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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차] 동키가 던져준 꼬꼬사

Fuck the Police - 본능과 경험된 학습의 인지부조화

by 여운설

2023년 5월 17일 로스 아르코스 – 로그로뇨 27.6km


목적지 로그로뇨까지 27.6km. 먼 거리와 빠듯한 일정을 감안하여 처음 동키를 신청했다. 동키란 출발지 숙소에서 다음 숙소까지 차량으로 짐을 배달해 주는 서비스다. 원래 모칠라 서비스가 정식 명칭이지만 흔히 동키라 부른다. 불필요한 짐들을 내 배낭에 쓸어 모아 동키로 보냈다. 걷는데 꼭 필요한 짐을 누나 배낭에 담아 짊어졌다. 누나는 간식거리와 옷가지만 에코백에 챙겨 맸다


건조하고 황량한 나바라 평원은 사막을 걷는 착각을 일게 한다. 서부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공간이동한 기분이다. 실제 마카로니 웨스턴은 스페인 남부 사막에서 촬영하지 않았나! 스페인 북부의 낯선 경치가 점차 눈에 익숙해져 무료해질 즈음이었다. 11kg 가까운 무게에서 해방되어 몸이 날듯이 가볍다. 가벼운 행장에 음악이 곁들여지니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고가 이어져진다. 동키가 던져준 꼬꼬사가 지루함을 날려 버린다.


동틀 녘 먼 지평선을 시뻘겋게 불태우는 태양이 순례객들에게 선물 하나를 불현듯 내민다. 옜다하고 던져준 건 팔등신을 훌쩍 넘긴 롱다리 그림자. 프랑스 루트는 동에서 서로 진행된다. 당연히 늦은 오후 전까지는 해를 등지고 걷는다. 햇살은 동쪽에서 떠올라 남쪽으로 커져가며 서쪽으로 진다. 덕분에 그림자는 시간에 따라 변신한다. 개중에 유독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게 있다. 고즈넉한 아침 길에 드리워진 키다리 아저씨 마냥 기다란 그림자다. 키다리 아저씨가 보일 때마다 재미삼아 까미노 위에 검게 드리운 그림자를 찍곤 했다.



키다리 아저씨와 함께 밀밭과 포도밭이 끊없이 이어진 메마른 들판을 걸었다.



일출이 오를 무렵 잠시 걸음을 멈춰 뒤를 돌아본다. 지평선 너머 까맣게 물든 어둠이 녹아내린다. 어둠이 물러난 자리 위로 이글거리는 불덩어리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세상을 구원할 예언자가 시커먼 죽음의 바다에서 떠오르는 분위기다. 자연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언제나 장엄하고 경건하다. 라틴어 sinister는 불길한, 적대적인, 야비한 이란 뜻이다. 해 뜨는 동쪽을 바라보면 왼손은 죽음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북쪽을 향한다. 이로부터 왼쪽을 지칭하는 라틴어 sinistra가 파생되었다. 반면 오른쪽을 뜻하는 dextra는 자비로운, 호의적인 의미의 dexter에서 유래했다. 왼쪽을 금기하는 이유를 고대 태양숭배 신화에서 찾는 해석이다. 왼손잡이로 태어날 확률은 10% 정도이다. 고대로부터 왼쪽을 터부시하는 관습과 숫적인 희소성에서 왼쪽과 왼손에 대한 편견이 오래도록 이어져 온다.


나는 오른손잡이다. 그러나 왼손으로 트럼프 카드를 섞는 게 더 편하다. 처음 카드를 만질 때부터 그랬다. 양손가락을 낄 때도 왼손 엄지가 오른손 위에 있는 게 자연스럽다. 본능적인 습성만 보면 나는 태생이 왼손잡이였는지 모른다. 그게 아니면 최소한 왼손잡이 성향이 더 강했을 것 같다. 그런데 오른손잡이로 자랐다. 아마도 사회적 학습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짝배기에 부정적인 시선을 피하기 위해 무의식의 방어기제가 발휘된 결과는 아닐까? 아무튼 타고난 습성은 학습과 선택이 아닌 숙명의 영역이 분명하다.


Billy Joel의 대표곡 중에 ‘Piano man(421위)’가 있다. 'The stranger'와 'Just the way you are'와 함께 빌리 조엘을 대표하는 베스트 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곡을 으레 그의 전성기인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의 작품이라 짐작했다. 그런데 사실은 데뷔 초창기인 1973년에 발표된 곡이다. 발표 당시엔 주목받지 못했다. 그가 유명해지면서 점차 인기를 얻게 된 스토리가 가슴에 와닿는다. 화려한 출발보다 더디지만 한 걸음씩 꾸준히 정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배운다. 도입부의 재즈 풍 피아노 솔로와 하모니카 협주가 돋보인다. 무명시절 빌리 조엘은 소속사를 바꾸고 싶었지만 그러질 못했다. 뉴욕을 떠나 LA에서 호텔 바를 전전하며 희망 없는 무대에 오른 경험담을 담담히 그렸다. 가사 속 등장인물들이 이루지 못한 꿈을 애타게 갈망하는 장면은 숙연함을 자아낸다.


Billy Joel - Piano Man(1973년, 421위)


시간의 흐름을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오류는 'Piano man'의 작곡 시기를 착각한 데 그치지 않는다. 내가 중, 고등학생일 무렵이다. 그당시에 2,30년 전, 그러니까 50~60년대 대중가요들을 구닥다리로 낙인 찍은 적이 있다. 내게 어울리지 않을 올드 가요라 치부한 것이다. 요즘 7080 팝송과 80~90 년대의 가요들을 종종 즐긴다. 모두가 사오십 년 전에 발표된 노래들이다. 중고등학생 때로 따지면 5060 올드가요는커녕 해방 이전에 발표되었을 노래를 즐기는 것이다. 어처구니 없을 일이다. 최신 아이돌의 EDM 스타일은 왠지 거북하다. 가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아 바로 외면한다. 아이돌 노래는 몇 년을 묵혀야 그나마 익숙해진다. 가끔 듣는 BTS나 블랙 핑크 노래들은 이들의 데뷔 곡이거나 데뷔한지 얼마 되지 않을 때의 곡들이다.


젊은 시절에 비해 낯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상당히 느리다. 이리 변했다는 게 끔찍하다. 급변하는 21세기에 경쟁에 뒤쳐져 낙오될 거란 불안감이 커진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흐른다. 어려서는 수많은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지만 나이 들어 자극에 덜 민감해지는 탓이다. 외부 자극과 신호에 둔감해진 게 나이 낫일까? 아니면 온라인 게임이나 만화와 같은 자극적인 도파민에 중독된 탓일까?


마흔을 훌쩍 넘길 때까지 힙합과 레게를 곱지 않게 바라봤다. 국내 뮤지션들의 과장되고 껄렁한 몸짓과 가벼운 언행이 성에 차지 않았다. 거칠게 사회적 일탈을 장려하거나 개인적인 반항에 그친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부당한 권위와 압제의 시대에 당당히 맞서는 저항 정신을 찾기 힘들었다. 우연찮게 힙합과 레게 장르의 태동 배경과 철학을 알게 되었다. 이들 장르에 인종차별을 혹독히 겪은 흑인과 곤궁한 자메이카인의 애환이 담겼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간의 편견을 버리게 된 계기였다.


힙합의 전성기를 이끈 그룹 중에 N.W.A.가 있다. ‘Fuck tha police(417위)’는 이들의 데뷔 앨범에 수록된 노래다. 이전의 힙합이 악을 모호하고 두리뭉실하게 설정했다면 N.W.A.는 공권력의 오용을 구체적으로 비판한다. 선과 악을 추상적으로 정의한 게 아니라 인간 행동을 기준으로 판가름한다. 흑인에게 인종차별과 가혹행위를 일삼은 백인 경찰을 고발한다. 1992년 LA 흑인 폭동의 도화선이었던 로드니 킹 사건을 연상시킨다. 비록 마약과 범죄 같은 부정적인 내용이 포함되었어도 이 곡엔 힙합의 저항정신을 담겨 있다. 뒷골목 흑인 문화는 오늘날 전 세계에 가장 영향력 있는 장르로 떠올랐다. 힙합에는 차별과 굴종을 거부하는 진보 성향이 짙게 배어 있다.


N.W.A. - Fuck tha Police(1988년, 417위)


나이가 들면 보수화된다고들 한다. 과연 인간은 세월에 따라 성향이 저절로 바뀌는 걸까? 정답이 없을 질문이자 무수한 갑론을박의 주제다. 그런데 최근에 논란을 종식시킬만한 과학적 현상이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진보 내지 보수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가설이다. 학습이나 이념에 따라 보수나 진보를 취사 선택하는 게 아니다. 타고날 때 이미 어느 하나의 성향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더 이상 성향이 다른 상대방을 도덕적으로 비난해서는 안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타고난 기질을 어쩌란 말인가!


보수주의자는 공포감정을 담당하는 편도체의 오른쪽이 두꺼우며 세로토닌이 활성화되어 있다. 그 결과 본능적으로 위험을 회피하고 사회적 규범과 질서를 따르는데 익숙하다. 진보주의자는 새로운 자극과 외부 정보에 반응하는 전대상회 부분이 두꺼우며 도파민 분비에 민감하다. 보상 회로를 주관하는 도파민 자극에 민감히 반응한 결과 자연스럽게 낯설고 새로운 것을 찾는 게 자연스럽다.


평등과 공유, 협력의 사상은 인간이란 ‘종’의 진화된 본능일지 모른다. 인류 역사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열악한 수렵과 채집 사회에서 살아 남기에 최적화된 생존 방식으로 우리 뇌에 프로그래밍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계급사회 이래로 인간의 상이한 능력과 노력에서 비롯된 불평등이 인류를 발전시켜 왔다고 믿는다. 특히 자본주의 시장경제 하에 노동에 대한 불평등한 분배를 칭송한다. 그로부터 축적된 자본이야말로 사회를 발전시키는 근간이라 찬양한다. 이를 인정한다손 쳐도 심각한 문제가 남는다. 경제적 불편등이 빈부 양극화를 공고히하는 단계를 넘어 사회적 약자의 생존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소득은 가장 높으나 불평등이 심한 도시가 소득이 최하위라도 평등한 사회보다 사망률이 높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평등과 공유, 협력을 위해 수렵과 채집의 시대로 역사를 되돌리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그렇지만 진보한 생산성과 막대한 잉여물을 바탕으로 인류공생의 대안을 모색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 바이다.


네댓 살 때 일이다. 어머니가 낮잠을 주무시는 사이 손목 시계를푼 적이 있다. 돌아가는 초침이 신기해 이를 분해하겠다는 일념으로 망치와 펜치로 마구 두들겨 비싼 손목시계를 망가트렸다. 호기심이 남달랐던 어릴 적 본성에 견주면 나는 도파민에 민감한 진보적 성향을 타고난 것 같다. 그런데 선친을 일찍 여윈 탓에 어려서부터 가급적 불확실한 걸 회피하고 위험한 선택을 자제했다. 자라난 환경이 보수 성향을 강화시킨 것이다. 진보로 태어났으되 보수를 키워 온 인지 부조화로 인해 그간 얼마나 불편하게 살아왔을까? 지금도 진보를 인류가 지향해야 할 미덕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정작 내 한 발을 은근슬쩍 반대편에 걸쳐 놓은 거 찜찜하다. 더군다나 사소한 취미로 분비되는 도파민에 중독되어 자극에 둔감해지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레트로 열풍의 시대이다. LP와 카세트테이프를 찾는 MZ 세대 애호가들이 엄청 늘었다. 유행의 원인으로 경기가 어려워져 과거를 그리는 향수가 거론된다. 하지만 LP가 주는 부드러운 음질과 따뜻한 분위기도 빼놓을 수 없다. 한두 시간 넘게 CD로 감상할 때와 달리 머리가 아프지 않다. 아메리카노의 직선직이고 거친 맛이 아닌 드립 커피의 개운한 풍미가 주는 평온함이 있다. LP에 담긴 음원은 대개 올드한 노래이거나 클래식이다. 한마디로 옛 음악이다. 듣는 매체 성격상 보수 색채가 진할 수밖에 없다. 시대를 따라가기 위해서라도 가끔씩 디지털 음원으로 최신 음원을 받아들여야겠다.


어제 방을 같이 썼던 벨기에 할머니와 로그로뇨에 거의 같이 도착했다. 역시 세 번이나 까미노를 완주한 관록은 어디 가질 않았다. 숙소에 도착했다. 어제 만났던 김 선배와 구리 삼총사가 쉬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누나가 저녁을 사기로 했다. 워낙 타파스로 유명한 도시라 타파스 맛집 중 한 곳을 찾았다. 여러 종류를 맛봤다. 개중에 가장 맛있었던 건 양송이 타파스였다.


산솔 마을 식품점과 비아나 골목길
비아나 - 샌드위치와 토티야로 간단히 점심을 했던 엘 보르돈 레스토랑와 시골길
로그로뇨 초입과 시내로 가는 다리, 알바스 알베르게
타파스 바에서 올드 보이들은 콜라를 남양주 삼총사는 맥주와 콜라를 마셨다. 로그로뇨 대성당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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