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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차] 폭풍우 가득했던 젊음의 심연

I Believe I Can Fly - 일체유심조. 어디 한번 날아보자

by 여운설

2023년 5월 18일 로그로뇨 – 나헤라 29.0km


까미노 위에 선 지 일주일이 지났다. 어제까지 160km를 걸었다. 기대수명을 백 세로 기준하여 계산하면 순례 일수로는 낭랑 십팔 세, 걸은 거리로는 약년 스무 살을 갓 지난 청춘이다. 고교 2학년에서 대학 2학년 정도에 해당되는 연령대다. 우라 세대는 고교 1,2학년 전후에 사춘기를 겪었다. 십여 년 전에는 중이병이라 했는데 요즘은 초사병이라 부른다. 그만큼 아이들이 조숙해졌다. 어쨌거나 인생으로 치면 까미노 여정이 이제 청년기에 막 들어선 것이다.


그 시절의 나를 돌이켜 본다. 당시에 어떤 미래를 그렸던가? 인생을 어떻게 여행하고 싶었나? 지나고 보니 어릴 적 여러 가지로 그린 삶의 경로 대부분을 밟지 못했다. 그간 지나친 궤적은 대체로 예상치 못하거나 기대에 어긋난 걸음이었다. 그래도 얼추 맞춘 게 하나 있긴 하다. 겁 많은 내가 스스럼없이 민중과 하나 되는 용기를 쉽사리 내지 못할 거란 우려였다. 막연한 불안이 안타까운 현실로 꽃 피었다. 결코 이루어지길 바라지 않은 꿈이었을 텐데 말이다.


고교 3학년에 오른 4월이었다. 근 2주일을 숙고하다가 반정부 유인물을 작성해 몰래 교내 모든 교실에 배포했다. 지난 2학년 여름방학 말미 국어 선생님을 구속한 것에 대한 저항이었다. 당시 구속사유는 선생님이 기고한 무크지 '민중교육'의 내용을 문제삼아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혐의였다. 무크지를 읽어 본 나로서는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고등학교에 반정부 유인물이 나돌자 언론 통제가 극심했던 군사정권 시대에 사회적 반향이 컸다. 주요 일간지들은 운동권 대학생이 고등학생들에까지 의식화하려는 마수를 뻗었다는 추측성 기사를 남발했다. 경찰과 기관원이 주범을 찾기 위해 수사에 나섰다. 여름방학 직전에 대필해 준 친구가 겁을 먹어 제보했다. 내가 주동한 사실이 드러났다. 방학은 엉망이 되었고 2학기 내내 곤욕을 치렀다. 전교 학생회 간부 자리에서 물러나 근신과 반성을 강요받았다. 어머니가 학생부로 불려 가시던 날, 당숙께서 나를 불러 앉혀 타이르셨다.


“한창 공부할 나이에 책임지지 못할 일을 했다. 앞으로 네가 책임질 수 있는 일만 조신히 행동해라.”


작고하신 선친을 대신한 집안 어른 앞에서 차마 반발할 수 없었다. 대학교 졸업을 앞둔 친형은 너무 일찍 일어섰다고 했다. 결국 이 일로 네 생각과 진로가 바뀔지 모른다는 충고를 덧붙이며.


“일찍 일어선 게 아니야. 그렇게 살지 않을 자신 있어” 내가 형한테 말한 다짐이자 희망이었다.


일찌감치 서두른 아침에 걷는 이 길은 부푼 꿈에 가득했던 청소년기 였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내 인생의 큰 줄기는 이때를 계기로 제법 달라진 것 같다. 촉망받는 동문회 장학생 중 유일하게 최고학부에 진학하지 못했다. 설마하는 자신감에 기대어 당시 받은 정신적 압박을 핑계삼아 입시 준비에 등한시하며 탱자탱자했던 게 패착이었다. 이런 나태하고 겁 많은 심성으로 어찌 큰일을 도모하리! 자존감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운동권을 기웃거리다 대안으로 선택한 야학 교사에 위안을 삼았다. 학생들과 함께한 시간이 크게 의미있을지라도 허탈한 상실감을 지우기엔 부족했다. 과학적 사회주의가 점점 버거워져 몽상적 아나키즘 속에 나를 감췄다. 급기야 극단적인 나르시시즘에 찌든 룸펜의 나락에 빠져 발버둥 치던 청춘이었다. 냉정히 자평하자면 뒤틀려버린 물줄기를 되돌리기엔 너무 유치했고 무책임했다.


소설가 김영하는 여행에는 목적과 이유가 있다고 했다. 여행을 하며 무엇을 보거나 무언가를 깨닫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여행을 앞둔 여행자는 익숙지 않은 목적지가 불안하다. 그래서 사전에 이것저것 꼼꼼히 준비하려 애쓴다. 그런데 당초 계획했던 일정은 상당 부분 틀어지기 십상이다. 미리 공들일 필요가 없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니 상황이 닥치면 당황하지 말고 대처하라고 조언한다. 여행이란 원래 이런 거니까.


인생의 여정도 마찬가지다. 아무 일 없이 목적지에 도달한 이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돌아갈망정 늦게라도 원하는 곳에 가기만하면 다행이다. 가고자 했던 길에서 대책 없이 벗어나기 일쑤다. 이게 필부의 평범한 삶이다. 호랑이에 물려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데 소싯적 나는 초라하게 찢긴 돛을 매단 채 항로에서 벗어난 조각배에 불과했다. 망망대해에서 별빛 한 점 없는 어둠속 세찬 비바람과 거친 풍랑에 휩싸여 정처없이 표류했다. 폭풍우 가득했던 젊음의 심연은 대학원에 진학해 소시민으로 회귀하는 걸 받아들인 연후에서야 점차 조금씩 가라앉았다. 새벽 늦게까지 도서관에서 아티클을 읽다가 친구 자취방에 기어들어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잠들기 전 솔리드의 '이 밤의 끝을 잡고(1995년)'의 낯선 R&B 리듬이 위로해주던 시절이었다.


황량하기만 청춘의 한 자락에 웃음을 지을 때도 있었다. 까미노의 화살표처럼 요동치는 젊음의 뱃머리에서 방향타를 놓치지 않았더라면 어떠했을까?


국내외 대중가요에 일자무식인 내가 순례 중에 롤링 스톤지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팝송 500 곡을 매일 몇 곡씩 나눠 듣는다. 그중 가슴에 와닿는 두어 곡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려니 상당히 버겁다. 일자무식이라 눈동냥 귀동냥, 인터넷에서 발품 팔아 겨우 얘깃거리를 낚는다. 지금껏 소개한 노래들은 이렇게 얻어걸린 소재를 순례 당시의 경험과 어렵사리 엮어낸 거란걸 뒤늦게 고백한다.


아무튼 잠시나마 내 미래는 휘영청 밝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치기 어린 시절이 있었다. 그 당시 젊음의 초상을 떠올리니 The Carpenters가 부른 ‘We’ve only just begun(405위)'이 심금을 울린다. 달콤한 신혼의 꿈속에서 한없이 행복한 미래를 그리는 젊은 커플이 부럽기 짝이 없다. 마치 내게는 행복을 당연시했던 젊은 시절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듯이. 솜털같이 감미로운 목소리로 팬들을 달래주던 캐런의 거식증도 지나친 나르시시즘 때문이었을지 궁금하다.


The Carpenters - We've Only Just Begun(1970년, 405위)


R. Kelly의 ‘I believe I can fly(406위)’도 한가득 소울과 여운을 준다. 기적은 어쩌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데서 시작되는 건지 모른다. 우선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있고 심지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초긍정의 믿음이 필요하다. 스스로 용기를 다져야 경이로운 결과를 맛볼 수 있다. 대학 2학년 2학기에 이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면 과연 All F를 면할 수 있었을까? 하늘을 날자던 알 켈리는 정작 비행기가 무서워 배편을 이용했다곤 한다. 일어나라 그리 외치던 김광석이 서른 즈음에 허망하게 갈 줄은 또 누가 알았으랴!


R. Kelly - I Believe I Can Fly(1996년, 406위)


산행 중에 경사가 극심한 깔딱 고개나 끝없어 늘어선 아찔한 계단에 이르면 늘 후회한다. ‘왜 왔을까? 얼마나 좋은 경치를 보겠다고 생고생을 이리도 자처하나?’는 때늦은 자책에 휩싸인다. 숨이 가쁘게 몰아쳐 온다. 허벅지와 종아리에 천근만근 부하가 걸려 다리가 저는 놔두고 몸만 가라 한다. 그런데 순례길에 만난 무수히 많은 오르막 길에서 밭아내는 숨결에 즐거움이 한가득인 걸 깨달았다. 저 언덕 너머에 어떤 아름답고 낯선 경치가 나를 반겨줄지 설렜다. 언덕을 오르는 고행이 어느 순간 자연이 만들어낸 오묘한 걸작을 만난다는 환희로 다가섰다. 똑같은 언덕인데 마음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감정이 180도 다르다. 화엄경의 일체유심조가 맞는 말 같다. 세상만사 마음먹기 나름이요, 오죽하면 고절한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먹고 유학길을 포기했겠느냔 말이다.


그런데 일체유심조가 정말 모든 것은 마음먹기라는 뜻일까? 누구나 마음먹은 대로 행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질곡이 티끌 한 점 없을 극락일 게다. 일체유심조. 우주의 삼라만상이 오직 마음으로 만들어진다는 말은 고승이나 깨달을 깊은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마음이란 개인의 주관, 생각, 감정이 아니라 우주의 본성을 뜻한다. 심오한 본성이 만물을 만드니 마음이 곧 조물주이자 신이요 하늘이다. 일체유심조는 스스로를 자각해 깨달음을 얻는, 부처에 이르는 본성인 견성의 지경에 올라야 가능한 일이다. 나 같은 이는 범접지 못할 경지다. 불가는 왜 마음, 즉 일원을 중시하는 걸까? 흙, 물, 불, 바람으로 이루어진 물질四大이 인연과 인과율緣起論에 따라 여러 가지로 만들어지며 사라지는데 연기의 주체가 자신이고 나의 주체가 곧 마음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연기에 따라 흩어지는 물질이야말로 헛된 것에 불과하니 오직 마음이 중심이다. 무기력했던 청춘의 나날에 불가 서적을 접했으면 위로를 받았을까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걸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많이 걷는다. 오늘 목적지 나헤라까지 지도에 표시된 거리는 29km. 실제로는 30km를 넘게 걸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동키를 신청했다. 연이틀 많이 걷게끔 일정을 짠 이유는 부르고스까지 숙소 여건이 괜찮은 마을에서 머물기 위해서다. 로그로뇨에서의 일박과 하루 평균 20km 초반의 이동거리를 동시에 충족하는 일정을 짜기 어려운 점도 한 몫했다. 나름대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먼 길을 걸어야 해서 평소보다 출발을 앞당겼다. 6시 기상, 어제 만난 일행들이 준비한 컵라면을 먹고 7시에 출발했다.


이틀 동안 동키가 장거리 일정에 도움을 많이 줬다. 내일부터는 다시 내 짐을 온전히 짊어져야 한다. 어느 누가 내게 부르고뉴까지의 일정을 이렇게 짜라 강요하지 않았다. 100% 내 몫이다. 인생길도 마찬가지다. 일찌감치 경고해주신 당숙과 친형은 조언자였을 뿐이다. 주변의 냉정한 충고에도 근자감으로 인생의 무게를 가볍게 봤던 내가 걸어온 지난날을 책임져야 한다. 까미노에서 선택한 코스와 짊어 맨 배낭을 내가 떠안듯 인생을 걷는 길에서 만날 선택과 그로 따른 책임은 동반자와 나눌 수 없다. 오롯이 내가 짊어질 업이다.


메마르고 막막한 길을 꾸역꾸역 걷다 보면 젖과 꿀이 가득한 목적지에 다달을 수도 있는 게 인생이다. 화살표를 잃지만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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