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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차] No Slow, Only Regret

Goodbye Yellow Brick Road - 용기 없는 사자와 교주

by 여운설

2023년 5월 20일 산토 도밍고 델 카사다 - 벨로라도22.0km


어제 행한 선택으로 쌓인 한 줌의 미련이 태산처럼 무겁게 나를 짓누른다. 풀린 실타래처럼 아쉬움이 길바닥에 질질 끌린다. 까미노에 잔뜩 깔린 미련을 즈려 밟으려니 두 발이 후회로 흠뻑 물든다.


프랑스 루트에는 누구나 떠올릴 뷰 포인트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개중에 발군은 어제 지나친 시루에냐Cirueña 구릉지대에 펼쳐진 밀밭 평원이다. 울림이 가득한 이 곳 풍광을 이따금 순례 기행 서적의 앞표지로 장식한다. 시루에냐 초원에 한 눈에 반한 이들은 인생뷰를 SNS에 훈장삼아 내건다. 까미노에 오기 전, 아름다운 평야가 어디에 있는지 일부러 찾지 않았다. 미리 알면 정작 이 길을 마주칠 때 몰아칠 감동이 덧없이 흩어질까 걱정되서다. 처음엔 초록 바다에 알록달록 황금물결이 바람에 넘실거리는 에스테야나 로스 아르코스 어디쯤이겠지 지레 짐작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예상이 어긋나자 어릴 적 소풍 가기 전날 밤의 가벼운 흥분이 가시질 않는다. 밤마다 내일은 만날 거란 희망을 안고 잠들었다. 어제 저 멀리 지평선까지 이어진 완만한 오르막 초지대에서 뜬금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왠지 저길 것 같았다. 분명 사진에서 본 풍경이 아닌데도 말이다. 지루하던 오르막이 어느덧 수십 미터 앞으로 다가왔다. 언덕배기에서 네댓 명 순례자들이 서성이는 폼이 심상치 않다. 저긴가 싶었다.


정말 그랬다. 드디어 그토록 눈에 밟히던, 이 길을 걷도록 유혹한 절경, 시루에냐 밀밭이 경이로운 자태를 다소곳이 드러냈다. 구도가 근사한 지점은 이미 선점되었다. 대여섯 명이 연신 셔터를 누르기 바빴다. 언덕 중간 아래도 사람들이 포즈를 취하느라 부산스럽다. 조금 기다려 주위가 한산해진 후 찍을까 망설이다가 적당한 앵글과 타협했다. 쫓기는 사람 마냥 사진 몇 장 남기고선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중에 아쉬워할 걸 뻔히 알면서 더 있어봤자 미련만 남는다는 듯 서둘러 내려갔다. 37일로 예정한 순례일정에서 단 5분, 10분 더 내기를 아까워했다. 이 순간이 지나면, 여기를 떠나면 다신 되돌아울 수 없는 시공간인데 매정하게 지나쳤다. 이내 후회막급이었다. 지나간 절경을 뒤늦게 아쉬워하는 심정은 애별리고愛別離苦의 아픔에 견줄만했다. 기다리면 충분히 얻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무심하여 구하지 못했으니 겪지 않아도 될 구부득고求不得苦의 고통을 덤으로 얻었다.

시루에냐 밀밭 길 비교사진 : 왼쪽은 나, 가운데, 오른쪽(스티브앤지니/도화, 인터넷에서 따옴). 슈팅 포인트나 프레임 선택에서 차이가 많이 난다.

뭐 그리 급했을까? 자연이 선심 쓴 장려한 풍경을 차분히 심호흡하여 음미하면 주체하기 힘든 감격과 환희, 만족감 등의 따스한 감정들이 머릿속 해마에 깊숙이 각인된다. 그러나 황홀경에 넋이 나갈 경관이라도 종국엔 희미해질 아름다움이다. 아무리 뇌리에 새기고 가슴에 묻어둔다 한들 무정한 시간 앞에서 빛 바래지는 노스탤지어에 불과하다. 습관적으로 눌러 댄 손가락이 윤색되는 기억을 애써 붙들어 매는데 그친다면 이리 안타까울 까닭이 없다. 사진의 효능은 훗날 현상된 아름다움을 다시 마주하게 해주는 것 그 이상이다. 사진은 보석상자를 여는 황금열쇠다. 꽁꽁 닫힌 해마의 자물쇠를 떨리는 손으로 열어젖히면 그 속에 곱게 잠든 당시의 추억과 정서들이 고스란히 소환된다. 우리가 기를 쓰고 사진을 남기는 까닭이다.


여행이 관광과 다른 점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걸 최우선으로 하지 않는 것이다. 관광은 가고 싶은 장소에서 보거나 경험하는 기행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다. 관광지로 가는 여정은 가능한 한 빨리, 편안하게 도착하면 그만이다. 이동 중 얻는 감흥이 그다지 중요치 않다. 통제 못하는 돌발 변수는 대체로 당황스럽거나 진을 뺄 귀찮은 일이다. 여행은 이와 다르다. 목적지에서의 체험 못지않게 거기까지의 여정도 중요하다. 예상치 못한 일촉즉발의 상황을 기발한 아이디어와 번뜩이는 재치로 해결하는 묘미야말로 여행의 감초이자 보너스다. 산티아고 순례는 한 달 넘게 걷는 여정이다. 도보 여행이라 주위 공간은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주마간산하면 세심한 변화를 제대로 알 수 없다. 보고자 마음먹어야만 시선이 머무는 대상을 정밀히 관찰할 여유가 생긴다. 이를 수용할지 말지는 순례자의 몫이다. 까미노를 ‘No pain, no glory’의 길이라 한다. 고통스러운 만큼 영광스럽다는 의미다. 시루에냐 밀밭 길을 서둘러 지나치고 나서야 야고보를 만나러 가는 순례길이 ‘No slow, only regretful’이란 걸 이해했다. 천천히 가야만 후회가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벽녘에 대학 동기가 꿈에 나왔다. 간혹 출석 미달로 학부를 졸업하지 못하거나 동기를 만나는 꿈을 꾸곤 한다. 무언가 뜻대로 되지 않아 스트레스가 심하거나 피로가 극심할 때 주로 꾸는데 그러고나면 희한하게 재충전이 된다. 컨디션이 그리 나쁘지 않은 걸로 봐서는 아마도 시루에냐 밀밭이 던진 회한 때문이리 짐작된다.


인생 길은 일직선이다가도 굽어질 때가 있다. 몰아치던 비바람이 잠시 멈춰 주위를 둘러 보면 모두 사라져 홀로 외로이 길을 걸어야 한다. 카페가 오아시스처럼 순례자를 재충전해준다.


대학 1학년 말에 서서히 암흑이 드리웠다. 졸업하면 소외된 민중과 더불어 전위적 삶을 살리라 다짐했던 젊은 결기가 점차 부담스러워졌다. 그 길에 올라서는 게 두렵고 평생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남들처럼 편안하고 안락한 길을 걷고 싶은 숨겨진 욕망을 비우지도 못했다. 동기 하나가 염세에 현혹된 내게 어둠을 밝히는 햇살로 다가왔다. 친구는 자기부정은 자기 애愛의 다른 얼굴일 뿐이라며 나를 위로했다. 남보다 나르시스 성향이 조금 강한 것에 불과하다고 다독였다. 어느 날 친구가 내 가슴 한 편에 자리 잡았음을 인지했다. 흠칫 놀랐다. 천진난만하고 세상을 예쁘게만 보던 친구와 다른 삶을 지향하는 만큼 서로 어울릴 사이가 아니라 단정했다. 봉오리가 이제 막 트려는 연정을 부인하며 내 속에서 밀어내려 애썼다. 서너 달 동안 만날 만한 곳은 일부러 피해 다녔다. 멀찍이 보이기라도 하면 에둘러 길을 돌아갔다. 어쩔 수 없이 자리를 같이 해야 하는 날에는 가장 반대편 끝에 앉아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라도 갓 집힌 화톳불을 끄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거세진 불길이 급기야 내 단심㫁心을 삼켜 버렸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여름 어느 날 친구에게 고백했다. 만날 때부터 안색이 다소 어두웠던 친구는 머뭇거리다 너무 늦었다는 말로 완곡히 거절했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무저갱의 시커먼 입속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란 게 이런 건가 했다. ‘그랬구나. 내가 너무 늦었구나. 일찍 일어나 용기없는 사자로 전락하더니 이젠 너무 늦어 버렸구나’ 잠시 말을 잃었다. 설득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모임이 있는 주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 앞에 마주 앉은 친구와 말없이 잔을 부딪혀 한두 잔 들이켠 연후에 먼저 일어났다. 더 있고 싶었지만 야학에 가야 했다. 다음날 자리를 같이 했던 선배가 내가 자리를 뜬 얼마 후에 친구가 갑자기 울었다며 무슨 일이냐 물었다. 며칠 뒤 모임에서 마주친 친구를 배웅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대화를 잇기 어려웠다. 어색한 침묵이 우리를 서글프게 감싸 안았다. 환승을 위해 버스에서 내려 잠시 걷는데 친구가 말없이 팔짱을 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서로 좋아하는 감정을 가졌으면서도 손 한번 잡지 않았는데. 너무 놀라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예전으로 되돌아가지 못할 사이가 되었지만 따스한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잔잔하게 올라왔다. 단 몇 분만이라도 시간이 정지하길 바라며 찰나의 행복을 만끽했다. 아쉽게도 환승버스는 이런 내 마음을 몰라 주었다. 평소와 달리 그날따라 일찍 도착했다. 잘 지내라는 작별 인사를 했다. 또 보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친구 보기가 힘들어 급작스레 휴학을 결정했다. 일년 이상 학교와 담을 쌓을 계획이었다. 그게 서로에게 좋을 거라 여겼다. 당연히 수강신청을 하지 않았다. 개강 후 휴학계를 내러 갔다. 교무처에서 휴학신청을 불허했다. 장학금을 받아 이미 자동 등록이 된 터였다. 수강신청 기간은 이미 지났을뿐더러 학업에 미련이 일도 없었다. 마음 둘 곳 없으니 몸만 훌쩍 사라지면 될 일이다. 평점 All A가 All F로 전락하는 걸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아니, 수강신청을 하지 않아 성적 자체가 나올 리 없었다. 그저 20학점이 완벽한 공空으로 승화했다. 하지만 감정의 색色은 끝끝내 공이 되질 못했다. 소설가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1975년)'를 탐닉했다. 자칭 교주가 되어 소설 속 공간 '유리'의 초입을 찾아 헤맸다. 그로부터 일 년 반을 룸펜이 되어 허송세월하는 교주에게 고맙게도 야학에서 같이 활동하던 두 친구가 신도 되기를 자청했다. 우리는 도로시 일행처럼 뭔가 하나씩 결핍된 처지였다. 부족원이 없는 추장과 사리가 멀쩡한 푼수만이 교리 잃은 교주 옆을 묵묵히 지켜주었다.


우리는 사랑을 하지 않았다. 단지 서로를 향한 호감이 부끄러워 이를 드러내기 주저한 사이였다. 연심을 옅게 내비치는 몇 페이지 분량의 편지를 왕래하며 가끔 짬이 맞는 날에 지인들 몰래 학교 근처 찻집 구석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하거나 야학 수업이 없는 날 집 근처까지 배웅하는 게 전부였다. 요즘으로 치면 약간 썸 타는 정도이겠다. 그럼에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실감에 하릴없이 허우적거렸다. 87년 겨울 전에 우리는 아무 사이가 아니었다.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민중후보 백기완 선생의 선거 자금을 모으기 위해 마련된 가게로 친구가 놀러 오기전까지는. 여러 동기 중 한 명일뿐 티끌만한 감정 하나 없었다. 도리어 친구의 첫인상이 썩 좋지 않았다. 격동하는 87년에 어울리지 않을 그녀의 순진무구함을 가혹하게 비난했었다. 이제 원래대로 돌아온 셈인데 부정적인 첫인상까진 아닐 망정 최소한 공으로 돌아와야 하거늘 그러질 못한 채 왜 그리 아파한 걸까? 온몸을 파고들어 헤집는 애별리고의 채찍을 고스란히 감당했다. 견디기 무척 버거웠다. 별리의 괴로움이 그토록 심했던 것은 혹여 친구에게 상처를 준게 있다면 그녀가 감당할 아픔마저 나 자신의 카르마로 쌓아 대신 짊어졌기 때문일 게다.


지친 방랑객은 마음의 안식처에서 잠깐의 위안을 얻지만 이내 순례자들과 떨어져 외로이 길을 걷다 화살표를 잃어 헤매기도 한다. 마음의 짐이 쌓일수록 살아가는 고통 역시 배가된다.


오늘따라 애별리고의 상처를 노래한 곡들이 연이어 나온다. 미국판 '잘못된 만남(김건모, 1995년)'이 있다. The Allman Brothers Band가 부른 ‘Whipping post(383위)’란 곡이다. 헤어진 연인이 자신의 절친과 사귀는 장면을 목격하는 심정은 기둥에 꼼짝없이 묶여 채찍질 당하는 아픔조차 비할 수 없다. 실연 이상의 충격에 절규하는 주인공의 고통스러운 심정이 보컬과 기타 연주에 절절히 녹아있다. 정규 앨범은 5분짜리 곡이지만 23분가량의 라이브 버전이 더 유명하다. 라이브 버전의 기타 애드리브를 유튜브에서 꼭 일청하기를 추천한다. 사랑의 달콤함이 다하자 찾아온 이별의 쓰디쓴 맛은 감진고래甘盡苦來다. 달달하되 고약하게 쓴 인생 교향곡의 한 악장이라 비유할 만하다. 영국의 얼터너티브 록밴드 The Verve는 ‘Bitter sweet symphony (382위)’에서 나락에 빠진 이들의 고통을 생생히 그렸다. 화자는 변화를 꾀하려 하나 딛고 일어서지 못하는 자신을 답답해한다. 21살 때 내가 그랬다. 심연의 나락에 빠져 매일 수백 번씩 또 다른 나를 꿈꾸었으되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조금도 변치 않은 내 자신에게 구렁텅이가 지옥으로 화하는 절망을 느끼던 시절이었다. Sam Cooke의 ‘Wonderful world(373위)’는 마지막 구절에서 나를 사로잡았다. 비록 자신이 우등생이 아니어도 A학점을 받으면 당신의 사랑을 얻을 거라는 희망을 노래했다.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게 없던 나였다. 과수석을 하면 적어도 고백할 자격을 갖출 거라 자위했다. 사랑을 성적으로 확인하겠다는 말도 안되는 소아병적 사고였다. 기말고사 기간동안 친구 하숙집에서 밤새우다시피 했다. 그런데 경제학 원론 채점이 잘못되어 차석이었다. 발을 동동거렸으나 해외에 나간 교수님과 연락이 닿지 않아 정정하지 못했다. 만일 점수가 수정되어 수석 했다면 친구의 거절을 무릅쓰고 끝내 설득하려 했을까? 사랑이 뭔지 모르는 나르시시스트가 내지른 유치한 불통에 다름 아니었다.


The Allman Brothers Band - Whipping Post(1969년, 383위)

지금도 사랑이 뭐라 정의하기 어렵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사랑은 무엇을 하는 행위의 결과가 아닌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형성의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누구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누구와 함께 서로 무엇을 이루는 것이다. 그 시절의 나는 서로 호감을 가진 것만으로 그녀의 사랑을 구하거나 내 사랑을 하려고만 했다. 친구와 함께 호의의 교각을 하나둘씩 다져 올려서 추억의 오작교를 이으려 하지 않았다.


용기 없는 사자로 지낸 젊은 시절을 떠올리던 차에 Elton John의 'Goodbye yellow brick road(380위)'를 들었다. 노란 벽돌길은 상상의 나래를 펴는 길이자 삶의 해답을 얻는 길이다. 23세 때 이 곡을 작사한 버니 토핀은 약관을 갓 넘겨 유명해졌다. 젊은 나이에 이름을 얻자 자신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리라 다짐한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 희망을 담아 오즈의 마법사가 사는 에메랄드 시티로 가는 노란 벽돌길을 그렸다. 도로시는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난관과 장애물, 위기를 만나지만 똑똑해지고 싶은 허수아비, 심장이 필요한 양철나무꾼, 겁쟁이 사자와 함께 이를 헤쳐 나간다. 친구는 '너무 슬퍼하지 마.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며 나를 격려했다. 도로시는 겁 많은 사자에게 용기가 없는 게 아니라 그렇게 여길 뿐이라며 필요한 건 자신감이라고 북돋아줬다.


어쩌면 나는 용기 없는 사자가 아니라 나를 비울 자신감이 없는 교주였는지 모른다. 삶의 진정한 용기란 두렵고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위험에 굴하지 않고 맞서려는 의지다. 평생을 관철할 의지가 아니다. 지금, 당장, 내 앞을 가로막은 험준한 산에 오르려 내딛는 단 한 걸음이면 족하다. 반대편 발을 또다시 내딛을 단호한 결의는 앞선 걸음을 뗀 후에 고민할 일이다. 길 끝에 있을 행복을 바라서는 안된다. 그런 행복을 기대하는 건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하는 아편에 불과하다. 매 순간마다 단 한 번의 의지만 있으면 된다. 일평생 전위로 지낼 불굴의 용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내가 바라던 현장에 기꺼이 들어가려는 한 발자국의 소박한 진심이 필요했다. 있지도 않을 허상의 용기를 찾는 구부득고의 괴로움에 몸부림 치다가 끝내 나를 비우지 못했다. 부족한 나를 책망하는 것으로 면하는 바, 스스로 헛되이 소진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했다. 그 시절 내가 찾아 헤맸을 노란 벽돌길이 산티아고를 향해 도로나 담벼락 위에 무수히 그려진 노란색 화살을 연상시킨다. 노란 화살표는 순례자들이 미망에서 헤매지 않도록 친절히 인도한다. 까미노에서 듣는 이 곡이 정겹다.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돌아온 도로시는 집에 제일 좋다고 했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가라면 나도 과연 반색할까? 21세로 회귀하면 어떤 선택을 할까 쓸데없는 공상을 하는 와중에 벨로라도를 5km 앞둔 비야마요르 델 리오Villamayor del Rio 마을에 도착했다. 여기서 허기를 달래기로 했다. 마을 초입에서 200m 더 들어갔다. 널찍한 마당 끝에 레스토랑 카살바Calsaba가 보인다. 그리 내키지 않지만 웬일로 누나가 앞장서길래 그냥 따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배낭을 현관 밖 계단 옆에 두라 한다. 정중히 부탁해도 한사코 불허한다. 기분이 상하기 시작했다. 누나는 모처럼 순례객과 어울리지 않는 엔틱한 분위기를 호사하려는 눈치다. 식전 빵을 고르라 길래 바게트를 선택하고 음료는 레스토랑에서 제공하는 물이면 족하다 일렀다.


순례객 한 명이 들어왔다. 길에서 자주 마주친 젊은 한국 여성이다. 무척 힘들었는지 들어서기 무섭게 스탠드 바에 주저앉았다. 배낭을 옆 의자에 걸쳐 놔도 웨이터가 뭐라 하지 않는다. ‘뭐지 이건?’ 원칙 없는 차별이 부조리하여 점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식전 빵치곤 양이 많았고 1.5리터 생수병이 통으로 서빙되었다. 아차 싶었다. 나중에 빵과 생수값으로 9유로를 치렀다. 얼마 안되는 돈이지만 이미 잡친 기분이 기승전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모처럼 근사하게 기대한 점심은 모칠라로 착각해 잘못시킨 초리소를 소태처럼 씹어대는 ‘결’로 마무리되었다. 먹거리가 마땅찮을 때 흔히 살기 위해 먹는다고 한다. 까미노에서는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걷기 위해 먹는다는 표현이 적확하다. 오늘은 정말 걷기 위한 일념으로 우걱우걱 거렸다. 체하지 않은 걸 헛헛하게 위안 삼았다.


손님에 따라 배낭이 허락되는 부조리에서 초등학교 6학년에 겪은 일이 떠올랐다. 당시엔 학급별로 돌아가며 교무실 복도를 닦아야 했다. 우리 반 차례였던 어느 날, 급우들이 오와 열을 맞춰 왁스칠과 돌가루로 나무바닥에 광내던 중이었다. 선생님 한 분이 보란듯이 구둣발로 교무실에 들어가셨다. 어처구니가 없는, 부당한 처사에 나도 모르게 욱했다. 마침 지나간 선생님은 전교 어린이 학생회를 주관하신 분이셨다. 다음에 열린 학생회에서 건의사항을 얘기했다. 선생님들도 실내화로 갈아 신어 달라는 부탁이다. 어린 학생들이 청소하는 걸 괘념치 않은 부조리를 지적했다. 선생님 답변은 간단했다.


“선생님은 그래도 돼. 너흰 신경 쓰지 말고 다시 걸레질하면 된다”


애정 없는 매질만 폭력이 아니다. 공감능력이 없는 한마디가 비수처럼 13살 소년 가슴을 난도질했다. 이 어찌 가혹한 행위가 아니랴! 그때는 불통이 당연시되던 시대였다. 부조리가 판 치는 시절이었다.


서이초 여교사가 학부모의 무분별하고 도에 지나친 갑질로 세상을 등진 지 일 년이 넘었다. 순례를 마치고 귀국한 직후에 벌어진 애사라 더 충격이었다. 전근대적인 교육관으로 무장했던 교사들이 횡횡했기에 반대급부로 학생인권조례가 마땅히 필요했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게 과유불급의 독이 되어 존중받아야 할 교권이 너무나 초라하게 말라비틀어졌다. 왕의 DNA를 가진 아이니 왕세자 대하듯 늘 칭찬만 하고 안 돼라는 말은 입에도 담지 말라는 교육부 사무관의 갑질에 이르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진심을 다한 훈계가 언어폭력으로 왜곡되거나 고소거리로 전락해 학급을 떠나야 한다. 학교 폭력을 저지른 가해자가 법의 권위와 조력을 받아 쌍방 학폭으로 둔갑시켜 피해자를 학교 밖으로 내모는 세상이다. 학부모들은 자기 아이에 피해가 갈까봐 낯부끄럼 없이 도덕적이지 못한 일들을 서슴지 않는다. 부조리가 적자생존의 상식으로 자리 잡은 오늘이다.


Pink Floyd의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2(375위)’는 1950년대 영국 교육 현장의 부조리를 풍자했다. 학생들은 아이들의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걸 목표로 삼지 않는, 강압적이고 일방적으로 통제하는 교육 방식에 거세게 반발했다. 교사들에게 학생이란 순종해야 할, 그들이 원하는 모양으로 조각되어야 할 나무토막에 불과했다. 우리도 그런 때가 있었다. 곡 중에 흘러나오는 아이들의 감미로운 코러스가 김태원이 이끌던 부활의 ‘회상 2(1987년)’에서 그러했듯 천사들의 음성으로 내려온다. 21세기 한국에서 이기적인 부모들은 교권을 무자비하게 억누르는 벽이 되었다. 무례한 학생들은 그 벽을 쌓은 벽돌이 돼버렸다. 이를 해체할 방안이 쉬이 떠오르지 않아 몹시 씁쓸하다.


Pink Floyd -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2(1979년, 375위)


버려진 하찮은 신발이라도 아름다운 꽃을 꽂아주면 희망의 햇살이 다시 찾아올 것이다. 입장이 불허된 배낭 덕분에 걸을 일념으로 헛헛한 식사를 했다. 지친 순례객에겐 숙소가 제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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