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선택으로 쌓인 한 줌의 미련이 어느새 태산이 되어 나를 짓누른다. 아쉬움이 풀린 실타래처럼 길바닥에 질질 끌렸다. 까미노에 잔뜩 깔린 미련을 즈려 밟으려니 두 발이 후회로 흠뻑 젖었다.
프랑스 루트에는 누구나 떠올릴만한 뷰 포인트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곳 중 하나가 어제 지나온 시루에냐 구릉지대의 밀밭 평원을 세로 지르는 길이다. 아나운서 손미나 씨의 저서 ‘괜찮아, 그 길 끝에 행복이 기다릴 거야(2023년)’ 앞표지를 장식할 정도로 한 눈에 반할 만하다. 울림 가득한 경치를 인생뷰 삼아 다녀온 누구나 자신의 SNS에 훈장처럼 걸어 놓는다. 까미노를 걷기 전까지 이토록 아름다운 밀밭의 평야가 어딘지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다. 어딘지 미리 알게 되면 막상 이 길을 맞이하는 순간에 몰아칠 감동이 덧없이 흐트러져 사라질까 걱정되서였다. 처음엔 초록 바다에 알록달록한 황금물결이 바람에 넘실거리던 에스테야와 로스 아르코스 근처겠거니 지레 짐작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한번 예상이 어긋나자 어릴 적 소풍 가기 전날에 일던 가벼운 흥분이 가라앉질 않는다. 매일같이 내일은 만날 거란 희망을 한가득 안고 걸었다. 그러다가 어제 저 멀리 지평선까지 이어진 완만한 오르막 초지대를 보자마자 뜬금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왠지 저길 것 같았다. 사진 속 풍경이 분명 아닌데도 말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오르막이 어느덧 수십 미터 앞으로 다가왔다. 언덕 위 길가에 네댓 명 순례자들이 서있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다. 저긴가 싶었다.
정말 그랬다. 그토록 눈에 밟혔던, 그래서 이 길을 걷도록 유혹했던 곳 중 하나인 시루에냐 밀밭 길이 드디어 경이로운 자태를 수줍은 듯 드러냈다. 근사한 구도가 나오는 주위에는 이미 대여섯 명이 연신 셔터를 눌러대기 바빴다. 언덕을 내려가는 중간에도 사람들이 저마다 포즈를 취하느라 부산스럽다. 조금 기다려 주위가 한산해지면 찍을까 잠시 망설이다가 적당한 앵글에서 타협했다. 조급한 마음에 사진 몇 장 남기곤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분명 나중에 아쉬워할 거란 걸 알면서도 더 있으면 미련만 남는다는 듯 서둘러 내려갔다. 삼십칠 일로 예정된 순례일정에서 단 오 분 십 분을 더 내기 아까워했다. 이 순간이 지나면, 여기를 떠나면 다신 되돌아볼 수 없는 시공간인데 그리 괘념치 않고 스스럼없이 지나쳤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막급이었다. 지나간 절경을 뒤늦게 아쉬워하는 심정은 애별리고(愛別離苦)의 괴로움에 견줄만했다. 기다리면 충분히 얻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무심해 구하지 못했으니 겪지 않아도 될 구부득고(求不得苦)의 고통까지 덤으로 얻어야 했다.
시루에냐 밀밭 길 비교사진 : 왼쪽은 나, 가운데, 오른쪽(스티브앤지니/도화, 인터넷에서 따옴). 슈팅 포인트나 프레임 선택에서 차이가 많이 난다.
뭐 그리 급했을까? 황홀경에 넋이 나갈 경관도 결국은 이내 희미해질 아름다움일 뿐이다. 아무리 뇌리에 새겨 넣고 가슴에 감동을 묻어둔다 한들 시간 앞에서는 무력하게 빛바래지는 노스탤지어에 불과하다. 습관적으로 눌러 댄 손가락이 윤색되는 기억을 애써 붙들어 매는데 그친다면 이리 안타까워할 필요가 없다. 자연이 선뜻 던져준 장려한 풍경을 심호흡하며 차분히 즐기다 보면 주체할 수 없는 감격과 환희, 만족감 등의 따스한 감정들이 머릿속 해마에 깊숙이 각인된다. 우리에게 사진이 주는 효능이란 훗날 현상된 아름다움을 다시 마주하게 해주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진은 해마라는 보석상자를 열어줄 황금열쇠이다. 꽁꽁 닫힌 해마의 자물쇠를 떨리는 손으로 열어젖히면 그 속에 곱게 잠들었던 추억과 당시의 정서들을 고스란히 소환해 준다. 저마다 기를 쓰고 사진을 남기는 까닭이다.
여행이 관광과 다른 점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걸 최우선으로 하지 않는 것이다. 관광은 가고 싶은 장소에서 보고 싶거나 경험하고픈 곳을 기행 하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다. 관광지로 가는 여정은 가능한 편안히, 가급적 빨리 도착하면 그만이다. 이동하며 얻는 감흥도 그다지 중요치 않다. 관광객들이 맞이할 돌발 변수란 대체로 당황스럽거나 진을 뺄 귀찮은 일이다. 여행은 이와 다르다. 목적지에서의 체험만큼이나 거기까지의 여정 또한 못지않게 중요하다. 더욱이 예상치 못한 일촉즉발의 상황을 기발한 아이디어와 번뜩이는 재치로 해결하는 묘미야말로 여행이 옜다하고 던져 주는 감초이자 보너스다. 산티아고 순례는 한 달 이상을 걸어가는 기나긴 여정이다. 도보 여행이 주는 즐거움 중 하나는 내 주위 공간이 너무나도 천천히 움직인다는 점이다. 주마간산하면 순간의 변화를 제대로 알 수 없지만 보고자 마음먹으면 시선이 머무는 대상을 충분하고 세심히 볼 여유가 넉넉하다. 다만 이를 받아들일지 말지는 순례자의 선택에 달렸을 뿐이다. 까미노를 ‘No pain, no glory’의 길이라 한다. 고통스러운 만큼 영광스럽다는 의미다. 시루에냐 밀밭 길을 서둘러 지나치고 나서야 야고보를 만나러 가는 순례길이 ‘No slow, only regretful’의 까미노란 걸 깨달았다. 천천히 가야만 후회가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벽녘에 대학 동기가 꿈에 나왔다. 내가 아주 가끔씩 꾸는 꿈이 있다. 출석 미달로 학부를 졸업하지 못하거나 대학 동기를 만나는 꿈이다. 무언가 마음대로 되지 않아 스트레스가 심하거나 피로에 지쳤을 때 이 꿈을 꾸면 희한하게 재충전이 된다. 어제 컨디션이 그리 나쁘지 않은 걸로 봐서는 시루에냐 밀밭 길 때문이리라.
인생 길은 일직선이다가도 굽어질 때가 있다. 몰아치던 비바람이 잠시 멈춰 주위를 둘러 보면 모두 사라져 홀로 외로이 길을 걸어야 한다. 카페가 오아시스처럼 순례자를 재충전해준다.
대학 일 학년 말부터 서서히 암흑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졸업하고 나서 소외받는 민중과 함께 전위적 삶을 살리라 다짐했던 젊은 결기가 부담스러워졌다. 그 길에 올라서는 게 두려웠고 평생을 후회 없이 살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남들처럼 편안하고 안락한 길을 걷고 싶은 내 속에 숨겨진 욕망을 비우지 못했다. 이런 내게 동기 하나가 잠시나마 어둠을 살짝 가려줄 햇살이 되어 주었다. 친구는 내게 자기부정은 자기 애((愛)의 다른 얼굴일 뿐이라고 위로해 주었다. 그저 남보다 나르시스 성향이 조금 강한 것에 불과하다며 다독여줬다. 어느 날 친구가 내 가슴 한 곳에 자리 잡았음을 덜컥 깨달았다. 천진난만하고 세상을 예쁘게만 보던 친구와는 다른 삶을 지향하는 만큼 서로 어울릴 사이가 아니라 단정했다. 흠칫 놀라 봉오리를 이제 막 틔우려는 연정을 부인하며 내 속에서 밀어내려 했다. 서너 달을 만날 만한 곳은 일부러 피해 다녔다. 멀찍이 보이기라도 하면 에둘러 길을 돌아갔다. 어쩔 수 없이 자리를 같이 해야 하는 날에는 반대편 가장 끝에 앉아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라도 막 집힌 화톳불을 끄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거세진 불길이 내 단심(㫁心)을 삼켜 버렸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여름 어느 날 친구에게 고백했다. 만날 때부터 안색이 다소 어두웠던 친구는 머뭇거리다 너무 늦었다는 말로 완곡한 거절을 표했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시커먼 입을 드러낸 무저갱으로 끝 모르게 추락하는 것 같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란 게 이런 아픔일까? ‘그랬구나. 내가 너무 늦었구나. 너무 일찍 일어나 용기 없는 사자가 되었건만 이젠 너무 늦어 버렸구나’ 잠시 말을 잃었다. 설득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알겠다고 하고선 동아리 모임이 있는 주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 앞에 마주 앉은 친구와 말없이 잔을 부딪혀 한두 잔 들이켠 다음에 먼저 자리를 떴다. 더 있고 싶었지만 일이 있어 야학에 가야 했다. 다음날 자리를 같이 했던 선배가 내가 일어선 연후에 친구가 갑자기 울었다며 무슨 일 있었냐고 물었다. 며칠 뒤 동아리 모임에서 또다시 마주친 친구를 배웅했다. 아무 일 없었던 듯 대화를 잇기 어려웠다. 어색한 침묵만이 우리를 서글프게 감싸 안았다. 환승하기 위해 버스를 내려 잠시 걷는데 친구가 살포시 팔짱을 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서로를 좋아하는 감정을 가졌으면서도 손 한번 잡지 않았는데. 순간 놀라 팔짱에 낀 팔이 굳었고 숨을 쉴 수 없었다. 예전으로 되돌아가지 못할 사이가 되었지만 따스한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잔잔하게 올라왔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하며 찰나의 행복을 만끽했다. 아쉽게도 환승버스는 이런 내 마음을 몰라 주었다. 그날따라 유달리 일찍 도착했다. 잘 지내라는 작별 인사를 했다. 또 보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친구 얼굴을 더 이상 보기 힘들어 휴학해 학교에 나가지 않을 계획이었다. 그게 서로에게 좋을 거라 여겼다. 당연히 수강신청을 하지 않았다. 개강 후 휴학계를 내러 갔다. 교무처에서 휴학신청을 불허했다. 장학금을 받아 이미 자동 등록이 된 터였다. 수강신청 기간이 이미 끝났을뿐더러 수업에 미련이 일도 없었다. 마음 둘 곳이 없으니 몸만 훌쩍 사라지면 될 일이다. 평점 All A가 All F로 전락하는 걸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아니, 수강신청을 하지 않아 성적 자체가 나올 리 없었다. 그저 20 학점이 완벽한 공(空)으로 승화했다. 하지만 감정의 색은 끝끝내 공이 되질 못했다.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를 탐닉했다. 자칭 교주가 되어 소설 속 공간 '유리'의 초입을 찾아 방황했다. 그로부터 일 년 반을 룸펜이 되어 허송세월하는 교주에게 고맙게도 같이 야학 교사를 하던 두 명의 친구가 신도 되기를 자청했다. 우리는 도로시 일행처럼 뭔가 하나씩을 채우지 못했다. 부족원이 없는 추장과 사리가 멀쩡한 푼수만이 교리 잃은 교주 옆을 묵묵히 지켜주었다.
우리는 사랑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에게 가진 호감을 부끄러워하며 드러내지 않던 사이였다. 연심을 옅게 내비치는 몇 페이지 분량의 편지를주고받으며 가끔 짬이 맞는 날에 동아리 회원 몰래 학교 근처 찻집 구석진 곳에서 만나는 두런두런 이야기하거나 야학 수업이 없는 날 집 근처까지 배웅해 주는 게 전부였다. 요즘으로 치면 남다르게 썸 타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실감에 하릴없이 허우적거렸다. 친구가 내 마음에 들어앉기 전, 아니 팔십칠 년 민중후보 백기완 선생의 선거 자금을 위해 마련되었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친구가 놀러 오기 전까지 우리는 아무런 사이가 아니었다. 여러 동아리 동기들 중 하나일 뿐 이렇다 할 감정이 티끌하나 없었다. 오히려 격동했던 팔십칠 년에 어울리지 않을 그녀의 순진무구함을 가혹하게 비난했을 정도로 첫인상이 썩 좋지 않았다. 이제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으니 부정적인 첫인상까진 아닐지언정 최소한 공(空)으로 돌아와야 하거늘 그러질 못한 채 왜 그렇게 아팠던 걸까? 온몸을 파고들어 헤집어 놓는 애별리고의 채찍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견뎌내기가 무척 버거웠다. 별리의 괴로움이 그토록 심했던 것은 혹시 나로 인해 친구가 상처를 입었다면 그가 감당해야 할 아픔까지 나 자신의 카르마로 쌓아 홀로 짊어져야 했기 때문이지 싶다.
지친 방랑객은 마음의 안식처에서 잠깐의 위안을 얻지만 이내 순례자들과 떨어져 외로이 길을 걷다 화살표를 잃어 헤매기도 한다. 마음의 짐이 쌓일수록 살아가는 고통 역시 배가된다.
오늘따라 애별리고의 상처를 노래한 곡들이 연이어 나온다. 미국판 '잘못된 만남(김건모, 1995년)'이 있다. The Allman Brothers Band가 부른 ‘Whipping post(383위)’란 곡이다. 연인이 헤어져 자신의 절친과 사귀는 장면을 목격하는 심정은 기둥에 묶여 어쩔 수 없이 채찍질당하는 아픔조차 비할 수 없을 것이다. 실연 이상의 충격에 절규하는 주인공의 고통스러운 심정이 보컬과 기타 연주에 절절히 녹아있다. 정규 앨범은 5분짜리 곡이지만 23분가량의 라이브 버전이 더 유명하다. 라이브 버전의 기타 애드리브를 유튜브에서 꼭 일청해 보기를 추천한다. 사랑의 달콤함이 다하자 이별의 쓰디쓴 맛이 찾아오는 감진고래는 달달하되 고약하게 쓴 인생 교향곡의 어느 한 악장이라 비유할 만하다. 영국의 얼터너티브 록밴드 The Verve는 ‘Bitter sweet symphony(382위)’에서 나락에 빠진 이들의 고통을 생생히 그렸다. 화자는 변화를 꾀하려 하나 자신을 딛고 일어설 수 없어 그저 답답해한다. 스무한 살의 내가 그랬다. 심연의 나락에 빠져 매일 백만 번 다른 나를 꿈꿔도 나라는 틀을 바꿀 수 없음을 자각하게 되면 나락이 지옥으로 화해버리는 절망을 느끼던 시절이었다. Sam Cooke의 ‘Wonderful world (373위)’는 마지막 구절에서 나를 사로잡았다. 비록 자신이 우등생이 아니어도 A학점을 받으면 당신의 사랑을 얻을 거라는 희망을 노래했다.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게 없던 나였다. 과수석을 하면 그나마 고백할 자격이 있을 거라 자위했다. 사랑을 성적으로 확인해 보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소아병적 사고였다. 기말고사 기간을 친구 하숙집에서 밤새우다시피 했다. 그런데 경제학 원론 채점이 잘못되어 차석이었다. 발을 동동거렸으나 해외로 간 교수님과 연락이 닿지 않아 결국 정정할 수 없었다. 마음을 전할까 말까 주저하다 간신히 용기를 냈다. 만일 점수가 수정되어 수석을 했다면 친구의 거절을 무릅쓰고 끝내 설득하려 했을까? 사랑이 뭔지 모르는 나르시시스트가 무책임하게 내질렀던 유치한 불통에 다름 아니었다.
The Allman Brothers Band - Whipping Post(1969년, 383위)
지금도 사랑이 뭐라 정의하기 어렵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사랑은 무엇을 하는 행위의 결과가 아닌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형성의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누구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누구와 함께 서로 만들어 가는 무엇이다. 그 시절의 나는 서로가 호감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그녀의 사랑을 구하거나 내 사랑을 하려고만 했지 친구와 함께 호의의 교각을 하나둘씩 다져 올려서 추억의 오작교를 이어가려 하지 않았다.
용기 없던 사자로 지내던 젊은 시절을 떠올리던 차에 Elton John의 'Goodbye yellow brick road(380위)' 차례가 되었다. 노란 벽돌길은 상상의 나래를 펴는 길이자 삶의 해답을 얻는 길이다. 스물세 살 때 이 곡을 작사했던 버니 토핀은 약관을 갓 지나서부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젊은 나이에 이름을 얻게 되자 자신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리라 다짐했던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 희망을 담아 오즈의 마법사가 사는 에메랄드 시티로 가는 노란 벽돌길을 가사로 적었다. 도로시는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난관과 장애물, 위기를 만나지만 똑똑해지고 싶은 허수아비, 심장이 필요한 양철나무꾼, 겁쟁이 사자와 함께 이를 헤쳐 나간다. 친구가 '너무 슬퍼하지 마.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라고 나를 격려했듯이 도로시는 겁 많은 사자에게 용기 없는 게 아니라 그렇게 여길 뿐이라며 필요한 건 자신감이라고 북돋아줬다.
어쩌면 나는 용기 없는 사자가 아니라 나를 비울 자신감이 없는 교주였는지 모른다. 삶의 진정한 용기란 두렵고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위험과 맞서고자 하는 의지일 것이다. 평생을 관철할 의지가 필요한 게 아니다. 지금, 당장, 내 앞을 가로막아선 험준한 산에 오르려 내디딜 한 발짝의 걸음이면 족하다. 반대편 발을 또다시 내딛을 단호한 결의는 앞선 발걸음을 떼고 나서 고민하면 될 일이다. 이 길 끝에 있을 행복을 바라서는 안된다. 그런 행복을 기대하는 건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 줄 아편에 불과하다. 매 순간마다 단 한 번의 의지를 보여주기만 하면 될 뿐이다. 평생을 전위에서 지낼 불굴의 용기가 필요했던 게 아니다. 내가 바라던 현장으로 기꺼이 들어가려는 단 한 발자국의 소박한 진심을 깨닫지 못했다. 있지도 않을 허상의 용기를 찾는 구부득고의 괴로움에 몸부림만 치다가 끝내 나를 비우지 못했다. 부족한 나를 책망하는 것으로 면피 삼아 스스로를 헛되이 소진하는 어리석음만 반복했다. 내가 찾아 헤맨 노란 벽돌길이 산티아고를 향해 도로나 담벼락 위에 무수히 그려진 노란색 까미노 이정표를 연상케 한다. 순례자들이 미망에서 헤매지 않도록 친절히 인도해 주는 노란 화살표가 연이어진 까미노에서 들으니 더욱 정감이 간다.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돌아온 도로시는 집에 제일 좋다고 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라면 과연 나도 반색을 할까? 스무 살로 회귀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라는 쓸데없는 공상을 하는 와중에 벨로라도를 오 킬로미터 앞둔 비야마요르 델 리오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초입에 있는 ‘Tienda Villamayor’ 바가 평점이 좋아 이곳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점심이 한창때여서인지 이미 순례객들로 가득 찼다. 다른 곳을 찾아보자는 누나 제안에 이백 미터 가량 더 들어갔다. 널찍한 마당 끝에 한적하니 레스토랑이 보였다. ‘카살바’였다. 별 이유 없이 동하지 않았지만 오늘따라 누나가 앞장서길래 그냥 따라갔다. 문을 열어 풍경소리가 울려도 아무런 응대가 없다. 누구 있냐며 기척을 내자 웨이터가 나와 배낭을 현관 문밖 계단 위에 두라고 한다. 가지고 들어가겠다고 완곡히 거절했는데 한사코 안된단다. 기분이 상하기 시작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누나가 모처럼 순례객과 어울리지 않는 엔틱한 분위기를 호사하려는 듯해 참았다. 주문을 했다. 식전 빵을 고르라고 해 바게트를 선택하고 음료는 필요치 않아 레스토랑에서 제공하는 물이면 족하다고 했다.
순례객 한 명이 들어왔다. 길에서 자주 마주친 젊은 한국 여성 순례자였다. 며칠 전부터 종종 마주쳤다. 처음 만났을 때 가볍게 인사를 했는데 냉랭하게 부엔 까미노라 외마디 대답을 하고선 묵묵부답이었다. 섞이고 싶지 않은 내색이라 여겨 그냥 앞서 나가고는 이후부터는 굳이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힘들었는지 테이블을 찾지 않고 스탠드 바에 주저앉았다. 가만 보니 배낭을 옆 의자에 걸쳐 놔도 웨이터가 뭐라 하지 않는다. ‘뭐지 이건?’ 뭣 때문에 차별하는 건지 부조리하다 여겨 점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식전 빵이라고 하기엔 양이 많았고 마개를 따지 않은 1.5리터 생수병이 통으로 서빙되었다. 뭔가 이상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결국 빵과 생수값으로 구 유로를 치렀다. 원화로 일만몇 천 원에 불과할 돈이지만 이미 잡친 기분이 기승전 클라이맥스에 치달았다. 모처럼 맞이한 근사할 점심은 모칠라로 착각해 시킨 초리소를 소태처럼 씹어대는 ‘결’로 마무리되었다. 흔히 먹거리가 마땅찮을 때 살기 위해 먹는다고 한다. 까미노에서는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걷기 위해 먹는다는 표현이 적확하다. 오늘은 정말 걷기 위한 일념으로 우걱우걱 거려야 했다. 체하지 않은 걸로 헛헛하게 위안 삼았다.
손님에 따라 배낭이 허락되는 부조리에서 초등학교 육 학년 때 일이 떠올랐다. 주에 한 번씩 학급별로 당번이 되어 돌아가며 교무실이 있는 일 층 나무바닥을 오와 열을 맞춰 왁스칠과 돌가루로 광을 내야 했다. 우리 반 차례가 되어 급우들이 입김까지 호호 불며 열심히 마른 걸레질을 해대는 데 남자 선생님이 보무도 당당하게 구둣발로 교무실에 들어가지 않는가? 어린 나이에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건 아니라는 욱하는 화산이 폭발해 용암처럼 마구 흘러넘쳤다. 마침 거칠 것 없이 걸어간 선생님이 전교 어린이 학생회를 주관하셨다. 돌아온 학생회에서 손들어 건의사항을 얘기했다. 선생님들도 평소 신는 실내화를 갈아 신고 지나가 달라는 부탁이었다. 어린 학생들이 청소하는데도 괘념치 않은 부조리를 지적했다. 선생님의 답변은 간단했다.
“선생님이니까 그렇게 해도 된다. 너희들은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걸레질을 하면 된다”
애정이 없는 매질만 폭력이 아니다. 공감능력이 없는 한마디의 말이 비수처럼 열세 살 소년을 난도질했다. 이 어찌 가혹한 행위가 아니란 말인가? 그런데 그게 당연시되던 시대였다. 온통 부조리로 점철된 시절이었다.
서이초 여교사가 학부모의 무분별하고 도에 지나친 갑질에 세상을 등진 지 일 년이 넘었다.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터라 더 충격이었다. 전근대적인 교육관으로 무장했던 교사들이 횡횡했기에 학생인권조례가 반대급부로 마땅히 필요했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젠 과유불급이 되어 존중받아야 할 교권이 너무도 초라하게 말라비틀어졌다. 왕의 DNA를 가진 아이이니 세자를 대하듯 항상 칭찬만 하고 안 돼라는 말은 입에도 담지 말라는 교육부 사무관의 갑질에 이르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진심을 다한 훈계가 언어폭력으로 왜곡되어 어이없이 고소를 당해 학급을 떠나야만 한다. 학교 폭력을 저지른 가해자가 법의 권위와 조력을 받아 쌍방 학폭으로 위장시켜 피해자를 학교 밖으로 내모는 세상이다. 비합리적이거나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일들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당연시되는, 부조리가 적자생존의 상식으로 자리 잡은 오늘이다.
Pink Floyd의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2(375위)’는 강압적이고 일방적으로 통제하는 교육 방식으로 학생들의 반발이 거센 1950년대 영국 학교의 부조리를 풍자했다. 당시엔 아이들의 잠재력을 이끄는 걸 교육 목표로 삼지 않았다. 학생들은 교사들에게 순종해야 할, 교사가 원하는 모양으로 조각되어야 할 나무토막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도 그런 때가 있었다. 곡 중에 흘러나오는 아이들의 감미로운 코러스가 김태원이 이끌었던 부활의 ‘회상 2(1987년)’에서 그러했듯 천사들의 음성으로 내려온다. 21세기 한국에서 이기적인 부모들은 교권을 무자비하게 억누르는 벽이 되었다. 무례한 학생들은 그 벽을 쌓은 벽돌이 돼버렸다. 이를 해체할 방안이 쉬이 떠오르지 않아 몹시 씁쓸하다.
Pink Floyd -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2(1979년, 375위)
버려진 하찮은 신발이라도 아름다운 꽃을 꽂아주면 희망의 햇살이 다시 찾아올 것이다. 입장이 불허된 배낭 덕분에 걸을 일념으로 헛헛한 식사를 했다. 지친 순례객에겐 숙소가 제일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