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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설 Jun 23. 2024

[7일 차] 동키가 던져준 꼬꼬사

Fuck the Police - 본능과 경험된 학습의 인지부조화

7일 차 로스 아르코스 – 로그로뇨


  목적지인 로그로뇨까지 28km다. 다소 빠듯하게  일정을 잡은 대신에 동키를 신청했다. 차로 목적지의 숙소까지 짐을 배달하는 서비스다. 정식 명칭은 모칠라 서비스인데 흔히 동키라 부른다. 내 배낭에 불필요한 짐들을 모아 동키로 보냈다. 걷는데 필요한 짐만 누나 배낭에 담아 짊어졌다. 누나는 가벼운 에코백에 간식거리와 옷가지를 챙겼다. 11kg 가까운 무게에서 해방된 걸음이 날아갈 듯 가볍다. 건조하고 황량한 나바라 평원은 사막을 걷는 느낌이다. 설상가상으로 스페인 북부 경치가 점차 눈에 익숙해졌다. 다행히  동키가 던져준 꼬꼬사가 지루함을 면해줬다. 가벼운 행장에 음악을 들으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고를 이어나갔다.


  동틀 녘 먼 지평선을 시뻘겋게 불태우는 태양이 순례객들에게 주는 선물이 있다. 팔등신을 훌쩍 넘긴 롱다리 그림자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프랑스 루트는 동에서 서로 향한다. 자연히 해를 등지고 걷는다. 햇살은 동쪽에서 떠올라 남쪽으로 커져가며 서쪽으로 진다. 그 덕에 시간에 따라 그림자가 변한다. 개중에 고즈넉한 아침 길에 드리워진 키다리 아저씨 마냥 기다란 그림자가 유독 내 마음을 끈다. 틈틈이 까미노에서 이른 아침에 검게 드리운 그림자를 재미 삼아 찍곤 했다.

 

오늘은 키다리 아저씨들과 함께 밀밭과 포도밭이 끊없이 이어진 메마른 들판을 걸었다.


  일출이 오를 무렵 잠시 걸음을 멈춰 뒤를 돌아본다. 까맣게 물든 어둠이 녹아내려 도망친 자리에 이글거리는 불덩어리가 쑤욱 고개를 내민다. 시커먼 죽음 한 복판에서 세상을 구원할 예언자가  탄생하듯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해 뜨는 동쪽을 바라보면 왼손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북쪽을 향한다. 라틴어 sinistra는 왼쪽이란 뜻이다. 불길한, 적대적인, 야비한이란 sinister에서 파생되었다. 반면 오른쪽 dextra는 자비로운, 호의적인 의미의 dexter에서 유래했다. 왼쪽을 금기시하는 이유를 태양 숭배의 고대 신화론으로 접근한 해석이다. 원시 시대부터 왼손잡이로 태어날 확률이 10% 정도라 한다. 고대로부터 오른쪽을 신성시하는 관습과 숫적인 희소성에서 왼쪽과 왼손에 대한 편견이 오래 이어져 왔다.


  나는 오른손잡이다. 그런데 왼손으로 트럼프 카드를 섞는 게 더 편하다. 처음 카드를 만질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양손가락을 낄 때도 왼쪽 엄지가 오른손 위로 간 게 자연스럽다. 이처럼 나는 본능적인 습성으론 왼손잡이로 태어났을지 모른다. 사회적 학습이 나를 오른손잡이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혹시 주위의 부정적인 시선을 피하기 위해 나도 모르는 무의식의 방어기제가 발휘된 건 아닐까? 아무튼 타고난 습관은 선택이 아닌 숙명의 영역이 분명하다.        


  Billy Joel의 대표곡 하면 아마도 ‘Piano man(421위)을 떠올릴 이들이 많다. 나도 그중의 한 명이다. 빌리 조엘의 베스트 중 'The stranger'와 'Just the way you are'와 함께 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전성기 시절인 1980년대에 작곡 을 거라 짐작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데뷔 초창기 시절인 1973년에 발표되었다. 빌리 조엘이 유명해지면서 점차 인기를 더한 스토리가 가슴에 와닿는다. 화려한 출발보다 더뎌도 한걸음 나가는 꾸준함이 인생에 더 중요함을 느낀다. 도입부 재즈풍의 피아노 솔로와 하모니카 협주가 인상적인 자전적인 곡이다. 소속사를 바꾸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무명의 그가 LA 호텔바를 전전하며 희망 없는 무대에 올랐던 경험담을 담담히 그렸다. 가사의 주인공들이 이루지 못한 꿈을 갈망하는 목마름에 저절로 숙연해진다.


Billy Joel - Piano Man(1973년, 421위)


  시간 흐름을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내 오류는 Piano man 작곡 시기를 착각한 데 그치지 않는다. 1980년대 초중반 중고등학생이었을 당시, 이삼십 년 전 그러니까 1950~60년대  대중가요들을 나와 어울리지 않을 구닥다리의 올드 가요라 치부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이제 내가 편하게 들을만한 노래는 7080 팝송과 팔구십 년대의 가요들이다. 무려 사오십 년이 지난 노래들이다. 중고등학생 때로 따지자면 해방 이전 노래들인 셈이다. 놀랄 일이다. 최신 아이돌의 EDM 스타일은 왠지 거부감이 들고 가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아 애써 외면한다. 아이돌 노래는 몇 년을 묵혀야 익숙해진다.  요즘에서야 BTS나 블랙 핑크가 데뷔 1~2년에 발표했던 곡들을 청하는 것처럼 말이다. 젊을 때에 비해 낯설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상당히 느려졌다. 끔찍하다. 급변하는 21세기에 나도 모르게 경쟁에 뒤쳐져 낙오될 거란 불안감이 마구 몰려온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흐른다. 어려서는 수많은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지만  나이 들수록 자극을 덜 받는 탓이다. 과연 나는 나이 들어 어쩔 수 없이 자극과 신호에 둔감해진 걸까? 아니면 게임이나 만화, 웹소설 등 소일거리 취미에서 얻는 도파민에 중독된 탓일까?


  마흔을 훌쩍 넘어설 때까지 힙합과 레게를 곱지 않게 바라봤다. 부당한 권위와 압제의 시대에 용기 있게 맞서는 저항 정신을 담는 대신에 폭력, 마약, 욕설 같은 사사로운 일탈과 사회를 향한 개인적인 반항을 그리는데 그쳤다고 봤기 때문이다. 특히 국내 뮤지션들이 장르의 태동 배경과 철학을 도외시된 채 형식만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더 그랬다. 그런데 각종 차별을 받았던 흑인과 중남미 인들의 애환이 담겼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으면서 점차 부정적 인식을 거두게 되었다.


  힙합의 전성기를 열었던 그룹 중에 N.W.A. 가 있다. ‘Fuck the police(417위)’는 이들의 데뷔 앨범에 수록된 노래이다. 이전의 힙합이 악을 모호하고 두리뭉실하게 설정했다면 N.W.A. 는 공권력의 오용을 구체적으로 비판했다. 선과 악을 추상적으로 정의한 게 아니라 인간 행동을 기준으로 판가름했다.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가혹행위를 한 경찰을 고발한 것이다. 마치 1992년 LA 흑인 폭동의 도화선이었던 로드니 킹에 대한 경찰의 잔혹한 폭행을 보는 것 같다. 힙합은 비록 마약과 범죄 등 부정적인 내용이 담겨 있을지라도 저항정신을 담았다. 뒷골목 흑인 문화를 대중들에게 수용시켜 오늘날 전 세계에 가장 영향력 있는 장르로 떠오른 진보 성향을 담고 있다.


N.W.A. - Fuck the Police(1988년, 417위)


  나이가 들면 보수화된다는 통설이 있다. 과연 인간은 세월에 따라 성향이 저절로 바뀌는 걸까? 정답이 없을 질문이자 무수한 갑론을박의 주제였다. 그런데 최근에 논란을 종식시킬만한 과학적 현상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진보 내지 보수의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가설이다. 학습이나 이념에 따라 보수나 진보를 취사선택하는 게 아니다. 타고날 때부터 둘 중 하나의 성향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더 이상 서로에 대해 도덕적으로 비난해서는 안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타고난 기질을 어쩌란 말인가! 보수주의자는 공포감정을 담당하는 편도체의 오른쪽이 두껍고 세로토닌이 활성화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본능적으로 위험을 회피하고 사회적 규범과 질서를 따르는데 익숙하다. 진보주의자는 새로운 자극과 외부 정보에 반응하는 전대상회 부분이 두껍고 도파민 분비에 민감하다. 보상 회로를 주관하는 도파민 자극에 반응한 결과 자연스럽게 낯설고 새로운 것을 찾는 게 자연스럽다.


  인류 역사의 90% 이상을 차지한 수렵과 채집 사회에서 보편적이었던 평등과 공유, 협력의 사상은 어쩌면 인간이란 '종'의 심리를 형성하도록 우리 뇌에 프로그래밍된 본성일 수 있다. 보수주의자들은 농경사회 이후로 인간의 상이한 능력과 노력에서 비롯된 불평등이 인류를 발전시켜 왔다고 평한다. 특히 자본주의 시장경제 하에 노동에 대한 불평등한 분배로부터 축적된 자본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근간이라며 불평등을 찬양한다. 하지만 이를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 경제적 불편등이 사회적 불평등을 공고화하는 단계를 넘어 사회적 약자의 생존을 위협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소득이 가장 높아도 불평등도가 심각한 도시가 소득이 최하위일지라도 평등한 사회보다 사망률이 높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수렵과 채집의 시대로 역사를 되돌리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그렇지만 진보한 생산성과 막대한 잉여물을 바탕으로 인류공생의 길을 모색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 바이다.  


  네댓 살 때 일이다. 어머니가 낮잠을 주무시는 사이 비싼 손목시계를 몰래 풀었다. 그 시계를 분해하겠다고 망치와 펜치로 시계를 마구 두들겨 납작하게 만든 적이 있다. 호기심이 남달랐던 어릴 적 본성에 견주면 나는 도파민에 민감한 진보적 성향을 타고난 것 같다. 그런데 선친을 일찍 여위어선지 가급적 불확실한 걸 회피하고 위험한 선택을 자제하게 되었다. 자라난 환경이 나를 보수적으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나는 진보로 태어났으나 보수를 학습한 데서 비롯된 인지 부조화로부터 얼마나 불편한 삶을 살아야 했을까? 아직도 진보를 인류가 지향해야 할 미덕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정작 내 한 발은 은근슬쩍 빼내어 반대편에 걸쳐 사는 거 같아 찜찜하다. 게다가 나이 들면서 사소한 취미에 도파민이 자극되는 거 같아 걱정스럽다.


  레트로 열풍의 시대이다. LP와 카세트테이프를 찾는 MZ 애호가들이 엄청 늘었다. 경기가 어려운 시기에 과거에 대한 향수가 원인 중 하나로 거론된다. 그러나 LP가 주는 편안한 음질과 푸근한 분위기도 빼놓을 수 없다. 한두 시간 넘게 CD로 감상할 때처럼 머리가 아프지 않다. 아메리카노의 직선직이고 거친 맛이 아닌 드립 커피의 개운한 풍미처럼 평온함을 준다. LP에 담긴 음원은 대개 올드한 노래이거나 클래식이다. 한마디로 옛 음악이다. 듣는 매체에서 보수의 색채가 진할 수밖에 없다. 시대를 따라가기 위해서 가끔은 디지털 음원으로 새로움을 받아들여야겠다.


  어제 방을 같이 썼던 벨기에 할머니와 로그로뇨에 거의 같이 도착했다. 역시 3번이나 까미노를 완주한 관록이 어디 가질 않았다. 숙소에 도착하니 어제 만났던 김 선배와 구리 삼총사가 쉬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누나가 저녁을 사기로 했다. 워낙 타파스로 유명한 도시라 알려진 맛집에서 여러 종류를 맛봤다. 개중에 가장 맛있었던 건 양송이 타파스였다.



산솔 마을 식품점과 비아나 골목길
비아나 - 샌드위치와 토티야로 간단히 점심을 했던 엘 보르돈 레스토랑와 시골길
로그로뇨 초입과 시내로 가는 다리, 알바스 알베르게
타파스 바에서 누나, 김선배와 나는 콜라, 남양주 삼총사는 맥주와 콜라. 로그로뇨 대성당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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