간 누나를 따라잡으려 잰걸음 쳐 뛰어갔다.


  그렇게 희희낙락 모처럼 즐거움에 겨워하던 차였다. 뒤에서 뭐라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뒤따라 오는 일행들이 서로 언성 높여 얘기하나 싶어 모른 척 계속 걸어갔다. 우리가 돌아보지 않고 계속 걸어가자 급기야 꽥꽥 고함치기 시작한다. 뭔 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봤다. 할아버지 세 분이 삿대질하듯 등산 스틱 든 두 손을 들어 마구 흔들며 따라오셨다. 부지불식간에 실례했던 일이 있나 기억을 더듬었다. 도통 실수라 할 만한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 걸음을 멈춰 가만히 쳐다만 보자 그중 한 분이 앞서 나와 손을 흔드는데 누나가 손에 든 게 아무래도 핸드폰 같다고 했다. 아차 싶어 바람막이 주머니를 더듬었다. 옷깃만 잡힐 뿐 만져지는 게 없었다. 아뿔싸, 핸드폰을 떨어뜨렸구나! 냅다 할아버지께 달려갔다. 앞서 계셨던 분이 활짝 웃으며 네가 떨어뜨리고 가는 걸 봤다며 폰을 건넨다. 너무도 고마웠다. 연달아 고개를 숙여 ‘Muchas Gracias’를 연발했다. 이탈리아 분들께 스페인어라니. 그래도 까미노에선 무차츠 그라시아스가 공용어니까!


성당 뒤로 여명이 차오른다. 별의 들판과 레콘키스타를 장식한 그래피티, 키다리 아저씨와 목교를 걷는 맛에 취해 핸드폰을 흘렸다. 이탈리아에서 오신 세 분의 대천사.


  마침내 내게도 까미노 천사가 발현했다. 순례길 위에서 언젠가 한 번 만날 거라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조우하리라곤 전혀 생각지 않았다. 순례에 필요한 거의 모든 정보를 핸드폰에 담은 까닭에 출발 전 분실에 대비해 백업용 공기계를 가져갈까 고민했었다. 일 그램이라도 무게를 줄이기 위해 망설이다 결국에는 빼놓았다. 폰을 잃어버릴 경우 연락처와 메일, 사진과 금융거래용 앱 등 핸드폰에 저장된 인적 정보가 유출될 가능성은 분실의 대가라 어쩔 수 없다. 지금 당장이 문제다. 휴대폰이 없어진 순간부터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폰에 저장한 비행기와 열차 e-티켓은 그나마 양반이다. 비상용 인쇄물을 따로 마련해 두어 약간 번거로울 따름이다. 문제는 구글 드라이브에 업로드한 엑셀 파일이다. 여기에는 일자별로 정리된 세세한 스케줄과 경비 지출관리용 가계부, 까미노에 필요한 각종 정보들이 일목 요연하게 기재되어 있다. 폰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남은 삼십이일의 일정을 전부 기억해 내거나 다시 새로 짜야한다. 게다가 간편 결제가 불가능한 만큼 알베르게나 레스토랑과 바에서 현금으로 지불한다. 소지할 현금이 늘어나면 무척 번거롭다. 폰 하나가 사라지면 이렇게 식겁할 일들이 넘쳐난다. 상황이 이런 만큼 내게는 단순한 천사가 아니었다. 천사들을 이끄는 대천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곤혹의 수렁에 빠졌을 나를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세 명의 대천사들이 환한 미소로 나타나 건져주었다.      


  내가 겪은 바대로 봉변을 당하거나 진퇴양난에 처한 순례자들 주위로 천사들이 늘 나타난다. 생면부지 생명부지 이방인들에게 다가가 당연하다는 듯 도움을 주고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홀연히 떠나간다. 그들이 머물던 자리에 넘쳐나는 감동만이 천사가 다녀갔음을 증명해 준다. 순례자들을 낭패시킨 근심 걱정은 어느새 사라진다. 잔잔한 미소와 감격에 찬 행복은 까미노의 연꽃씨로 변해 도움이 필요할 누군가에게로 날아간다. 순례길이 열린 이래 이름 모를 나그네로부터 시작되었을 작은 선행의 릴레이가 어느덧 천사들의 합창이 되어 까미노 곳곳에 울려 퍼지고 있다. 나 역시 이 날 받았던 기쁨을 겪어 보고 싶어 할 이에게 이자를 후하게 쳐 아낌없이 기부하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까미노에 흔하디 흔한 천사들은 아쉽게도 정규직이 아니라 추측된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계약기간이 길지 않은 기간제 천사이다. 순례를 마치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면 계약은 종료된다. 자신의 원래 모습으로 빠르게 돌아간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십칠 일간 순례를 하는 도중에 이름 모를 천사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이 외에도 많은 이들로부터 상당한 배려와 양보를 경험했다. 도움을 받을 때마다 나 또한 까미노에서 낮은 곳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귀국한 지 몇 개월이 채 안돼 까미노 약발이 다했다. 천사의 본성이 어느 틈에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깜빡이를 켜지 않고 무리하게 끼어드는 얌체 운전자들이 얼마나 짜증스러운지! 정체 행렬이 길어질수록 짜증이 비례해 심해진다. 비상등을 깜빡여 미안함을 전하면 불쾌한 기분이 잦아들기라도 하지. 끼어들기야말로 떳떳한 내 권리라는 예의 없는 운전자 뒤통수에 나도 모르게 분노의 전조등을 날리거나 클랙슨을 울리는 경우가 왕왕 있다. 아마 순례 중 마음가짐이었다면 얼마나 급했길래 하며 사고 나지 않게 천천히 다니시라 염려해 줬을 것이다. 어쨌든 기간제 천사라도 좋다. 계약이 만료되면 기회를 봐서 까미노에 들러 재계약하면 그만이니까. 어찌 되었든 천사는 없는 것보단 나은 존재이니까. 천사들이 있음으로써 성선설에 힘이 실리고 인류 공영의 이상이 허무한 신기루가 아님을 믿을 수 있을 테니까. 


  까미노 천사를 인문학이 아닌 생물유전학적으로 해석하면 이기적 유전자의 이타적 행동이라 정의할 수 있다. 순례로 인해 ‘나’라는 개체가 특별히 더 착해지거나 선행을 베푸는 것이 아니다. 유전학의 자연선택 관점에서 헌신적 행동을 선택하는 주체는 나 자신이란 ‘개체’가 아니다. 바로 개체를 이루는 ‘유전자’이다. 유전자 중 일부는 선행을 하는 가운데 어쩔 수 없이 훼손되거나 희생당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유전자 전체로 보면 유전자가 진화적으로 번성하거나 자기 복제를 하는데 더 유리하기 때문에 선행을 하게끔 한다. ‘나’라는 개체(천사)의 이타적 행동은 기실 그 선행을 유도한 유전자가 이기적으로 작동한 결과이다. 여기서 이기적이란 뜻은 자기의 이익만을 꾀한다는 사전적인 의미가 아니다. 유전자가 다른 이의 자원을 이용해서 자기 복제를 늘리는 행위를 말한다. 결국 천사의 선행은 유전자의 자기 복제의 본능에 이득이 되도록 자신의 행위와 기질에 영향을 미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인류의 선행을 이기적 유전자의 본능이라 해석하는 게 너무 각박하다 여길지 모르겠다. 설령 이기적 유전자야말로 천사를 인도하는 절대자라는 과학적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손 치자. 어쨌거나 산티아고에 무사히 도달하기까지 자신에게 닥칠지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기꺼이 천사가 되는 걸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예기치 못한 어려운 지경에서 다른 천사의 도움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 테니. 


  이기적 유전자는 파레토 최적을 원할까? 경제학에서 파레토 최적이란 한정된 자원을 배분할 때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보지 않고서는 자신에게 더 이상의 이득이 생기지 않는 상태이다. 이를 유전자 단위에서 해석하자면 서로가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각자 최선의 이득, 즉 자기 복제를 한다는 뜻이겠다. 다른 유전자의 자원을 활용해 자기 복제를 꾀한다는 이기적 유전자의 속성상 유전자에게 파레토 최적은 존재할 수 없는 이상향일 것이다. 그렇다면 개체나 집단 단위로 기준을 바꾸면 어떨까? 이기적 유전자가 개체의 이타성을 용인하듯이 파레토 최적을 허용할까? 내 견해는 그렇다이다. 내게 남는 자원을 집단 내 다른 이에게 양보하여 내게 필요한 자원을 얻는 방식으로 집단과 사회의 파레토 개선을 지향할 수 있다면 그렇지 않은 다른 집단이나 사회과의 경쟁에서 생존 확률을 더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Depeche Mode의 ’Personal Jesus(368위)’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아내가 그를 회고한 책에서 영감을 얻어 지어졌다. 아내 프리실라는 ‘Elvis and Me’에서 엘비스가 어떻게 그녀를 만나 자신의 멘토가 되었는지를 소개했다. DM의 리더 마틴은 이 일화를 읽다가 사람의 마음과 신이 어떤 면에서 비슷한지, 도움이 필요할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예수 같은 존재를 떠올렸다고 한다. DM은 구원이 필요한 이들에게 자신만의 예수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노래했다. 만일 자신만의 예수를 가진 탓에 저마다 각기 다른 예수의 말씀을 행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해 본다. 상기한 파레토 최적이 깨지거나 다른 최적상태로 변하는 과정에서 파생될 혼란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다.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라 주장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다. 만일 성경을 다르게 해석하거나 의도적으로 왜곡시켜 설파한다면 어떻게 될까?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밀어라는 구절이 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적의를 표한 이에게 왼뺨을 내밀 정도로 한결같은 호의와 사랑을 표하라는 뜻이겠다. 그러나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고대 중동과 유대 문화를 연구한 성경학자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오른손을 신성시하여 남을 때리는 미천한 일은 왼손에 맡겼다. 뺨을 맞는 모욕을 갚으려면 왼뺨을 내밂으로써 상대방이 오른손을 쓰도록 유도를 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상대방이 스스로 부정하고 천한 존재임을 드러나게 하라는 말씀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예수님의 진정한 속뜻은 어디에 있었을까? 예루살렘에 들어간 예수님이 성전이 다 허물어지리라고 하신 속내는 과연 무엇일까? 


Depeche Mode - Personal Jesus(1989년, 368위)


  비야 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 마을을 지나 오카산에 올랐다. 정상을 향한 폭이 좁은 비포장 흙길 양 옆으로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져 걷기 수월했다. 완만한 정상을 통과하자 구름을 벗어난 태양이 강렬한 볕을 쏴 되는데 잘 다져진 널찍한 신작로에 그늘 한 점 없다. 하는 수 없이 화살비처럼 내려쬐는 햇살을 온몸을 방패 삼아 받아내며 터덜터덜 걸어갔다. 오카 산을 거의 다 내려왔을 무렵 길 오른편에 돌과 시멘트로 조형된 기념비가 이채롭다. 혹시나 싶어 철렁한 마음이었는데 역시나 프랑코 정권에 살해된 희생자 기념비(Monte de la Pedraja 1936)였다. 이 기념비 바로 옆에는 순례 도중 명운을 다한 이를 기리기 위해 조성된 돌무덤이 애처롭게 자리 잡고 있다. 


너른 벌판과 무너진 창고를 지나 오카산 흙길을 올라 정상을 내려오면 몬테 데 라 페드라하 희생자 묘지와 기념탑을 만난다. 그 옆에 자리잡은 순례자 무덤이 애처롭다.


  제2 공화국을 전복시키기 위해 프랑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던 1936년, 그를 지지하는 반정부군이 공화국을 수호하려던 삼백 명을 이곳 몬테 데 라 페드라하에서 총살했다. 프랑코는 보수 가톨릭 신자였다. 총통의 주요 지지세력 중에 당시 극우 성향에 가까웠던 스페인 가톨릭 교회가 있었다. 프랑코 정권은 여호와를 따르지 않는 이교도들에 한 줌의 자비도 베풀지 않고 섬멸하라는 구약의 야훼가 내린 추상같은 명령에 충실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불같은 엄명을 따랐던 것이다. 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신약의 하느님을 어째서 외면했던 걸까? '피조물인 인간들은 너희끼리 이웃과 적을 가리지 말고 서로 사랑하라. 심판의 날에 하느님께서 무도한 그들을 반드시 심판하리니.' 아마도 예수님의 본뜻은 이게 아닐는지? 이십여만 명의 목숨을 빼앗은 프랑코 독재정권이 과연 하느님의 심판을 받았을지 사뭇 궁금하다.

 

  어떠한 전쟁이라도 전쟁 그 자체는 반인권적이다. 권력을 찬탈하려는 내전이나 명분 없이 상대국을 침략하는 행위는 말할 나위 없다. 식민지배를 반대하는 독립전쟁이나 독재에 항거하기 위해 일으킨 자유혁명 내전이라 해도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민간인의 애꿎은 희생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의 진보와 부당한 박해에 저항하는 전쟁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반전과 휴머니즘을 노래하는 건 전쟁의 잔옥함 때문일 것이다. 그중의 한 곡이 Beatles가 부른 ‘All you need is love(362위)’이다. 1967년 영국의 BBC가 세계 최초로 전 세계 여섯 대륙을 위성으로 연결하는 ‘Our world’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그리고는 프로그램 취지에 맞는 노래를 영국 대표였던 비틀스에 의뢰해 존 레넌이 작곡했다. 이 노래의 곡명은 사실 당시 반전 운동에서 사용했던 구호 중 하나로 알려진다. 존은 스스로를 혁명을 꿈꾸는 예술가라 평할 정도로 부조리를 혁파하는 변화와 진보를 그리는 곡을 만들려 했다. 우리에게는 곡이 태동된 배경과 분위기가 전혀 다른 여운 가득한 로맨스 영화 ‘Love actually(2013년)’의 OST로 더 잘 알려져 있다. 


The Beatles - All You Need Is Love(1967년, 362위)


  몬테 데 라 페드라하 기념비를 지나면서 다시금 518 광주의 기억이 떠올라 숙연해졌다. 독재에 저항했던 모든 분들의 숭고한 의지에 고개 숙여 인사드린 후 발길을 돌렸다. 비록 기념비를 만나 무거운 마음이 아헤스까지 한동안 이어졌지만 오랜만에 한적히 걸을 수 있었던 비야 프랑카부터 산 후안 오르테가까지의 십이 킬로미터 산속 숲길은 내게 큰 위안을 가져다주었다. 거센 풍랑이 가라앉아 평온한 바다를 되찾아왔다. 아헤스까지의 사 킬로미터 남짓한 숲길도 나쁘지 않다. 흠이 있다면 오후 들어 걷기에 좀 더웠다는 것 하나.


화살처럼 쏟아지는 햇살을 피해 잠시 쉬다 걸었더니 멋진 휴식터가 나타난다. 오르테가 마을 공터에서 이탈리아 할머니와 사총사를 만났다. 저 멀리 아헤스 마을이 보인다.


  삼일 전에 출발했던 나헤라부터 고도가 점차 높아져 오늘 숙소인 아타푸에르카는 해발 구백 미터 중반에 달한다. 내일 아타푸에르카 산맥을 넘어 부르고스에 도착하면 레온까지 이백팔십 킬로미터 가량의 광활한 메세타 고원을 관통해야 한다. 길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지루하다는 중론이다. 하지만 이십여 년 전 처음 이 길을 알게 된 순간부터 해발 팔구백 미터 고원에 펼쳐진 장대한 평야를 동경해 왔다. 메마른 대지 위에 밀밭이 끝없이 펼쳐지고 저 멀리 오른편 지평선 너머엔 행진하는 군대처럼 산맥이 끝없이 이어지는 곳. 이제 내가 곧 그 길에 서게 된다. 그래서 기대가 무척 크다. 


  아타푸에르카에는 유럽을 대표하는 구석기 유적지가 있다. 대체로 구석기인 이미지는 미개하거나 유인원에서 갓 진화한 원시인에 가깝다. 또한 그들이 불안정한 수렵 채집으로 굶주리기 십상이거나 맹수에게 희생당하는 나약한 존재로 그려진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2011년)'에서 일반의 상식을 통쾌히 뒤엎었다. 인류 역사의 구십구 퍼센트 이상을 차지한 구석기 수렵채집인들의 삶은 일반의 예상과 달리 상당히 안락했을 것이라 설파한다. 저자는 이 시기를 ‘최초의 풍요로운 사회’로 정의했다. 당시 지구상의 현생 인류를 다 합쳐도 칠팔백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인구는 극히 적고 주위에 먹거리가 넘쳐났다. 건강에 유익한 음식을 다양하게 섭취하고 주당 노동 시간도 상대적으로 짧으며 낮은 인구밀도에 가축을 키우지 않아 전염병이 드물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건강을 염려해 탄수화물을 지양하고 값 비싼 유기농 식단을 찾는다. 여가를 즐기며 삶의 질을 찾기 위해 일하는 시간을 지속적으로 줄여나간다. 아이러니하게도 구석기시대가 현대인들이 바라는 풍요로운 선진사회의 모습이지 않는가? 구석기인들은 현대인보다 더 큰 두뇌 용적을 가져 역사 시대의 인류보다 생존을 위한 지식이 훨씬 많았다. 건장한 체격에 영아기만 잘 넘기면 육십 세 이상 살 가능성이 높았고 일부는 팔십 세를 넘긴 걸로 알려진다. 변변한 의학이랄 게 없었던 선사시대였다는 걸 고려하면 믿기 힘들 정도로 놀랍다. 다만 풍요로왔으나 고난과 결핍에서 완전히 해방된 사회가 아니었던 점은 결코 잊어선 안된다.  


  농업혁명으로 인류가 얻은 식량의 총량은 분명 구석기시대보다 확대되었다. 그런데 급격히 늘어난 인구와 잉여생산물을 향유하는 엘리트가 탄생한 결과 20세기 이전까지 평균적인 농부들은 평균적인 수렵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으되 그 대가는 더 열악한 식사였다. 사피엔스는 자신의 조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힘들고 불만스러웠을 삶을 농업혁명이 일어난 이후로 일만 이천 년 가까이 살아온 셈이다. 유발 하라리는 씨를 뿌려 작물을 기르고 가축을 키우는 농업혁명을 ‘역사상 최대의 사기’라 혹평했다. 발상을 전환하면 인류가 밀이나 쌀을 키운 게 아니다. 밀과 쌀이 인간을 이용한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밀은 이기적 유전자의 본능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진화적 관점에서 현생인류가 나타나기 전에 한낱 잡초에 불과했을 밀은 오늘날 유전자를 가장 많이 복제한 성공적인 식물이 되었다. 밀의 이기적 본능이 대성공을 이루기까지 밀을 위해 밭을 고르고 잡초를 제거하며 물을 대주고 해충을 막고 영양분을 제공해야 하는 일련의 고단한 노동은 오로지 인간이 담당해야 했다.      


  AI가 본격적으로 꽃 피우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인류가 가용할 자원 총량은 구석기 수렵채집 시대에  비할 바가 아니다. 늘어난 양만큼 비약적인 파레토 개선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당시 수렵채집인들은 무리를 이끄는 리더는 있어도 특권을 가진 엘리트를 허용하지 않았다. 수확한 자원을 집단이 정한 방법으로 공유하고 나눠 갖는 나름의 파레토 최적을 유지했을 공산이 크다. 현대 사회는 과연 파레토 최적 상태에 진입했을까? 이천억 달러, 원화 이백팔조 원에 가까운 부를 축적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일 달러도 안 되는 일당을 벌기 위해 열 시간 이상을 노동하거나 기아로 생명을 위협받는 일억 이천만 명에 달하는 절대 빈곤층이 여전히 존재한다. 백번 양보해 빈부 양극화, 부의 불균형이 고착화된 현 상태가 파레토 최적이라 하자. 파레토 최적이 공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본주의는 정당하게 부를 축적하는 행위를 미덕으로 삼는다. 이미 축적된 부 중 일부를 세금으로 거둬 빈곤층에 나눠 주자고 하면 세금을 내야 할 납세자들의 효용을 감소시킬 것이니 사회의 미덕과 파레토 최적에 위배된다고 반대하는 이들이 상당수 있다. 이제 부의 양극화가 더욱 진전되어 부에 대한 한계효용이 제로에 가까워진 부자들이 있다고 가정하자. 상상을 초월한 부를 거머쥔 이들은 자원을 더 갖는다 한들 효용이 더 늘어나지 않는다. 이런 환경에서는 향후 증가될 사피엔스의 자원을 한계효용이 증가하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배분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개선된 파레토 최적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AI와 로봇이 가져다 줄 생산성의 혁신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야말로 사피엔스를 유토피아로 인도하는 노란 벽돌길일 것이다. All you need is love를 아타푸에르카에 도착해 다시 들었다. 내게는 파레토 최적을 향해 갈 사피엔스가 외쳐야 할 구호로 들렸다.  


  숙소 근처에서 예비역 김 선배를 다시 만났다. 나헤라 이후부터 부르고스 전까지 평이 좋은 알베르게들이 이미 풀부킹 되어 그래도 구글 평점이 괜찮은 라 플라수엘라 베르데에서 같이 머물기로 했다. 우리는 부르고스에서 연박을 하고 김 선배는 형수님과 예정한 유럽 여행 일정상 쉬지 않고 산티아고로 갈 예정이다. 내일 이후론 까미노에서 만날 수 없다. 아쉽지만 헤어짐이 일상인 게 또 까미노 인연이다. 순례 중에 카톡으로 자주 연락하자고 했다.   


이곳이 구석기 유적지임을 알려주는 마을의 오브제, 먼저 도착한 투숙객들이 여유로이 정비를 한다. 언제나 반갑게 나타나 나를 위로해주는 산티아고 길냥이들.  


  오늘도 장광설을 주절주절 하다 보니 소개하고 싶었던 명곡들을 다 실을 수가 없었다. 부르고스와 레온에서 하루씩 연박을 할 예정이다. 누락된 곡들 중 꼭 들려주고 싶은 곡들은 연박 일정에서 소개하려 한다. 

이전 11화 [10일 차] No Slow, Only Regret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